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몽, 중국에 크라수스 군단(3)

Que sais 2020. 12. 2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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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수스의 궤멸>

기원전 535, 크라수스 파르티아와 카르하에(하란)에서 대치하였다.

파르티아의 병력은 크라수스에 못 미치지만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한 9,000여명의 기병이 있었다. 파르티안 기사법이란 말 위에서 뒤로 화살을 쏘는 것으로 흉노의 훈족이 유럽을 공격할 때 사용한 방법 그대로이다.

파르티아의 중무장 기병부대가 로마 군의 예비부대를 격파하고 기동력이 뛰어난 궁수기병들이 주력부대와 대치했다. 그런데 로마군은 당시까지만 해도 귀갑대형 전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 방패로 측면방어는 할 수 있었지만 머리 위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파르티아는 화살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려 로마 군의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지게 했다. 중요한 것은 화살 보급인데 파르티아는 낙타를 이용해 사수(射手)들에게 쉬지 않고 화살을 공급했다.

더구나 로마진영에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면 파르티아 기병들이 자욱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재빨리 접근하여 화살을 쏘았다. 한마디로 재빠른 승마기술로 치고 빠지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파르티아의 활과 화살은 이제껏 로마군이 겪어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말에서 배사구조로 쏜 화살은 로마군이 착용한 두꺼운 갑옷을 간단히 뚫었다. 한마디로 이런 상황에 접해본 적이 없는 로마군은 궤멸로 치달았다.

크라수스는 비장의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아들 푸블리우스에게 휘하 기병대의 대부분을 주며 전황을 타개하라고 지시했다. 크라수스의 아들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푸블리우스는 곧바로 파르티안 기병대에 돌격을 감행했지만 그는 화살에 부상당했다.

그의 분전에 부하들이 그를 둘러메고 낮은 언덕으로 후퇴해 사방을 방패로 둘러싸고 방진을 형성했다. 그러나 시간은 푸블리우스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막의 더위에 식수 등을 보급받지 못한 상태에서 파르티안의 화살에 대다수가 쓰러졌다.

화살에 맞아 심하게 다친 푸블리우스는 로마의 동맹도시로 전장 인근에 위치한 이크나이로 피신하자는 요청을 단연히 거절하고 죽은 부하들을 따라 장렬하게 옥쇄하는 운명을 선택했다. 그는 방패를 운반하는 자신의 수행원에게 옆구리를 보여주며 창으로 찌를 것을 지시했다.

전투가 끝나자 로마군의 생존자는 겨우 500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전원이 파르티아 측의 포로가 되었다. 파르티아푸블리우스의 시신을 찾아내 그의 목을 잘라 크라수스 진영으로 향했다.

크라수스는 이때까지도 푸블리우스에게 닥친 비극적 사태를 모른 상태였는데 지원병력을 요청하는 급보를 듣고 그는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급히 출격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갑자기 푸블리우스의 머리를 창끝에 꽂은 파르티아군이 나타났다.

그들의 화살에 수많은 로마군이 쓰러졌지만 어둠이 그들을 구했다. 크라수스는 간신히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카르라이로 철수했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장군인 수레나는 크라수스를 로마로 고이 돌려보낼 의사가 전혀 없었다그는 로마군 지휘부가 간밤에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고 크라수스의 행적을 추적하여 카르라이로 철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수레나는 곧바로 크라수스와 안면식이 있는 부하를 파견하여 파르티아가 협상을 요구한다는 제안을 제시토록 했는데 이는 수레나의 작전이었다. 한마디로 크라수스의 발을 묶어두는 용도다.

크라수스의 부하인 카시우스는 수레나의 협상 제의를 진담으로 생각하고 파르티아의 협상 제안을 수락하겠다는 답변을 크라수스를 대리해 수레나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수레나 부대는 성벽 밖에 도착해 있었다.

