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 제국의 굴욕 : 스파르타쿠스 반란(7)

Que sais 2020. 12. 2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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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에도 검투는 계속>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로마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결국 40년 후, 그동안 철저하게 견지하던 로마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제국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스파르타쿠스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고 말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공화국 후기애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한 실제적인 중요성보다 상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로마인들이 독재를 우려하며 제정을 극구 반대하였음에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계기로 질서를 외치며 기꺼이 독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스파르타쿠스의 상징적인 힘의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놀라운 것은 로마가 검투사의 반란으로 곤혹을 당했음에도 로마는 검투 경기를 폐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저의 경우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직접 겪었음에도 폐지는 커녕 보다 활성화하는데 주력했고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검투를 활용하면서 검투는 이후 수백년 간 활발하게 개최되었다. 그 해답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제정기에 들어 검투사들이 소소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대규모 반란은 아니었다. 이유는 검투사들의 출신 성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들어서기 전 공화정에서 검투사들은 대부분 전쟁포로 출신이었다. 이들에게는 로마에 패배하여 검투사로 활동하다는 것 자체가 억울하고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더불어 같은 포로 출신이 많았으므로 단결력도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 하층민이라도 로마인이라면 검투사를 자원하지 않고 대신 군인을 지원했다. 당시 군인의 생활이 고달프기는 하지만 명예가 있었다. 또한 로마가 각종 전투에서 소위 백전백승의 위용을 갖고 있으므로 군인의 복무기간이 만만치 않지만 검투사처럼 살해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가장 궁금한 것은 막강한 로마군인의 복무기간이 얼마이냐이다. 이는 로마의 근간이나 마찬가지인데 로마가 워낙 장기적으로 존속했으므로 로마군은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화정 시대 초기에 로마는 상비군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나면 시민을 징병하며 군대가 필요치 않으면 해산했다.

기원전 107마리우스 군제개혁 전까지 정규 병사의 복무 기간은 약 6이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로마군을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꾸어 군대가 시민의 의무가 아닌 직업이 되자 복무기간이 16으로 늘어났다. 그후 복무기간이 줄어들었다가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자 복무기간을 다시 16년으로 다시 되돌렸고 추후에 20년에서 25이 되었는데 전역후 군복무자에 대한 상당한 혜택이 있는데다 막강한 로마병은 패배를 모르므로 위험도 많지 않았다. 특히 로마의 정복 사업이 계속되었으므로 장병들에게 전리품을 확보할 기회도 많았다.

그런데 제정기로 들어서자 정복 사업이 줄어들고 전투라야 가난한 야만족인 게르만 족 등과 싸우므로 장병들은 봉급 외에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로마 장병으로의 명예만으로는 입대의 장점이 사라지자 돈과 인기라는 측면에서 검투사라는 직업은 하층민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후대로 갈수록 20% 정도의 검투사자유민이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면 검투사들이 꽁꽁 단결해야하는데 이들은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는 검투사로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다시 검투사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증빙한다. 자유 로마인들이 혹독한 검투사 양성소의 훈련 등을 감수하면서 검투사 대열에 합류한 이유다.

로마인들이 이들 자유인 검투사들을 선호한 것은 전쟁포로나 범죄자 출신의 검투사보다 자유민 출신 검투사의 싸움이 보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체격이 좋거나 근성이 보이는 전쟁포로들이 검투사로 발탁되지만 속박된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검투에서 열정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자유민 검투사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을 정확히 알고 있으므로 검투에 열성이었다. 로마 관중들이 이들의 싸움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볼 수 있다.

일부 성공한 검투사는 엄청난 신분 상승의 줄을 붙잡기도 했다검투사 출신의 아일리우스는 검투사로서의 특기를 살려 경기장의 주심으로 활동했고여러 도시에서 명예시민으로 위촉되었다. 검투장 양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거나 황제나 귀족들의 경호원이나 군인으로 변신하는 검투사들도 있었으므로 로마의 근간인 검투가 사라질 이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달튼 트럼보 이야기>

스파르타쿠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던 매카시즘의 중앙에서 미국을 들끓게 만든 장본이기도 한데 이에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달튼 트럼보(James Dalton Trumbo, 19051976)스파르타쿠스의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럼보가 천재적인 재주를 갖고 있지만 1947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그가 공산주의라는 이유로 영화 산업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핵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워너브러더스(Warner Bros.)에서 순탄하게 시나리오 작가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미국을 온통 회오리로 몰아간 매카시즘의 와중에서 트럼보는 미의회에서 9명의 동료와 함께 공산주의에 관련한 질문에 대해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이른바 할리우드 텐(10)으로 이후 1960년대 초까지 그들을 지목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어 미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매카시즘(McCarthyism)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말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반대하는 반대 캠페인이라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는데도 불랙리스트에 오르면 치명상을 받았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이와 같은 광풍이 일어난 것은 소비에트연방구소련의 간첩미국내에서의 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원래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이 발단이다.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나는 그 명단을 갖고 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광풍은 정적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근거없는 고발이 횡행했다는 점인데 바로 그 핵심에 정치에는 관련없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가 핵심으로 지목된 것이다.

