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3)

Que sais 2020. 12. 24.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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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리에 맞지 않는 검투>

검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보다는 스포츠적 요소가 강하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은 사실이므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대세가 되자 사람의 목숨이 오락거리로 쓰이는 건 고대인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윤리적으로 논란거리였다. 기원 3세기의 체칠리우스 치프리아누스도나투스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네의 눈과 귀를 도회지로 돌려 보면, 자네는 가장 황폐한 곳에서보다 더 슬픈 군상들을 보고 마음 아파할 것이다. 저곳에는 포악한 눈들의 욕망을 피로 충족시키기 위해 칼부림 유희를 준비하고 있다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 몸을 살찌우고, 건장한 지체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살육 당하기로 이미 작정된 살찐 육체가 더욱 값비싸게 죽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일세.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죽어 가고 있네.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경험을 쌓고 연습하고 기술을 연마하지. 이런 극악하고 비인간적이고 더 참혹한 일이 어디 있겠나? 살인하는 능력을 쌓는 것이 훈련이고 사람 죽이는 것이 영예이네. (중략) 멀쩡히 살아 있는 자들이 자원해서 자신의 장례를 위해 치장되고 있고, 처참히 죽은 자들이 영광을 받고 있네.’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교회에서는 검투 대회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로 규정했다. 그래도 검투는 계속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검투의 인기가 하락하고 검투사 충원이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결국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재위 395423)검투장을 폐쇄했다. 이후 검투는 거의 개최되지 않았는데 523년 이탈리아를 지배한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검투를 금지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사실 그가 검투의 중지를 명령하리라는 것은 그가 등장할 때부터 이미 예측된 일이다. 그것은 로마에서 벌어진 수많은 검투에서 희생된 검투사들의 상당수가 그의 선조인 게르만족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681에 공식적으로 검투가 금지되어 완전히 소멸한다.

그러나 그동안 로마를 좌우하던 검투가 중단 조치되었다고 해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볼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검투를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볼거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기사들의 토너먼트 경기이다. 중세시대를 풍미한 토너먼트 경기에서 수많은 기사들이 사망했는데 워낙 토너먼트 경기도 검투처럼 위험하다는 뜻이다. 바로 그 점 즉 위험하다는 것이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검투사가 되는 사람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나 노예시장에서 구입한 주인이 검투사로 지명한 경우이다. 그러나 검투의 인기가 폭발하자 많은 자유인들이 검투사를 지원했다. 이는 검투사가 되는 것이 당대에 가장 큰 매력이라는 뜻인데 일부 학자들의 계산으로는 검투사 10명 중 2명이 자유인이었다고 한다.

다소 놀라운 것은 검투사들의 생활이 반드시 외부와 차단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연인을 가질 수 있었고, 가족을 갖고 있는 검투사도 있었다. 그러나 검투사가 로마인들로부터 큰 갈채를 받고 검투로 많은 돈을 벌어 자유를 사는 검투사들도 가능했지만 근본적으로 검투사들은 로마인들로부터 타락한 자’, ‘야만인’, ‘수치스러운 자로 불리며 사회적인 지위는 대체로 창녀와 동급이었다. 이는 노예 중에도 가장 최하 등급을 의미한다.

또한 자유를 얻으면 자유인이란 목검(Rudis)이 지급되었는데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해방 노예와는 달리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유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항복 외부인신분이 주어졌다.

 

<검투사들의 훈련>

검투사들은 검투사 훈련소양성소(Ludus) 소유자인 라니스타(lanista)에 속하여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고 검투에 출전한다. 검투사 양성소에서는 대부분 전직 검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가 검투 기술을 지도하는 교관으로 활약하며 이곳에는 의사, 마사지사 등이 검투사들을 도왔다.

검투사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다. 목검으로만 훈련했던 이유는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이지만 기본은 반란의 위험을 막기 위함이다. 진검은 검투에 참석할 때 비로소 주어졌다.

검투사는 사실 전 로마에서 최상의 검술 실력과 싸움 기술이 뛰어난 존재들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검술 훈련 말고도 진지 구축이나 숙영에 관련된 잡다한 기술을 배워야하는 로마 병정과는 달리 검투사들은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검술 실력은 당연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검투사들에 대한 교육은 상당히 고급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검투사들은 목검으로 나무를 타격하는 기초적인 기술 훈련에서부터 다양한 체력훈련을 하였는데, 무작정 지옥같이 힘들게 훈련을 시키는 방식은 아니라서 4을 기준으로 돌아가면서, 매일 훈련량이나 방식을 다르게 했다. 첫날고강도 훈련을 하지만 준비 목적으로 시간을 짧게, 둘째 날은 고강도 장시간 체력훈련, 셋째날휴식, 넷째날중강도 훈련을 받았다. 4일에 한 번씩 휴식을 가지면서 훈련강도와 시간도 다르게 조절하면서 선수들의 체력배분에 신경을 써서 훈련프로그램을 짰다. 더불어 목적에 따라서 근력, 스피드, 체력향상용 복합 컨디셔닝 트레이닝 등으로 체계적으로 나뉘었다.

근력 훈련은 땅파기와 무거운 물건 들기 및 들고 걷기, 로프 오르기, 줄 및 대들보 타기, 중량을 들고 팔을 올린상태로 다른 사람이 밀어대는 것을 버티기 등으로 오늘날 유격 훈련과 다름없다.

스피드 훈련으로 뛰기와 펀치백 치기, 공을 들고 뛰기, 섀도우 복싱,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 등 달리기 연습에도 발끝으로 선 상태로 팔의 전후 왕복속도만 빠르게 하거나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빠르게 왕복하는 제자리 뛰기 훈련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를 혼합한 복합 체력 조절 및 훈련으로 고반복 제자리 점프, 무게를 지고 점프 등이 있는데 이는 현재 체력 증진용 육체미 운동과 유사하며 갑옷입고 전력질주 등이 있었다.

