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몽, 중국에 크라수스 군단(1)

Que sais 2020. 12. 2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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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힘은 곧 군사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로마 군단의 위용을 의미한다. 로마는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에스파냐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제국을 확장했다. 이들 정복은 로마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했는데 로마군의 기본 체계는 약5,0006,000명으로 이루어진 군단이다. 로마 초기에는 이들 군단의 장병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만 모병했고 25개 군단이 기본이다. 이들 정규 병력은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된 125,000명이 주력인데 여기에 현지인 출신 보조병 125,000명이 합해 총 25만 명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군단의 숫자를 5,000명으로 한정할 수 없으므로 대체로 30여 만 명으로 산정한다.

로마군은 징병제가 아닌 직업군인을 뽑는 모병제도이지만 최소한 17세가 넘어야 했다. 복무연한20년에서 25 정도인데, 키는 160센티미터에서 180센티미터이지만 몸무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만기 전역시 퇴직금으로 13년 치 월급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난 액수이므로 로마군인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광대한 영토를 볼 때 30만 명은 작은 숫자이다. 근대와 비교하는 것이 다소 억지이기는 하지만 남북한의 군대를 모두 합하면 150여 만 명이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로마의 전성기 영토가 현 미국의 2/3이 될 정도였으므로 매우 적은 숫자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

 

크라수스의 스파르타쿠스군 6,000명을 처형한 아피아 도로(스파르타쿠스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제국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로마 군단의 신속한 기동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도로망 일명 아피아도로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의 국경까지 완벽한 직선 2차선이 연결되어 있고 약 1,500미터마다 거리 표지판이 있었다.

또한 병사를 위한 숙박시설과 보급소가 곳곳에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설사 로마에 반기를 들어도 반란을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방이 온통 로마 군단으로 덮여 있음을 발견하고 도망치는 것이 다반사이므로 큰 전투 없이 반란을 제압할 수 있었다.

로마 군인은 원칙적으로 결혼이 금지되었지만 로마와 먼 지역에 배치된 경우 현지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이를 인정받았다. 로마 병사와 원주민 여자와의 결혼은 예상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20년 정도를 군대에서 보낸 후 전역하여 고향에 가더라도 큰 재산이나 가족이 없는 경우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퇴직금으로 현지의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이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로마화를 선도하여 고대 유럽이 로마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로마인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문헌과 비석 등의 자료가 있으므로 이들 군단들이 어디에 주둔했고 어떤 병사들로 구성되었는지는 물론 그들이 치른 전투에 관해서도 알려져 있는 것이 많다. 특히 병사들의 생활양식, 식사, 장비와 무기들도 알려졌다.

어떤 군단은 400년 이상이나 존속했다. 이것은 로마가 명예와 전통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불명예, 불복종 또는 내전에 잘못 휘말린 경우 해체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퀸틸리우스 바루스 총독이 지휘하던 13, 18, 19군단은 기원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참패를 당한 후 이들 군단 번호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심지어는 중국에서 로마군단의 증거가 발견되는데 이는 스파르타쿠스를 제압하여 로마의 영웅이 된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과 연계된다.

 

<흉노군에 포함된 로마군>

로마의 3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으로 중국에서 로마군단이 발견된다는 설명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이는 크라쿠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그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귀갑형

기원전 57, 중국의 전한(前漢)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졌고 분리된 흉노 간에도 전쟁이 일어났다. 서흉노의 선우인 질지(郅支)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 산맥 너머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이르렀다.

이 서방이동 중에 질지정령, 호게, 견곤, 현재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던 강거, 대완(大宛)으로 불리는 페르가나, 대하(大夏) 등 서역제국을 공략하고 병합하여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한은 질지가 위치를 공고히 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원제(元帝) 건소(建昭) 3년인 기원전 36년에 한은 서역도호 감연수(甘延壽)와 서역 부도호 진탕(陳湯)으로 하여금 질지를 추격하도록 했다. 감연수는 1,600킬로미터에 걸치는 대장정을 거쳐 탈라스 강변에서 기습공격을 펼쳐 질지를 비롯하여 1,418인의 목을 베었고 포로 1,000여 명을 획득했다.

