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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6)

Que sais 2020. 12. 2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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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의 장렬한 전사>

로마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남부 이탈리아의 아플리아에서 크라수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좋은 말을 많이 얻을 것이고, 진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베었다. 한마디로 배수진을 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크라수스와 전투를 벌이지만 로마 체제로 8개 군단이면 4만 명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정통 로마군 역전의 용사들로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군사 전문가들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로마의 수석법무관이 될 정도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스파르타쿠스와 크라수스의 격돌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상대로 돌진하지만 크라수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손으로 두 명의 백인대장을 베어 쓰러뜨릴 정도로 분전했으나 결국 힘이 소멸되어 쓰러진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곧바로 노예군단의 종말로 막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가 로마 군단에 의해 완전히 궤멸되자 로마의 역사가들의 기록이 갑자기 자세해진다. 로마의 역사가 플로루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임페라토르(Imperator)처럼 싸우다 죽었다.’

 

임페라토르는 원래 장군이나 사령관을 의미했지만, 플로루스의 시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개 검투사가 황제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인데 다른 역사가들도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스파르타쿠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묘사한 기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파르타쿠스가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동료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스파르타쿠스가 자유의 투사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 가지 로마인들에게 아쉬운 것은 그가 로마 장군처럼 차별되는 갑옷을 입고 부하와 마찬가지의 복장으로 전투에 임했으므로 로마인들이 전투 후 전장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십자가형(영화 스파르타쿠스의 한장면)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십자가에 걸린 후 스파르타쿠스의 부인과 아들이 만나는데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비난받는 장면 중 하나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장에서 사망했으므로 십자가형에 처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재 감독인 스티븐 큐브릭과 천하의 시나리오 작가인 돌턴 트럼보의 합작품이기는 하지만 역사 왜곡이 너무 심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다.

 

<폼페이우스의 개선>

스파르타쿠스 군단의 본진이 궤멸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지만 대략 5,000명이 살아남아 도망쳤는데 이들이 불행하게도 폼페이우스와 만나 전멸한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마무리 지었다고 원로원에 서신을 보냈는데 원로원이 곧바로 이를 인정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기한다.

사실 원로원은 누가 스파르타쿠스를 격멸시킨 장군이냐로 골머리를 앓았다. 승전 장군이 두 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손을 들어준 것은 폼페이우스가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학자들은 원로원이 의도적으로 크라수스를 배제시켰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로원도 크라수스의 명예는 올려주었다.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하는데 크라수스의 공도 있으므로 개선식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 단계 아래인 오바티오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 제압에 큰 공을 세운 크라수스에게 로마의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한 것은 로마의 자존심과도 맛물려 있다고 추정한다. 즉 로마에서 개선식을 치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인데, 문제는 그가 승리한 스파르타쿠스가 당시 물건으로 간주하던 노예 검투사였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하면 물건에 지나지 않는 노예 검투사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개선식을 허락하면 오히려 스파르타쿠스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크라수스가 개선식을 벌린다면 역으로 스파르타쿠스가 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으로 노예 검투사에게 그런 영광을 준다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원로원은 타협했다. 크라수스의 공을 인정하여 오바티오 때 수여하는 금속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다.

이 사건은 크라수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의 한 장을 만들어준다. 즉 제1차 삼두정치에서 크라수스가 시저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크라수스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악몽, 크라수스 군단의 실종에서 별도로 설명한다.

여하튼 패배한 스파르타쿠스의 병사들 중 포로가 된 6,000명은 모두 로마에서 카프아까지 이르는 도로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다.

 

크라수스(좌), 폼페이우스(우)

스파르타쿠스에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찾지 못하고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고 포로들에게 묻자 하나 둘 벌떡 일어서서 내가 스파르타쿠스요!라고 한 목소리로 자신이 스파르타쿠스라고 외쳤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스탠리 큐브릭과 달톤 트럼보가 만들어낸 허구.

로마로서는 로마 정규군을 격파한 스파르타쿠스에 굴욕을 당했으므로 그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일단 벌어진 엄청난 사건을 로마인들이 잊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키케로나 시저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했고 초대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스파르타쿠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킨 지 거의 150여년 후인 79년에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 유적에서도 스파르타쿠스가 말을 타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낙서가 발견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사건 영향은 매우 컸다.

노예의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로마에 대한 반란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치닫는다. 노예가 된 사람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노예가 된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최절정기라 볼 수 있는 5현제 시대에도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로마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진압군을 효율적으로 파견하기 어렵게 되자 반란군에 반대하는 민족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아틸라에게 야만족의 통치를 일임하여 로마의 안정을 꾀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실책이 된 것은 물론이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채용된 게르만 인이나 현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인 용병들은 처음에 로마의 명령을 순순히 들었지만 차차 로마의 능력을 알게 되자 오히려 로마에게 비수를 들이대었고 결국 서로마는 476 게르만의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재해석>

장구한 로마의 역사를 볼 때 노예 반란은 스파르타쿠스가 유일한 것이 아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 전에도 시실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 거의 전역이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가 오랜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은 후대인들에게 눈에 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를 멸망시켜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로마를 상대로 봉기에 나서 막강한 정규군도 격파하는 저력은 여느 노예 반란과는 다르게 평가되었다. 특히 그와 대적한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하였다는 것을 볼 때 남다른 성품을 지녔음이 틀림없다.

스파르타쿠스의 행적을 면밀히 분석한 학자들은 그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생각한다. 사치품 구입을 금지하고 군수품을 비축하는 한편, 보초를 세우고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단순히 요행으로 로마 정규군을 격파한 것이 아니다.

이는 적어도 스파르타쿠스기본적인 병법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그는 대단히 지능적으로 여러 차례 로마군을 속이면서 승리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가장 발달된 군사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로마 정규군과 전투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파르타쿠스로마와 격돌할 때 사용한 전술은 로마로부터 나왔다고 추정하는 이유다. 이를 두고 스파르타쿠스가 단순한 노예 출신이 아니라 트라키아에 있을 때 로마군의 일원이었으리라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이런 군사 기술은 노예의 처지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스파르타쿠스가 본래는 고귀한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이 있다.

 

더불어 스파르타쿠스의 장병들은 초창기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군사 훈련은 커녕 부엌 식칼도 잡아본 적이 없는 초짜가 분명하다. 이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장병들로 당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로마 정규군을 여러 번 격파했다는 것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은 단순한 로마제국의 노예 해방을 외쳤다는 상징을 넘어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의 표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볼테르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후 미국 대통령이 되는 할리우드 배우 로널드 레이건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사람의 예로 스파르타쿠스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