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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3)

Que sais 2020. 12. 2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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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대가 다른 동서양의 악녀

여자의 행실에 대한 평가를 보면 동양과 서양에 대한 잣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여자들을 보면 근친상간 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메살리나의 경우는 자신이 황제의 공식 부인인데도 불구하고 변장한 후 창녀촌에서 남자들과 섹스하는데 열중했다. 그녀가 응징된 것은 음란해서가 아니라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를 황제에서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네로의 어머니인 소아그리피나는 권력도 쥐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정적들을 수시로 살해했고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도 살해했다. 음란성에 대해서 소아그리피나의 경우 메살리나에 못지않았고 아들인 네로와도 공개적으로 근친상간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크게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동양의 잘 알려진 악녀들에 대한 평가는 이들과는 달리 매우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우선 악녀의 이미지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실권자나 한 남편의 여자로서 국가를 포함하여 남편을 망하게 만들거나 수모의 구렁텅이로 몰아 간 유형이고 둘째는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한 후에 남자 못지않게 악행을 저지른 경우이다.

잘 알려진 첫째 유형으로는 상왕조 즉 은왕조를 멸망시킨 달기(妲己)를 꼽는다. 달기 자신은 악녀도 독부도 아닌 절세의 미인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미모에 혹한 주왕(紂王)의 폭행에 따라 대표적인 악녀로 화한 경우이다.

주왕유소씨의 나라를 공격했을 때 유소씨는 항복의 징표로 자신의 딸인 달기를 바쳤다. 주왕은 힘이 장사여서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용맹한 남자였다. 그런데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할 때부터 사치스럽다고 주왕의 숙부이자 현인으로 널리 알려진 기자로부터 공격받는다. 이 당시 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한다고 성토될 정도로 과거인들의 물질문명 즉 생활수준이 현대와 차이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여야 한다.

여하튼 주왕은 천하의 미인이라는 달기를 얻자 그녀를 위해 이궁(離宮)을 짓는 등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국고가 낭비되면서 부역과 무거운 세금이 올라가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주왕죄수들을 궁정 앞 광장의 나무에 오르게 한 후 밑에서 불을 지펴 산 채로 태워 죽이는 포락(炮烙)이란 형벌로 다스렸다. 나무에는 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미끄러져 떨어지면 불바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동안 나무는 불길로 뒤덮이고 죄수는 불에 타 죽는 것이다. 주왕은 달기를 껴안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즐겼다고 한다.

주왕에게는 제후 가운데 가장 인망이 있는 세 사람을 삼공(三公)에 임명했는데 이 때의 삼공은 서백(西伯)구후(九侯)악후(鄂侯)였다. 구후의 딸은 주왕의 비였는데 이 비가 음락을 별로 좋아하지 않자 주왕은 그녀가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죽였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온 몸이 난도질되어 소금에 절여졌다.

악후가 이를 알고 주왕에게 간곡한 충고를 했으나 주왕은 그를 죽이고 팔과 다리를 잘라 육포로 만들었다. 주왕의 아들비간도 아버지에게 비행을 지적하자 크게 성을 냈다.

 

성인의 창자 속에는 본래 일곱 개의 딴 구멍이 있다. 성인으로 위장하는 네 뱃속에도 일곱 개의 딴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봐야겠다.’

 

주왕은 아들 비간을 죽인 후 그 배를 갈라 내장을 모두 꺼내 보았다. 서백도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지만 주왕에게 보물과 미인을 상납하여 간신히 석방되었고 아들인 무왕(武王) ()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왕은 달기와 함께 불 속에 몸을 던지며 자살했고 천하는 무왕에게로 옮겨진다.

역사는 주왕이 달기 때문에 망한 것으로 전해주지만 위 내용을 보면 달기 자신은 악녀도 독부도 아니고 그저 미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녀가 주왕에게 간 것도 전쟁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를 좋아 한 포악한 주왕 탓에 동양의 악녀를 거론할 때에는 항상 나온다. 절세의 미인이라 알려진 양귀비도 같은 맥락으로 비난을 받는 여인 중에 한 명이다.