수레나는 자신의 왕국인 파르티아를 공격한 죄를 물어 크라수스와 카시우스가 스스로 족쇄를 차고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포위망이 촘촘하게 완성되기 전인 야밤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수레나에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붙잡혀온 크라수스의 목에 황금을 녹여 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크라쿠스 군단의 후예>

중국과 전혀 관련없이 보이는 로마군이 중국의 자료에서 발견되자 학자들이 이의 진상 규명에 착수했다. 우선 카르하에에서 생포된 10,000여 명의 로마군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추적하는 것이다.

로마의 기록에 의하면 파르티아의 왕인 피로데스포로들을 제국의 반대편 끝인 2,400킬로미터나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장거리 이동 중에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생존한 병사들은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지역인 마르지아나 성에서 용병부대로 정착했다고 설명한다.

호머 덥스 교수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그는 카르하에 전투가 끝나고 17년 뒤 로마 병사들이 서흉노의 선우 질지의 군대에 포함된 것이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귀갑대형으로 훈련하는 로마군

파르티아의 왕이 로마 병사들의 일부를 질지의 후원자소그디아나 왕에게 팔았을지도 모르며 또는 용감한 로마 병사들이 탈주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며 질지의 용병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경우야 어떻든 기원전 36년 질지의 부대에서 물고기비늘대형을 선보인 병사들은 실제로 로마 군단의 병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질지와의 전투가 끝났을 때 145명의 적군이 생포되었고 1,000명이 투항했는데 포로들은 원정에 지원군을 제공한 여러 연합국 왕들에게 노예로 분배되었다고 적혀있다. 이들 포로 중에 로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이유 없이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당대에 로마인들은 호기심의 대상인데다 가치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호머 덥스 박사는 로마인들은 다시 동쪽으로 더 멀리 끌려가 투르키스탄의 중국 측 여러 성에서 노예나 용병으로 활동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증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료를 조사하던 중 흉노에 소속돼있던 장병들이 거북이 대형을 유지했다는 것은 물론 두 겹의 기다란 나무 울타리로 방어태세를 취했다는 글도 발견했다. 두 겹의 울타리로마인들이 전투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방어전술 중에 하나이다.

덥스 박사는 당대의 자료를 검토하던 중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기원후 5년 경에 중국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때 중국 북서지역의 감숙(甘肅) 여러 도시 가운데 리첸(驪革干) 혹은 리칸이라는 도시에서도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첸이란 단어는 그리스-로마 세계를 뜻하는 중국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기원후 9왕망전한을 멸망시키고 이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모든 도시의 명칭을 현실에 맞게고치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에 따라 리첸지에루로 바꾸었는데 지에루포로들이 세운 또는 공격으로 생포된 포로들을 의미한다. 이 명칭을 근거로 덥스 박사는 이 도시가 로마 제국 출신 즉 로마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추정했다.

서흉노 질지의 군에서 거북이대형을 구사했던 병사들의 마지막 자취가 바로 이 도시라는 뜻이다. 즉 이들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정착한 크라수스 군 소속의 극소수 병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흥미있는 것은 이후 로마와 중국교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때부터 비로소 중국의 비단이 로마인들에게 소개되었다. 비단을 본 로마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베르길리우스비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레스인(중국)인들은 그들 나라에서 자라는 비단 나무 잎에서 긁어낸 섬세한 양털로 비단을 만들었다.’

 

뽕나무 잎을 잘 먹는 누에가 만드는 비단비단 나무에서 자라는 양털로 생각했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지만 당시 비단이 로마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

더욱 놀라운 것은 166년 중국에 로마의 사절이 도착했다는 기록이다. 이때는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161180)의 치세로 중국의 기록에 로마의 사절이 도착했는데 그들은 고작 상아와 코뿔소의 뿔과 귀갑을 선물로 바쳤다고 적었다.

중국은 이를 보고 탐탁치않게 생각하면서 보석류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멸시하듯이 기록했다. 이는 로마로서는 귀중한 것인지 모르지만 중국으로 보아서는 그다지 흥미를 보일만한 물품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중국에는 그런 물품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중국에 도착한 길은 북방 초원로가 아니라 바닷길이라는 점이다. 중국 측 기록에는 로마인들이 베트남 쪽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인도를 돌아 항해한 것으로 당대의 로마는 아무리 먼 거리도 구애하지 않고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덥스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덥스 교수와 같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글렌 더브릿지 교수는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귀갑형이란 말이 꼭 로마인의 거북대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에서 병사들이 완전히 밀착되어 있는 경우 거북대형이라고 적었다고 설명했다.

