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1)

Que sais 2020. 12. 2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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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대해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가장 적절한 예로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속담을 든다. 로마는 고대 세계를 지배한 명실상부한 패자인데다 그 역사가 매우 길기 때문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 늑대가 키운 로물루스 형제에 의해 건립되어 395서로마로 나뉜 뒤 서로마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게 476년에 멸망하였고 동로마는 이보다 약 1000년을 더 지탱하다가 1493년에 투르크에게 멸망하였다.

사람들이 로마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로마의 세계지배가 수백 년 동안의 고난에 찬 전투의 결과로 이루어진데다가 그 실체(實體)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한 것은 기원후 2세기 초반인데 당시의 영토는 오늘날의 국명으로 말한다면 이탈리아는 물론 스위스프랑스독일스페인영국그리스러시아이집트이스라엘 등 무려 30여개 국가를 상회한다. 면적으로 볼 때 로마보다 더 큰 면적을 영토로 하였던 나라는 역사상 칭기스칸, 알렉산더와 아틸라가 있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러시아, 중국, 캐나다, 미국이 로마제국을 앞선다.

로마의 중요성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을 낀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을 포함한 오리엔트지방, 고대 문명의 꽃을 피운 그리스 땅이 포함되어 있는 등 그때까지의 거의 모든 문명문화국가들을 빠짐없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통치자들 중에서 가장 악명을 얻은 황제는 사가에 따라 다르지만 칼리굴라, 네로, 코모두스3명의 악당으로 거론한다.

로마의 수많은 지배자 즉 서로마의 경우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약 8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황제는 네로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로17세에 어머니의 활약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이와 같은 악명을 얻은 것은 그가 통치한 단 14년 동안에 자신의 어머니와 근친상간한 것은 물론 어머니와 처를 살해했으며 기이하고 방탕한 행동으로 로마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에서 대화재가 일어나자 방화의 책임기독교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이후 기독교인들로부터 악의 화신으로 불렸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편파적이고 악의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으로 서양에서는 로마의 네로 황제, 동양에선 진시황제를 꼽는다. 물론 진시황제는 근래 큰 틀에서 복권되었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

 

네로를 황제로 만든 아그리피나

네로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라는 긴 이름으로 3712안티움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 재위 5468).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과 똑같을 정도로 가문 대대로 세습해온 이름 중 하나이다. 그의 본가인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평민에서 시작된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가문으로 대대로 로마 집정관을 역임해 온 로마의 명문가였다.

네로를 이해하려면 그의 어지럽고 복잡한 가계를 설명해야 한다.

네로의 아버지는 로마의 정통 귀족인 이크나티우스였고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와 대()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딸로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재위 3741)의 여동생이다.

소아그리피나와 칼리굴라를 낳은 게르마니쿠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이며 제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조카인데다가 수려한 용모로 로마인들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로마군이 빼앗겼던 몇 개 부대의 독수리 깃발을 되찾아 온 승전 장군이기도하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가 동방의 속주를 시찰하던 중 시리아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대아그리피나가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의 남편을 독살한 장본인이라고 솔직하게 비난했는데, 이것이 파멸의 시초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대아그리피나가 남편 살해의 지령자로 자신을 지목하자 곧바로 반격했다. 우선 대아그리피나의 두 아들을 처형했고 대아그리피나도 감옥에서 굶겨 죽였다. 어린 칼리굴라도 체포되었지만 다행하게도 형 집행이 유예되어 할머니인 안토니아에게 보내졌다. 로마제국의 궁정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안토니아는 대아그리피나와는 달리 교묘한 처세술로 칼리굴라를 성장기까지 보호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손자인 칼리굴라를 자신의 왕궁으로 부른 것이다.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서 묵고 있던 티베리우스는 수많은 신하들을 살해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은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를 충실하게 보좌했다.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게 얼마나 호감을 샀는지 35년에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손자인 게멜루스와 공동 후계자로 명명되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워낙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칼리굴라이므로 게멜루스와 공동으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로마인들은 게밀루스보다 칼리굴라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티베리우스가 37년에 사망했을 때 제위는 적자인 게멜루스에게 돌아가지 않고 칼리굴라에게 넘겨졌다.

