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몽, 중국에 크라수스 군단(2)

Que sais 2020. 12. 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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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주도권 싸움으로 경쟁하자 크라수스가 이들을 중재하여 기원전 59년 세 사람은 제1차 삼두정치결성했다. 세 사람은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이익을 챙겼는데 기원전 55년 크라수스폼페이우스함께 두 번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특히 5년 간의 시리아 속주 총독직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크라수스에게 큰 기회였다.

이때 크라수스가 다소 욕심을 보인다. 기원전 55년 크라수스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되자 그동안 로마를 줄기차게 괴롭히던 파르티아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크라수스(좌),폼페이우스(중), 카이사르(우)

파르티아는 전성기 때 현재의 이란 지역은 물론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이라크, 터키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 만 해안지역, 베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방까지 관장할 정도의 제국이었다. 사실 파르티아는 당대 로마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두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길 원했고 그 방법은 파르티아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가 파르티와의 전쟁을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승리의 제물로만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다. 카르하에 전투에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고 크라수스의 아들과 크라수스도 사망했다. 40,000명 이상의 로마 정규군이 투입되었는데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병은 약 10,000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완패했다.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붙잡혀온 크라수스의 목황금을 녹여 부었다고 한다.

그동안 부단히 학자들이 궁금해 한 것은 크라수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이다. 그가 로마 사상 가장 큰 부자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부자가 된 연유에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에 대한 기록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우선 그가 술라의 오른팔이 된 후 숙청당한 반술라파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큰 재산을 벌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기본이라할 수 있으므로 크라쿠스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축재에 관한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그는 임대업이나 부동산 같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특히 전문 노예들로 이루어진 여러 단체를 만들어 전문 인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노예들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사업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방서 매수해, 불 끄는 것을 늦추는 사이 불에 탄 집을 싸게 사들인 후 리모델링해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또한 부실한 건물도 싼 값에 리모델링하여 판매했다는데 한마디로 현대의 솜씨좋은 건축업자이다.

그의 재산 축적과정을 보면 악착같이 재산을 모았다고 밖에 볼 수 없지만 상당부분 크라쿠스를 공격하기 위한 비방으로 추정한다. 로마 제일의 부자임에도 의외로 평소에는 소박한 음식을 먹었고 , 자기 사는 집 외에는 별장을 지은 적도 없다는 것을 보아도 그에 대한 비난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로마시대 최고의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대체 그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느냐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이 근래 제시되었다. 이에 의하면 크라수스의 재산은 약 17,040만 세스테리우스였다. 이는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정의 연간 예산인 2억 세스테리우스에 접하는 수준이다. 2008<포부스>지는 크라수스를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1,698억 달러로 8에 올렸다.

알려지기는 그가 스파르타쿠스가 반란군을 이끌고 시실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해적과 선박 운송을 계약했는데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보다 더 많은 돈을 해적에게 지불하겠다고 하여 취소시켰다고 한다. 크라쿠스에게 이 정도의 자금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로마의 공화정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기원전 1세기 경 로마의 동쪽에 있는 나라 중에서 가장 큰 위협 세력은 이란에 근거지를 둔 파르티아 제국이었다. 과거의 영광인 페르시아를 부흥시키겠다는 파르티아 제국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확대된 제국 중에 제국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로마는 당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1553)가 집정관이 되어 통치하는 제1차 삼두정치 기간이었는데 야심이 많았던 크라수스는 기원전 54파르티아 제국을 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원정 초반은 성공적이었다. 일곱 개의 로마 군단과 4,000기의 기병, 4,000명의 경무장 보병부대로 이루어진 42,000여 명의 로마군으로 기세좋게 진군했다.

그런데 크라수스스파르타쿠스를 제압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대적하는 상대는 역전의 용사로 구성된 파르티아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원정군이 파르티아에 고전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크라쿠스의 원정은 상당히 유리했다. 우선 파르티아로 진입하기 전 로마의 전통적 동맹국인 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타바제스 왕6,000명의 정예 기병대를 대동하고 크라수스 진영에 합류했다. 아르타바제스10,000만 명의 기병과 30,000명의 보병도 추가로 지원하되 모든 군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는 크라쿠스 군의 장병 수가 배가되는 것은 물론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데 첩경이었다.

 

전성기의 파르티아 제국

그런데 아르타바제스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크라수스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가로질러 파르티아로 진격해 달라는 전제조건이었다. 아르메니아를 거쳐 파르티아로 향하는 길은 산악지형이므로 파르티아 기병대의 장점인 기동력과 돌파력을 로마가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횡단할 경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주둔한 로마군과의 연결이 곤란해질 수가 있다는 이유로 아르타바제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로마군이 탁 트인 사막으로 진군하면 파르티아에게 참패할 수도 있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비쳤지만 크라수스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곧바로 진격하자 아르타바제스는 자신의 군을 데리고 회군했다.

크라수스제우그마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는데 도강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내리치면서 폭우가 쏟아져 강물이 급격히 불어나 휘하 장군이 물에 빠져 사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라수스의 대군은 무사히 도강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파르티아의 전초부대가 남긴 걸로 추정되는 무수한 말발굽 자국이 강가에 찍혀 있다는 보고를 듣고 파르티아인들이 그들을 피해 도망갔다고 단정했다. 한마디로 원정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반면에 참모인 카시우스는 파르티아의 대병력이 함정을 파고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며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서 셀레우키아로 안전하게 행군하자고 건의했다. 이길로 행군하면 물과 식량을 포함한 각종 군수물자의 보급이 용이하다는 것이다.

크라수스가 카시우스의 주장에 동조하자 파르티아에서 심어놓은 이중간첩인 파르티아 소속의 부족장인 아리암네스가 이를 반대했다. 그는 크라수스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탁 트인 평야지대를 통해 파르티아로 곧장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르티아의 왕 피로데스가 병력을 동원하기 전에 속도전으로 전쟁을 승리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크라수스가 손을 들어 준 것은 이중간첩 아리암네스의 건의이다. 그는 파르티아를 전격전으로 점령해야한다며 군대를  사막지대로 진입시켰다.

그런데 당장 마실 물도 없는 상황으로 되었는데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가 긴급 신호를 보내왔다. 르티아의 피로데스 왕이 군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가 자신을 공격해왔으니 이를 함께 퇴치한 후 파르티아를 공격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피로데스 왕이 아르메니아가 크라쿠스와의 연합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여 씨를 없애겠다는 의도다.

학자들은 이때 크라수스가 회군하여 아르메니아와 함께 피로데스를 공격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지형은 파르티아의 기병대에 불리했고 크라수스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막의 식수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파르티아의 수레나 장군

그런데 크라수스의 반응이 다소 놀랍다. 그는 아르타바스데스가 회군한 것은 동맹국인 로마를 배신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수스도 결국 아리암네스가 사라진 다음에야 자신이 파르티아가 파놓은 치명적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적정을 파악하려는 목적에서 파견한 수색대는 일부만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수색대의 보고는 그야말로 그를 놀랍게 했다. 한마디로 파르티아의 피로데스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티아의 사령관 수레나는 크라수스를 두 번이나 속였다. 첫째는 자신의 군사가 적에 보이도록 속였고 둘째는 그들의 무기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세계에 위용을 보인 로마 정통 군단에 대항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파르티아 기병들이 긴 머리를 이마 위로 모아 묶어 올렸다고 묘사하였다. 이는 초원지대에서 활약하며 고대사를 장식한 역전의 기마병 스키타이 양식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