감숙성의 장태광 교수도 글렌 더브릿지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만약에 로마군이 파르티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를 모두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파르티아인들이 그들을 노예로 팔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전술을 그대로 활용하게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중국 로마촌 리첸 마을및기련산

그런데 현대의 과학은 로마군이 중국에 흡수되었다는 이런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해준다. 홍콩 <문회보>20055월 중국 간쑤(甘肅)성 영창(永昌)현의 한 마을에 사는 300여 명의 유럽인을 닮은 농민들이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왕국과의 전투 이후 행방이 끊어진 로마인의 후예임이 유전자 감식 조사 등을 통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호머 덥스 교수가 관심을 갖고 추적하여 유전자 분석으로 이어진 것이다.

중국 서북민족대학 관의권(關意權) 교수는 영창현 일대에서 유럽인의 체형 특징이 완연한 99개의 시신을 발굴했다. 이들 유골을 대상으로 DNA검사를 벌인 결과 이들이 로마 군단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발표했다.

 

영창시의 로마인동상

융창현 주민은 물론 중국 정부도 이들이 로마인들의 후예라는 것을 반겼다. 중국의 오지라고 볼 수 있는 이들 지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은 후한서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후한서에는 한나라 원제의 명령으로 서역 지방 개척에 나섰던 서역부도호 천탕(陳湯)이 기원전 36년 골칫거리이던 흉노를 대파시키면서 머리가 노랗고, 코가 우뚝한 이상한 모습의 병사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적혀있다.

 

융창현과 로마 10,000km(조선일보) 

천탕은 집단 부락을 만들어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이름을 리첸현이라고 붙였다는 것으로 이곳은 로마와 무려 10,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다. 리첸현 거주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의 포위망을 뚫은 뒤 서쪽 로마로 가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동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를 거쳐 흉노에 의탁해 용병 생활을 했던 로마의 후손들임이 판명된 것이다.

현재 영창시 입구에 이들을 의미하는 로마인들의 조각상이 있다.

 

중국 리첸에 로마인이 세운 로마식 신전

래채촌(來寨村)으로 불리는 마을은 남쪽으로 기련산, 서쪽으로 언지산과 접해있는데 마을 안에 길이 28미터, 2.8미터의 로마형 신전과 로마인의 후예들이 만들었다는 비각이 서있다. 이곳 주민의 얼굴은 중국인들과 비교해 피부 색깔이 붉고, 키가 크고, 코가 우뚝 솟았으며 갈색 머리인 전형적인 서양인 얼굴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동안 로마인들의 주체성을 갖고 자신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해 왔다고 설명한다.

융창현은 최근 <리첸연구회>와 로마군단 후예 전문 연구팀을 구성해 이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에 착수했다. 또한 매년 영창 시에서는 로마인들의 전투를 재현하는 퍼레이드를 벌리며 도시의 중심부도 로마식으로 바꾸고 있다고 알려진다. 로마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경위야 어떻든 로마인의 세계화가 또 다시 확인된 셈이다.

 

참고문헌 :

로마군단 후예들 중국에 산다, 송의달, 조선일보, 2005.03.25

파르티아의 칠면조 대사냥, 공희준, 서남투데이, 2020.08.17

로마군 최악의 날 카르헤 전투, 공희준, 서남투데이, 2020.08.25.

크라수스의 욕심이 로마의 비극을 부르다, 공희준, 서남투데이, 2020.08.28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위키백과

옛문명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 피터 제임스, 까치, 2003

고대세계의 70가지 미스터리, 브라이언 . 페이건, 오늘의책, 2003

환상박물관, 김장호, 개마고원, 2004

紗幮之路 深度之旅, 瓦蘭, 감천출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