오빠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살해 위협을 느끼던 소아그리피나는 곧바로 칼리굴라에게 접근하여 그와 동침하면서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또 다른 동생인 드루실라에게 정을 주었고 그녀에게 관심이 멀어지자 드루실라의 남편인 레피두스의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소아그리피나가 추방된 후, 네로는 숙모인 도미타 레피다에게 보내져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레피다 역시 유명한 탕녀로 어린 네로에게 여색의 즐거움을 세세하게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소아그리피나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들이 연상인 숙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네로를 찾아오는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레피다를 깨끗하게 죽이는 것이다.

여하튼 41칼리굴라가 암살당한 후 작은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가 황제가 되자 소아그리피나는 로마로 돌아왔다.

소아그리피나는 로마로 돌아와 부호인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는 몇 년 후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남기고 사망하였다. 소아그리피나는 졸지에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다.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탕녀로 유명한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여자 검투사였다는 설도 있지만 여자 검투사는 일반적으로 네로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므로 그녀를 모함하기 위한 것으로도 추정하는데 여하튼 클라디우스는 메살리나를 강력히 옹호했다.

그녀가 황후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밤 뒷골목의 매춘가로 나가 남자들과 동침했다는 보고가 들어와도 그녀의 속성이 원래 탕녀였으므로 눈감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클라디우스는 메살리나를 비난한 원로원 의원 35명과 귀족급 300여명을 오히려 불경죄로 처형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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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살리나가 파멸을 맞은 것은 보다 더 큰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황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애인인 부유한 귀족 실리우스와 비밀리에 정식으로 결혼한 후 클라디우스를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한마디로 간통을 넘어서 중혼까지 저질렀는데 이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메살리나는 실리우스와 함께 처형되었다.

메살리나의 제거는 소아그리피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독신이 된 삼촌 클라디우스를 유혹하여 결국 그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근친혼이 성행했다지만 숙부와 조카 사이의 결혼은 다소 무리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소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적됐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혈통적으로 사실상 하나의 가문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법 상 금지되어 있었으나 황제에게 황후가 없다는 것은 황제가 집안 걱정을 떨쳐버리고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황제가 곧바로 결혼해야 하는데 그와 결혼할 적격자로서는 숙부와 조카사이기는 하지만 소아그리피나 밖에 없다고 원로원 내 결혼 찬성파들이 주장했다.

클라디우스는 그녀와 결혼하자마자 아우구스타의 칭호를 주었는데 이는 황제와 동격 또는 황후를 뜻하며 자동적으로 미성년이었던 네로도 어머니를 따라 황궁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소아그리피나도 방탕한 면에서는 메살리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해방노예 출신 재무장관 파라스를 공공연한 정부로 두고 그와 함께 원로원에도 참석하기도 하는 등 난행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만드는 일이었다. 소아그리피나는 보통 열여섯 살에 행하는 성년식을 1년 앞당겨 네로의 성년식을 올려 준 후 열세 살의 클라우디우스와 메살리나의 딸인 옥타비아와 결혼시켰다. 네로는 공식적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사위가 되었다.

이 결혼은 네로와 클라우디우스의 족보를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네로의 어머니인 소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조카딸이므로 원래 클라우디우스의 외손자이다. 그런데 소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으므로 그의 양아들이 되었고 클라우디우스의 딸인 옥타비아와 결혼했으므로 그의 사위이기도 했다.

소아그리피나의 작전은 집요하여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네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했다. 소아그리피나는 네로가 후계자로 선언되자 왕자로서 합당한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세네카를 불러들여 가정교사로 위촉했다. 당시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간통죄로 고발되어 8년간 코르시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처형된 메살리나가 낳은 브리타니쿠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네로보다 3살 어렸지만 브리타니쿠스도 네로와 함께 공동 상속자로 지명되었으므로 그가 성년이 되면 네로를 제치고 후계자가 될 위험도 있었다.

소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를 제거하는 것보다,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원했다. 클라디우스 황제를 빠른 시일 안에 처리 즉 살해하는 것이었다.

서기 54, 소아그리피나가 독살전문가 로쿠스타라는 여인을 시켜 버섯 요리에 독을 넣어 클라우디우스에게 주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독이 든 버섯을 먹었는데도 곧바로 죽지 않았다. 당시 황제들을 비롯하여 많은 고관들은 독살에 대비하여 평소에도 독약을 조금씩 먹었으므로 보통 사람들이 즉사할 양의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았다. 소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가 많은 양의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고 구토를 하자 의사를 시켜 구토를 돕는다는 구실로 오히려 황제의 입에 보다 치명적인 독을 넣도록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