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2)

Que sais 2020. 12. 24. 20:32

youtu.be/GgPuyKamYTw

<로마에서 검투 탄생>

로마의 간판이라면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검투를 꼽지만 검투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설명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대체로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인들이 사자를 위해 개최한 제물 의식이 변화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 역시 정설은 아니다.

다른 설명은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 기원설인데 기원전 4세기 파에스툼(Paestum)의 무덤 벽화에 검투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는 것을 볼 때 검투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행되었다고 추정한다. 역사학자 리비우스캄파니아인들이 적인 삼니움인을 검투사로서 싸우게 했다고 기록했다. 학자들은 이들 지역에서 기원전 1세기경 검투가 가장 성행했다고 설명한다.

기록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검투사 시합기원전 264에 로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아버지의 장례식을 기념하여 보아리움 광장에서 이루어진 검투사 시합이다. 리비우스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의 검투를 언급했는데 기원전 174 티투스 퀸크티우스 프라미니우스가 주최한 74인의 검투사로 이루어진 투기 대회가 매우 특별했다고 적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원형 투기장이 건설되자 로마 안의 각 지역에서의 검투는 보다 활성화된다. 여하튼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의 추도 검투(무누스)가 인기를 끌었는데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는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의 축제 즈음에 개최되었다고 알려진다.

추도를 목적으로 한 검투가 흥미를 끌자 볼거리로 변형된다. 이것이 정치입문자들의 이벤트로 변질되어 검투는 보다 자극적으로 활성화된다. 로마에서 원로원 등의 정치는 매우 중요하므로 검투는 점점 규모가 커지는데 이는 공직 선거와 검투가 밀접하게 연계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의 영토 확장과도 맛물린다.

로마는 전쟁의 여파로 대량의 전쟁 포로를 획득했고 이들 포로들을 검투사로 만들었다. 특히 당대의 야만인으로 인식된 갈리아, 삼니움, 트라키아인들이 인기를 끌었다

검투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와 그의 후계자로 초대 황제가 되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실제로 몸으로 겪은 사람으로 원로원에서 스파르타쿠스 토벌군을 구성할 때 로마의 방위를 지킨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검투의 효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배은숙로마 검투사의 일생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기원전 46카이사르갈리아이집트아프리카폰투스를 정복한 것을 기념해 로마 광장에서 검투사 경기를 벌였을 때 카이사르는 관습적으로 하는 것처럼 로마 광장에서 한 쌍씩 싸우게 했다그러나 그는 대경주장에서는 여러 명씩 싸우게 했다.’

 

그는 검투를 자신의 정치 선전 대회로 활용했는데 기원전 65, 검투사 640인을 동원하여 대규모 검투 이벤트를 개최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종료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인데 명분은 오래전에 타계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또한 기원전 46년에는 보다 대규모로 개최하여 총 1,200명의 검투사가 투입되었는데 전례를 깨고 8년 전에 죽은 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추도를 목적으로 개최했다.

 

수중전 모습

가장 놀라운 것은 시저가 로마 근교의 마르스 광장에 연못을 만들어 군함을 띄우고는 모의해전을 벌여 인기를 얻었는데 이후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도 해전을 벌였다고 알려진다. 콜로세움에서 어떻게 물을 채우고 해전을 할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해전에 대해 기록했음을 볼 때 사실로 여겨진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도 검투의 정치적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사실 로마의 역사를 볼 때 검투사 경기가 지닌 정치적 선전의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를 독점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였다그는 검투를 정규적으로 개최하도록 만든 최초의 황제인데다 검투를 황제의 통제 하에 두었고 황제 자신도 경기를 참관하는데 열성이었다. 병이 났을 때는 들것에 실려 경기장에 들어갔을 정도라고 알려진다.

제정 초창기의 네로 황제해방 노예인 검투사 스피쿨루스에게 군사령관들이 개선식에서 벌어들이는 것과 똑같은 값어치의 돈과 집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네로가 검투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로마인들의 평판을 이끄는 첩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모두스 황제

반면에 코모두스는 돈을 걸고 검투했는데 알려지기는 다른 검투사들과 똑같이 맨발로 싸웠다고 한다. 단 그와 싸운 일반검투사와는 다른 것이 있는데 그는 매번 60만에서 100만 세스테르티우스(25만 데나리우스)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5현제 중 한 명으로 코모두스의 아버지이자 명상록의 저자인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검투사 경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역시 로마에서 검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검투를 위한 적극적인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경기 개최로 인해 발생하는 상류층의 재정적 부담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검투사 경기에 열광하지 않았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검투사와 관련된 세금을 폐지하고자 했다검투사 소유주가 검투사들을 판매해 얻는 수입에서 내는 2533퍼센트의 세금이 매년 2,0003,000만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는데이 돈을 포기한다는 것이다이유는 검투사 가격이 비싸 경기를 개최하는 속주의 사제들과 상류층의 부담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야만인들과 전투를 위해 지배층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세금을 줄여줌으로써 검투 주최자와 검투사 양성소 주인들의 호응을 얻고자 했다또 경기 개최로 인해 재정 부담을 느끼던 속주의 상류층들에게 세금 감소를 빌미로 사제직을 맡도록 종용할 수도 있었다황제가 제시한 안에 원로원은 검투사들의 가격을 제한하고경기 개최 비용에 상한선을 둘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 로마인들의 볼거리인 검투가 역전되기도 한다. 각종 전투에서 포로가 된 로마병 역시 검투를 강요했는데 역사학자 오로사우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

 

<카프아 검투소에서 출발>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동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적어도 검투사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는 것이 옳다는 시각인데 학자들은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를 매우 간단하게 설명한다.

검투사로서의 운명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가 매우 참을성 있게 검투사의 반란을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검투사들도 인간임을 일깨워 주며 검투사들을 몇 개의 분대로 나누고 각각 숙련된 분대장을 정했다. 검투사들이 참을성 있게 반란과 같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검투사들이 항상 죽음을 놓고 격투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려주지만 상황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있었던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렌툴루스 바티아투스'가 소유한 곳인데 검투사들은 주로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플루타크 영웅전의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소속된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는 다른 곳보다도 검투사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열악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노예나 포로들이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당시 로마의 검투사는 상당히 인기있는 직업이었다. 놀라운 것은 검투사들의 구성비에 있어서도 노예나 하층민보다 자유인 즉 로마시민의 비중이 더 높았다는 기록도 있다.

 

검투장에서 탈출(영화 스파르타쿠스 한 장면)

이는 검투사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기 때문인데 대체 그들이 얼마만큼 돈을 벌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알려져 있다.

검투사중상을 입어 싸울 수 없게 되거나 죽었을 경우, 검투 주재관이 시장가격에 맞게 주인에게 돈을 지불했는데 보상비는 오늘날의 비용으로 약 10억 원 정도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액수는 많은 돈을 투자해 양성한 주인으로서는 검투사가 살았을 경우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서 매우 적다고 적었다. 당대의 검투사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검투사들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검투의 결과를 놓고 도박판을 벌렸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검투사들의 이름, 경기 전적, 부상 정도를 줄줄 외우고 다니면서 도박에 돈을 걸었다. 여자들은 검투사들의 남성미에 눈길을 주었는데 그들의 몸을 한 번 만지기만해도 많은 돈을 지불해야했다. 검투사의 몸을 만지는 것이 행운을 갖고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