궁극적으로 진탕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몇 가지 실수를 범했는데 그것은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황제의 칙명을 위조한 것이다. 이런 경우 아무리 큰 전공을 세웠더라도 사형에 처하는 것이 기본인데 진탕은 자신의 전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 장의 그림과 지도로 만들어 황제에게 보냈다. 그의 자료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충분한 보답을 받아 처형은 면한다. 1세기 후 사관들이 전한서를 집필할 때 그가 보낸 자료를 중점적으로 사용했는데 여기에 매우 놀라운 글이 나타난다.

 

‘100명 이상의 기병이 성문을 드나들면서 성벽 아래서 말을 달렸다. 100명 이상의 보병들은 성문 양쪽에서 거북이물고기 비늘 대형을 이룬 채 전투훈련을 하고 있었다. 성벽 위의 적군 병사들은 어서 덤벼라라고 외치면서 중국 군대에 도전했다.’

 

이 기록에서 거북이대형이라는 것은 방패를 겹쳐서 사용하는 전술을 뜻한다.

 

 귀갑대형으로 공격하는 로마군

로마 군단 병사들의 방패인 스쿠타(Scuta)는 원통형으로 휘어진 타원형이다. 따라서 일렬로 연결시킬 경우 완벽한 임시방어 을 만들 수 있다. 로마군의 가장 유명한 방패전술테스투도라 부르는데 이 전술은 기원전 1세기 말에 완성되었고 이를 귀갑대형(龜甲隊形)이라고 한다. 귀갑대형은 방진(方陣)을 이룬 병사들이 양쪽 측면과 머리 위에 방패를 연결시켜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무기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으므로 로마의 장기로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는 관건이었다.

1940년대부터 중국에서의 로마인 행적을 연구한 옥스퍼드대학교의 호머 덥스 교수거북이라는 단어를 로마 군대와 연계시켰다.

 

보병들의 앞줄을 따라서 빈틈없이 연결된 로마의 스쿠타는 그러한 배열을 과거에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거북이 대형으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특히 방패 앞면의 둥근 모습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한 방패 대형을 달리 묘사하기는 어렵다.’

 

전한서는 중국군이 질지의 진영 앞에 도착했을 때 성문 앞에 이중 방어 목책이 설치되었다고 적었다. 로마 군단은 기본적으로 해자를 파고 끝을 날카롭게 깎은 방어 목책을 해자의 전면과 후면에 설치하는 방어법을 구사했다. 당대에 흉노는 이런 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덥스 교수는 흉노에 100명 이상의 로마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런 묘사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학자들은 로마군에 대한 내용이 후한서, 진서(晉書), 수서(隨書),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오량지(五凉志)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 기록에는 로마병(羅馬)이 중국에 귀속되었다라고 적혀있다. 대체 이들이 누구인가는 당대 로마를 삼분하고 있던 크라쿠스로 귀결된다.

 

<크라수스의 3두정치>

로마의 최초 3두 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다. 한마디로 로마의 명문 중 명문이다. 그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는데 로마의 동맹시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고 기원전87년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기간에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잃었다.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술라파를 숙청할 때 크라수스는 박해를 피해 히스파니아현 스페인으로 도망갔고 기원전 84년 아프리카에서 술라 편에 합세했다. 그런데 술라가 복권되어 로마로 다시 돌아올 때 크라수스는 술라와 함께 로마로 입성했는데 이때 크라쿠스가 로마의 성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알려진다.

로마로 복귀한 크라수스는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을 되찾았다. 특히 술라마리우스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가자 그의 재산 상당 부분을 자신 것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폼페이우스

그러나 크라수스가 로마의 가장 큰 부자이지만 상당한 군사적 업적을 쌓은 폼페이우스에는 못미친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에게 군사적 업적이 없었기 때문으로 이는 집정관 등 로마의 공직에 오르는데 큰 하자점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73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6세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원정 중이었고 폼페이우스마리우스파인 세르토리우스와의 전쟁으로 히스파니아에 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원로원의 안일한 대응으로 결국 2명의 집정관과 한 명의 전직집정관이 토벌군으로 나섰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모두 패했다. 이에 크라수스8개 로마 군단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때 마침 에스파니아에서 돌아와 스파르타쿠스 패잔병을 진압한 폼페이우스에게 명예는 빼앗긴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제압한 기원전 70, 폼페이우스와 크라쿠스는 연합하여 술라의 정책을 무효화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폼페이우스해적을 토벌에 나서 아시아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기원전 65크라수스감찰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엄청난 부를 이용하여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돈을 꾸어 주는 방식으로 우군으로 만들었다. 특히 기원전 62년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주어 눈도장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