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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5)

Que sais 2020. 12. 2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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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와 대적한 토벌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급조된 시민군이라 로마 정규군은 아니지만 로마를 대변하는 로마의 정규군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쿠스가 이들 공권력과 대결하여 승리했다는 것은 검투소에서 불만으로 탈주한 단순 검투사 집단이 아니라, 로마와 상대할 수 있는 집단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비화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여세를 몰아 누케리아, 투리,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때마다 병력을 확장하고 전리품도 대거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로마에 학대받았던 원한이 첩첩히 쌓여 있던 노예 병사들은 가는 곳마다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을 수시로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로마 역사가들은 이때 스파르타쿠스가 약탈을 중지하고 이탈리아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노예군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왼팔로 알려지는 크릭수스 역시 로마놈들을 죽이자!’라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나중에 둘이 갈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분란의 조짐이 있기는 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므로 대비해야한다고 하자 이에 따라 그들은 야생마를 잡아 기병대를 조직하고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또한 약탈한 귀중품 등으로 철 또는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 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예상대로 로마는 그해에 선출된 두 명의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에게 각각 2개 군단의 병력을 주어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을 명했다. 두 명의 집정관이 군단 지휘권을 가지고 각각 2개 군단의 정규군을 적국의 병사가 아닌 반란군 토벌에 투입된 것은 로마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스파르타쿠스에게 치명타가 터진다. 그와의 의견차이로 검투소에서 함께 탈출한 크릭수스가 약 3,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이탈하는데 로마 집정관 겔리우스의 장병들이 그를 추격하여 가르가노 산에서 대파하면서 크릭수스를 죽인다.

크릭수스는 대체로 골족 현재의 프랑스 지역 출신으로 추정한다. 골족은 당대에 나름대로 공성병기도 갖고 있었으므로 당대에 로마인들 못지않은 문명인이자 전투민족으로 스파르타쿠스에 사사건건 반기를 든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나머지 병력으로 북상하여 갈리아로 진격하려했는데 여기에서 로마군도 패착을 던진다. 스파르타쿠스의 진격 길에 렌툴루스가 독자적으로 그의 진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두 명의 집정관이 출정했는데도 둘이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승자 한 명에게만 영광이 돌아가 개선식을 치룰 수 있으므로 서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렌툴루스는 자신의 병력 즉 2개 군단만으로 급히 전투를 서둘렀는데 이것이 패인이 된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쿠스가 놀랍게도 정규군인 렌툴루스의 군단을 격파한 것이다.

이 사건이 워낙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으므로 오히려 이 당시의 기록이 거의 없다. 우선 어디에서 전투가 일어났는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오로지 로마군단이 패주했다고 적었다. 학자들은 이 당시 전투를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이유로 로마 역사가들이 로마 정규 군단이 노예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기 때문으로 본다.

이들 전투를 보면 스파르타쿠스가 로마 정규군을 격파할 때 일단 숫자만 믿고 무식하게 돌격만 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렌툴루스의 로마군이 스파르타쿠스의 일부를 포위했을 때 스파르타쿠스가 나머지 부하들과 렌툴루스를 기습하여 승리했다고 적었다. 곧이어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을 추격해오는 겔리우스의 군단도 격파했으며,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병력까지도 격파했다.

당대 최강의 로마 정규군울 격파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집정관이 지휘했는데도 스파르타쿠스가 격파했다는 것이야말로 로마로서는 치욕 중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집정관(Consul)이란 공화정에서 정무관 중 최고 지위로 로마법에 따라 로마의 통치권을 대표단으로부터 부여받음으로써 로마의 최고통치자로서 법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군사, 행정, , 원로원 임원 임명 및 추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원로원과 민회를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임기는 1년이며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Proconsul)이 되는데 집정관이 로마에서 중요시된 것은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만이 속주 총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로마인들이 생각하기에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할 줄 아는 물건인데 이 물건에게 패배했다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충격이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당대 현직 집정관 2명과 전직 집정관 1이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군단 수만 따져 봐도 집정관 1인당 2개 군단이므로 6개 군단이 패배를 당한 셈인데 당시 로마군 1개 군단은 5,000명이므로 로마 정규군 30,000명이 격파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로마인들을 격분케 하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스파르타쿠스가 포로로 잡은 로마인들로 하여금 격투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스파르타쿠스 진영에서 이탈하여 겔리우스와 대결하다 전사한 동료 크릭수스를 위해 벌인 것이었지만 여하튼 로마인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로마 원로원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개했는데 이런 추모 경기는 로마에서도 로마의 높은 고관들을 위해서만 열리는데 노예들이 거꾸로 로마인들을 동원하여 검투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회군>

로마 정규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전 로마에 알려졌고 스파르타쿠스가 진격하는 길마다 인원이 합류하여 그들은 12만 명의 대군으로 불어났다고 알려진다. 이 기록은 로마 역사가 아피안의 기록에만 등장하지만 다소 과장된 숫자라 하더라도 엄청나게 세력이 증가한 것은 확실하다.