달튼 트럼보190512, 콜로라도주 몬트 로즈에서 신발가게 점원의 아들로 태어나 가족이 인근 그랜드 정션(Grand Junction)으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지역 신문의 기자로 일하면서 글쓰기에 일찍부터 재주를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트럼보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계속 글쓰기를 했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자 빵집에서 일하면서 가사를 돌봤다. 그러면서도 거의 10년 동안 수많은 단편 소설과 소설을 썼지만 그 당시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의 책은 출간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1930년대 초부터 <선데이 이브닝 포스트>, <할리우드 스펙테터> 등에 기사를 게재하면서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34<스펙테터>의 편집장이 되었고 비로소 그의 첫 번째 소설 󰡔이클립스(Eclipse)󰡕를 출간한다. 또한 워너브러더스의 시나리오 부서에서 스크립트 리더로 일하기 시작하며 1935년에 본격적으로 스튜디오와 주니어 작가로 그의 복잡한 할리우드 경력을 시작한다.

1936년 트럼보는 범죄 드라마 로드 갱(Road Gang)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후 이후 10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인기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수많은 시나리오 중 어 맨 리멤버(A Man to Remember(1938), 1940년 로맨틱 드라마 키티 훠일(Kitty Foyle)로 첫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올랐다.

1939클레오 핀처(Cleo Fincher)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으며 그해 9월 반전 내용을 주로 한 󰡔조니가 총을 썼다(Johnny Got His Gun)󰡕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내셔널북어워드(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하면서 라디오, 무대 및 스크린에 계속 등장하여 유명세롤 높였는데 문제는 󰡔조니가 총을 썼다󰡕의 내용이 반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트럼보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과 함께 미국의 주류와는 다른 좌파의 정치적 입장을 취했는데 한 나치 동조자들로부터 지지 편지를 받아 그것을 FBI에 보고했다. 그런데 FBI는 편지 작성자를 추적하지 않고 트럼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이것이 그가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직접적인 요인이다.

 

로마의 휴일

1947년 미국 의회에서 매카시 선풍의 영향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10명 즉 트럼보를 포함한 할리우드 텐으로 지명된 할리우드 감독 및 작가를 선정하여 증언을 신청했는데 10모두 증언을 거부했다. 그들 모두 의회 모독죄유죄 판결을 받았고 트럼보는 1950년 약 1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했다.

트럼보가 석방되었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그는 가족을 멕시코시티로 옮겨 망명 아닌 망명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와의 끈은 놓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필명 또는 다른 작가의 이름을 사용하여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 때 그가 만든 것이 영화 사상 불후의 명작 중 하나로 알려진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이다. 이 영화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지 못했지만 로마의 휴일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57, 미국의 상황을 주시하던 트럼보는 할리우드로 돌아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가 로버트 리치라는 가명으로 쓴 브레이브 원(Brave One)역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단 몇 년 만에 두 번이나 아카데미 상을 받은 것이다.

이후 언론인들이 로버트 리치라는 작가를 찾을 수 없자 이들 영화의 시나리오는 실제로 트럼보가 썼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여하튼 로버트 리치가 브레이브 원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다음 해 트럼보는 이스라엘의 탄생을 그린 베스트셀러 소설 󰡔엑소더스󰡕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특히 1959커크 다글라스 주연의 스파르타쿠스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멘토라 할 수 있는 칼 마르크스스파르타쿠스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 부르며 극찬했다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이후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영은 스파르타쿠스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세운 독일의 극좌 혁명 단체의 이름스파르타쿠스단이었다.

바로 이 점이 영화 스파르타쿠스가 제작되었을 때 극심한 비판을 받은 이유다. 한마디로 스파르타쿠스공산주의자들의 영웅인데 이를 매카시즘이 한창인 미국에서 할리우드의 간판스타들을 동원한 블록버스터로 만든다는데 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트럼보

그 비난의 장본인이 매카시즘에 희생돼 고초를 겪었던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라는 점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트럼보커크 다글라스가 달톤 트럼보의 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매카시즘 압력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뚝심대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동안 절대 사용금지라는 트럼보 이름을 삽입하는데 이는 실화다. 이 영화에서 비로소 로버트 리치가 아니라 달튼 트럼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특히 당시에도 매카시즘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케네디 대통령스파르타쿠스를 관람한 후 극찬하여 매카시즘이 공적 분야에서 블랙리스트가 사라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트럼보미국 작가 길드에 재가입했으며 공로상도 받는다.

 

빠삐용

이후에도 그는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 중 브레이브(Brave 1962), 범죄 드라마 피 픽서(The Fixer 1968)골든글러브 후보로 올랐다. 특히 현재도 전세계적으로 시청자 호감도 순위에서 항상 5위 안에 든다고 알려지는 스티브 맥퀸 주연빠삐용(Papillon 1973)도 그의 손을 거쳤다.

평생 동안 담배를 많이 피운 트럼보는 1973폐암 진단을 받았고 19769,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과학 분야에 사용해달라고 기증했고 로마의 휴일가 개봉된 지 40년 후인 1993, 사후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511월 영화 트럼보가 개봉되었고 트럼보 역으로 나온 브라이언 크란스톤은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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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aw.egloos.com/v/3674930

https://www.biography.com/writer/dalton-trum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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