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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4)

Que sais 2020. 12. 24. 20:39

youtu.be/WuHEALsWIvA

검투는 황제나 정치가, 지방 명문가가 주최하였으며, 대부분의 표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나눠주었지만 공화정 말기부터는 판매도 했다. 또한 표를 구하지 못한 하층계급과 비()시민계급 사람들은 최상층의 입석에서 관전할 수 있었다.

투기 대회의 규모는 다양했다. 집정관 선출을 위해 크로디우스 프라쿠스가 주최한 검투 이벤트에는 다음과 같이 안내문을 돌렸다.

 

30개조를 짜서 3일 동안 열리며 빨리 죽을 경우 대체할 검투사도 있다. 야생동물 사냥도 있으며 유명한 검투사 파리스도 참가한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네로 황제의 종신신관 데키무스 루크레티우스 사투리우스 와렌스부자(父子)의 검투 이벤트 고지문에도 총 30개조의 시합이 벌어졌는데 이때는 4일 동안 치러졌다고 적혔다. 기원전 22년 검투에는 120개 조를 최대 숫자로 규정했는데 황제가 주최하는 경우에는 예외이며,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14)8회를 개최하여 5,000개 조를 싸우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서 일부 검투시합 고지문에 목숨 살려주기 없음이라는 글도 발견된다.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면 흥미가 반감된다는 뜻도 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것을 금지했다. 한마디로 패배한 검투사도 살려줄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학자 조지 빌 박사1세기 경, 100번의 시합에 참여한 200인의 검투사 중 19명이 사망해 생존율은 9이 넘었다고 적었다. 물론 검투가 보다 과격해지고 사망자가 다수 속출되면서 정통 검투사가 줄어들자 결국 낙오한 노예나 범죄자로 검투사를 만드는 비율이 높아져 사망률이 훨씬 높아진다.

 

코모두스의 처형(글래디에이터 한장면)

검투 이벤트가 대중의 인기를 누릴수록특정 검투사들이 대중의 인기를 누릴수록 검투사 개인의 몸값은 올라갔다특히 패자가 반드시 죽어야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검투사들에게 큰 잇점이었다. 경기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경기 내용이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면 패했음에도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처럼 매력적인 것은 없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보자.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할 때 검투 주재관은 관중석으로 고개를 돌렸다결정권을 관중에게 준다는 의미를 띤 몸짓인데 이때 관중이 임의적이고도 거친 재판을 시작했다결정의 기준은 싸움에 임하는 자세즉 얼마나 용감하게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 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약하고 구걸하는 검투사를 싫어했다. 로마인들은 검투장에 나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비록 육체는 무너졌으나 정신은 살아 있는 사람 즉 패배할 때마다 전보다 더 큰 도전정신으로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선호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최선을 다한 검투사의 모습이야말로 관중들이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사실 용감하게 패배하는 것은 이미 훈련소로부터 입력되는 검투사의 기본 자질이었다. 한마디로 검투사들이 기본을 지킨다면 패배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결정권을 쥔 관중들이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라고 외치면 경기 주재관은 심판에게 패배한 검투사를 산채로 떠나보내라는 손짓을 했다

유명한 검투사인 메일레시스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

 

나는 메일레시스라 불리고민간 이름은 메스트리아노스나는 다섯 번 싸웠고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이제 내가 부상당했다아내인 알렉산드라가 남편을 기억하여 자신의 돈으로 이 비를 세웠다. 이 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안녕히!’

 

승리했지만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은 죽이지 않는 싸움을 했다는 의미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그에게 패한 5명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다.

검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은 말할 여지가 없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놀랍게도 제정 초에는 패자가 살 확률이 75퍼센트나 되었다. 그런데 제정 후기로 들어가는 3세기에는 55퍼센트로 낮아졌다당시 로마의 인구를 약 5,0006,00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이를 토대로 하면 매년 8,000명이 경기장 내에서 사망했다는 뜻이다. 이는 전체 20세 남성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런데 4세기 검투사의 사망률은 훨씬 낮아졌다. 로마의 경제가 쇠퇴하고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상황이라 검투사를 무한정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특별한 경우 검투장 안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기도 했는데 이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그러므로 무딘 무기를 쓰거나 날카로운 무기라도 검투사가 처음 상처를 입으면 격투를 종결짓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검투사는 연간 3, 4회 정도 시합을 벌이는데 20번 싸우기 전에 대부분 죽거나 목검을 수여받아 은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칠리아의 검투사 프란마(Flamma)의 묘비에는 16살에 검투사를 시작해 4목검(Rudis)을 받았는데도 계속 검투에 참여하여 마지막 경기인 34번째 경기에서 30살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최종 전적은 342194패였다고 한다.

여하튼 오래 산 검투사들도 있지만 검투사 중 4분의 310번도 채 싸우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평균 수명은 22.5세였다

 

<검투사들의 반란>

로마의 검투가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경기이지만 현대의 이종격투기 선수들과 비교할 정도라는 설명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 등 전문 검투사가 일치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킬 정도라면 그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살아야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바티아투스에 반기를 들고 기원전 73년에 약 70여 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는 바티아투스의 활약이 대단하지만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기록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반란 초창기에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파르타쿠스70여명의 검투사들과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소규모 탈주극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도망친 곳은 베수비오 산의 산악지대인데 이 당시 베수비오 산은 매우 삼림이 울창했다. 잘 알려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시가 매몰되는 것은 이로부터 150 뒤의 일이다.

 

이탈리아 폼페이의 검투 양성소 유적

문제는 초창기 탈주한 이들이 전문 검투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들을 단순 탈주범으로 생각하여 카푸아 당국은 이들을 제압할 토벌대를 파견했는데 오히려 토벌대가 스파르타쿠스에 의해 격파 당했다. 한마디로 진압군을 제압하여 스파르타쿠스의 기세가 올라가자 이들에 노예들이 합류하면서 세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카푸아는 초창기 대응이 미숙했다며 중앙 정부에 노예들의 진압을 요청했는데 로마 정부 역시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정규 로마 군단병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로마는 3,000명의 신병을 긴급히 징집한 후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 또는 바리니우스 글라베르에게 지휘권을 주어 토벌토록 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글라베르는 베수비오산으로 올라가는 길들을 모두 차단하고 한 발짝씩 올라가면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들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노예군은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야생 넝쿨로 밧줄을 만들어 험한 바위를 타고 내려와 글라베르군의 후방으로 돌아가 급습했다. 불의의 기습에 로마군은 완전 격멸되었다.

그러자 로마는 2차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000을 편성하여 출진시켰지만 바리니우스의 부관인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는 또다시 스파르타코스에게 격파 당한다.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을 받아 벌거벗은 채 살해당했다고 알려진다.

반면에 바리니우스는 남은 장병으로 스파르타쿠스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밤 중에 시체를 살아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빠져나갔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곧바로 추격했지만 그 역시 격파당하고 수많은 군수물자를 스파르타쿠스에게 빼앗겼는데 이 중에는 군기도 포함되었다.

로마 군기를 탈취 당했다는 것은 로마에 엄청난 굴욕을 안겨주었고 이에 반해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높이 치솟았다. 두 차례나 로마 정규군을 무찌르자 그의 명성은 로마 전역으로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고의적으로 양치기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앞을 다투어 스파르타쿠스에 합류토록 유도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들에 눈독들인 것은 당시의 양치기 노예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발이 빨랐으며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 당시 스파르타쿠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느냐에 논란이 있는데 문헌마다 숫자가 4만에서 12만 명까지 다양하다. 최종적으로 12만 명이나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장 적은 수인 4만 명이라도 고대에는 엄청난 숫자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