 

검투 훈련소 훈련(영화 스파르타쿠스 한 장면)

훈련을 위해 여러가지 운동기구도 사용하였는데, 할레테스라그리스식 덤벨도 있었고, 자연석이나, 혹은 암석에 손잡이용 구멍을 뚫어서 훈련에 사용하기도 했는데 현존하는 것 중에는 100kg가 넘는 훈련용 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외에는 모레주머니도 있었고, 현대 기계체조의 안마(pommel horse)와 동일한 것도 있었다.

검투사들의 실력과 충성심이 뛰어나므로 로마는 자유를 얻은 검투사들을 우대했다. 이들은 황제의 근위대에 채용하거나 내전이 벌어지면 검투사 부대를 조직해서 투입하기도 했다.

경기장 내에서 검투사들의 검투는 실전뿐인데 서로 봐주거나 짜고 치는 경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검투 경기는 조 추첨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관중이나 검투사들도 자신이 정확히 누구와 싸우게 될지는 경기 날짜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는 검투사의 특기를 감안하여 상대방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투사들은 평소 양성소에서 훈련하면서도 훗날 자신과 싸우게 될 검투사 그룹의 기술이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그런데 여러 검투사 양성소가 참여할 정도로 큰 경기의 경우 서로 다른 양성소의 상대끼리 싸워야하므로 상대방의 양성소에서 어떤 유형의 전술을 익혔는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장점으로만 경기를 치룰 수 없다는 뜻이다.

참고적으로 로마 전체로는 186곳 이상의 원형투기장이 확인되었으며, 추가로 86곳의 미확인 투기장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와 같이 많은 검투장은 로마에서 검투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검투 훈련소의 훈련이 매우 고되었다는 것은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투사들도 인간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로마인의 볼거리를 위해 동료끼리 싸우게 되자 이들이 야만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목을 졸라 절명한 사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훈련생들의 식사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검투사들의 체력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로마에서 보리를 먹으면 몸이 불어나 출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주식은 주로 보리였다. 그런데 당시 로마 시민의 주식은 보리가 아닌보리는 주로 가축의 사료용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검투사를 조롱하는 말로 보리 먹는 놈들(hordearii)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기초적인 훈련을 끝내면 각자가 사용할 장비들이 배정된다. 검투 스타일은 일반 전투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의 무술 대련에 가까우므로 실제 검투 경기 중에는 자신과 다른 장비를 사용하는 검투사들의 스타일 익히도록 교육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격심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한 낙오자는 짐승과 싸우는 베스티아리(Bestiarii)가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들 역시 검투장에 등장하여 동물과 싸우지만 엄밀하게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아니다. 글래디에이터는 사람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도 검투 이벤트에서 매우 중요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맹수와 싸움

모두 위험한 맹수들이므로 활과 창, 횃불, 갑주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맹수들과 대결했다. 이들은 대체로 각지에서 수입한 동물들과 싸웠는데 카스피 호랑이, 코뿔소, 시리아코끼리, 아틀라스불곰, 유리시아 불곰, 아시아사자 같은 희귀한 맹수들과도 대적했다. 맹수와 정면으로 대항할수록 더 많은 환호를 받았다. 오늘날 투우와 유사하다. 심지어 곰이나 사자를 맨손으로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대체로 베스티아리가 승리하지만 동물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베스티아리도 많은 상금을 받았으므로 검투사보다는 못하지만 용기있는 사람으로 대접받아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알려지기로는 네로와 코모두스 황제도 직접 베스티아리로 나와 맹수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특히 코모도스는 검투에 상당한 자질을 보여 시속 70km 정도로 전력질주하는 타조를 활로 쏴 맞히기도 했다 한다. 그는 기린, 얼룩말 같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코끼리3마리나 잡아 상당한 사냥 실력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베스티아리는 검투사와 다른 볼거리로 제공되곤 했다. 이는 중범죄자를 맹수와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것으로 사실상 처형이기 때문에 맹수를 죽이더라도 범죄자가 죽을 때까지 맹수를 계속 투입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정통 베스티아리와는 달리 매우 빈약한 무장을 했다. 심지어는 맨몸에 가까운 상태로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워야 했는데 기록에는 맹수들이 죄수를 처형하는데 두 마리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빙성이 다소 약하지만 한 마리 숫사자가 이런 식으로 200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과거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했으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이 형벌을 폐지해달라고 콘스탄티누스에게 청원하여 폐지된다.

검투사는 한 곳에서만 검투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속한 검투사 양성소의 주인인 라니스타에 의해 각지의 검투장을 순회하며 검투 이벤트에 참여했는데 현재로 보면 순회 검투 서커스와 다름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감안해야할 것은 검투사는 소모품이 아니라 순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검투 이벤트를 기획하는 측은 상당히 공을 들여 검투사가 피해보지 않으면서도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신경을 써서 대진표를 만들었다. 적어도 검투사끼리 시합을 하는 날에는 오늘날에 생각하는 그런 룰도 없는 잔혹한 쇼는 아니었다. 물론 범죄자인 경우 훈련없이 곧바로 검투장으로 직행하여 방어구도 없이 검투하여 대부분 검투장에서 죽었다.

검투사들의 역사에서 그들의 자질이 유용하게 적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이 전투의 프로라는 점 때문에 군대의 신병 교육에 투입되기도 했다. 기원전 100년경 신병 훈련을 위해 군의 지휘관들에 고용되어 전투 기술을 보병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남다른 실력을 인정하여 69오토 황제검투사 2,000으로 부대를 편성했다.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이들을 수치스러운 보조병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