이들은 알프스까지 행군하였고 로마군으로서는 이들을 추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것은 폼페이우스 지휘하의 로마의 주력군 등이 외부 원정에 나가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목표는 일단 해방된 노예들을 데리고 알프스 산을 넘은 다음 현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로 진군하여 그들을 각자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부하들에게 약탈 행위를 금지시키고 주로 무기를 탈취하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현대학자들을 혼동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스파르타쿠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폴리 지방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자들이 현재도 이것이야말로 스파르타쿠스 최대의 실수라고 지적한다.

스파르타쿠스 본인이 로마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것을 최종 목표인데도 불구하고 한창 기세좋을 때 로마로 다시 들어온 이유에 대해 학자들간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로마군에게 여러 번 승리를 거둔 노예 부하들이 그의 제안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추론이다. 그들은 로마를 짓밟아서 로마인들에게 치욕을 주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에게 한을 만들어 주었던 로마인들을 철저하게 부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특히 스파르타쿠스는 약탈과 살인을 금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은 반란에 참가한 일부 노예군들에게 사기 저하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둘째당시 트라키아 지역은 매우 열악한데다 야만족이 들끓는 지역이므로 식량부족 등을 이유로 부하들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반란 초기에도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므로 이 설명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배리 스트라우스 박사스파르타쿠스 군단의 상당수가 켈트, 게르만족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아닌 소위 선진문명인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2, 3세대 노예라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들에게 알프스 이북은 고향이 아니라 타향이라는 시각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세력 확대를 위해 포섭한 이탈리아 남부의 빈민과 양치기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알프스를 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실질적인 문제도 제기된다. 현재도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닌데 몇 만 명이 알프스를 넘다가 상당수가 중도에서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생 이탈리아 남부의 온화한 기후에서 살아 온 그들에게 거대한 알프스 산맥이 주는 압도감을 결코 간과할 수 없으므로 이탈리아를 떠나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라수스의 등장>

스파르타쿠스가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파악한 원로원은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스파르타쿠스 토벌의 명을 내린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토벌 장군으로 등장하는데 크라수스 역을 소화한 배우가 작위를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므로 더욱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여하튼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가장 부자답게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8개 군단 즉 40,000명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군단과 맞서 싸우게 된다.

당시 서열로는 크라수스법무관이므로 집정관보다 낮은 등급이다. 그러나 그가 토벌 장군으로 임명된 것은 두 집정관이 이미 노예군에게 패배하여 더 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자격이 소멸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크라수스는 8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므로 2명의 집정관 다음 서열이므로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다. 더불어 로마제국 최대의 부자인 크라수스가 사비를 털어 병력을 소집한다는데 막을 명분도 마땅치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크라수스는 토벌군으로 임명되자 패배한 집정관의 군단들에게 로마군의 법정 최고형인 데키마티오(decimatio), 10분의 1을 내린다. 로마군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으로 패배한 장병들을 일 열로 세워놓고 10명 당 한 명을 순서대로 뽑아 나머지 아홉 명의 동료들이 때려죽이게 하는 형벌이다.

원래 데키마티오로마군의 전통이라고 볼 수 있지만 너무 잔혹하다하여 선고만 하고 실제로는 시행하지 않거나 혹은 소수 범법자들만 대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이를 스파르타쿠스에 패배한 로마군 전체를 대상으로 직접 집행했다고 알려진다. 크라수스의 결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8개 군단이나 되는 로마 정규군과 대적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반도를 통과하여 장화 끝에 있는 레기움 현재의 레지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그들이 시실리아로 달려가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본다.

레기움과 시실리아는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메시나 해협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메시나 해협을 스파르타쿠스는 소아시아의 실리시아 해적들과 계약하여 건너려했다.

시실리아는 스파르타쿠스 봉기 전에도 두 번이나 노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으므로 노예군이 근거지를 만드는데 유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파르타쿠스가 수많은 노예들을 이끌고 시실리아로 들어가려는 판단 자체는 옳았지만 문제는 상대가 크라수스라는 점이다. 스파르타쿠스가 해적들과 접선하여 배를 타고 로마 반도를 탈출하려 했지만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보다 더 많은 자금을 약속하여 해적들이 배신했다고 알려진다.

여하튼 크라수스가 포위망을 구축하여 스파르타쿠스를 압박했는데 스파르타쿠스의 저력은 놀라워 크라수스의 포위망을 뚫어 돌파하여 어느 정도 숨을 돌린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에게 악재가 터진다.

첫째는 외국으로 원정을 나간 로마의 정규 군단이 속속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스파르타쿠스가 시실리아로 탈출하려 한 레기움 항구에 이미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고 귀국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로마군단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둘째스파르타쿠스 군단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바로 스파르타쿠스의 명령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 군단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져 일부가 이탈했는데 크릭수스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로마군에게 섬멸 당했다.

퇴로가 막힌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후퇴하면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로마놈들과 대결하는 것만이 해답이다.’라며 반발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우면 결과는 뻔하다며 설득했지만 부하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