여태후(呂太后)두 번째 부류. 그녀는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둘째 부인으로 유방의 집으로 시집갈 때는 매우 가난하여 밭에 나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되자 그녀의 재주는 비범하여 우선 자신의 아들인 ()으로 하여금 첫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장남을 제치고 태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후 한조 창업의 최대 공신인 한신(韓信)을 모반했다는 명목으로 3족을 멸했고, 팽월(彭越) 역시 모반을 명목으로 3족을 멸했다. 그녀가 팽월에 대해 어찌나 원한을 갖고 있었는지 팽월의 살을 도려낸 후 소금에 절이게 하여 모든 제후들에게 나누어주었을 정도였다.

그녀가 유방의 충신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혈안이 된 것은 아들인 태자 영이 적자를 물리치고 고조 유방의 뒤를 이었을 때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태자 영이 유방의 뒤를 이어 혜제(惠帝)가 되었지만 실권은 그녀가 쥐고 있었다.

여후는 유방이 가장 총애하던 ()부인을 잡아 감옥에 가둔 후 죄수들이 그녀를 겁탈하게 하는 것은 물론 목구멍이 부어서 벙어리가 되는 약을 강제로 마시게 했고 귀 속에 유황을 넣어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또한 눈알을 도려내었고 손발을 자르게 한 후 몸통을 변소를 겸하고 있는 돼지우리에 넣고 아들인 혜제에게 인간 돼지를 구경하라고 시켰다.

건강이 좋지 않은 혜제가 일찍 죽자 여태후는 고조인 유방의 유씨 일족을 멸하고 여씨 일족만으로 집권하기 위해 살육을 계속했다. 만년이 되어 여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유씨를 대신하여 여씨가 모두 왕이나 제후가 되었지만 내가 죽으면 필시 그들이 변괴를 일으킬 것이다. 그들이 끼어 들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여씨 일족이 쥐고 있던 권력은 유씨 손으로 다시 넘어간다. 이런 면을 볼 때 여태후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악당으로 비난을 받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살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과거 위정자들이 사용한 보편적인 방법 중에 하나로 여자라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잔인한 면에서 동서양 구별이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양 여자들이 서양 여자들보다 더 비난을 받는다.

이와 같이 서양과 동양의 잣대가 다른 것은 우선 정보 부족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의 폭군이나 악녀에 대한 정보가 서양인에 비해 많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동양의 여자들이 서양에 비해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동양의 유교적인 사상 때문이다. 유교 사상에 의할 경우 여자의 지위는 남자에 의해 정해지는데 여자가 아름다워서든 악행으로서든 남편을 구렁텅이로 몰아가거나 파멸토록 만들었다면 극도로 비난받는 것이다.

반면에 서양인들의 사고로는 미인이기 때문에 남자가 잘못되었다면 여자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칭찬한다. 로마의 패권을 놓고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때 안토니우스를 파멸에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클레오파트라를 거론하지만 그녀를 악녀로 부르는 사람도 많은 반면, 사상 최고의 미인이라고 칭찬하는 경우가 더 많다.

미모로 로마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장점이면 장점이지 단점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근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는 클레오파트라가 절세의 미인은 아니었다고 추정한다.

여하튼 소아그리피나는 동양의 비난받는 두 여자 부류를 모두 합쳐 논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아그리피나에 대한 점수는 후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정황이 현재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삼촌과 결혼하고 아들을 유혹하여 근친상간을 하였음에도 오히려 그녀가 매력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이러한 잣대가 과연 타당한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로 생각된다.

 

네로는 로마의 축복

네로가 소아그리피나와 근친상간을 하고 결국 살해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로마인들로부터의 인기가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는 네로가 로마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로마에서 필요한 것은 볼거리와 오락이었다. 그러므로 네로는 호화로운 전차 경주와 검투를 자주 열었다. 네로 자신이 직접 전차 경주에도 참가했는데 선수들은 네로가 우승하도록 마차의 속도를 조정하여 그를 기쁘게 했다. 심지어 네로가 마차에서 떨어져 경기장에 나뒹구는 바람에 경기를 끝까지 마칠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은 네로의 우승을 선언했다. 네로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승리했을 것이 당연하므로 승리는 그의 것이라는 변이었다.

네로를 로마인들이 특히 좋아했던 것은 공연이 끝나고 네로가 경주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의전관들이 마차를 몰고 지나면서 물건들을 관중을 향해 뿌리는 이벤트를 자주 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뿌리는 물건들 중에는 각종 장신구와 고급 옷들이 포함되었고 두루마리 문서도 많았다. 두루마리 문서의 내용노예나 배 한 척과 교환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 덕분에 가난한 실업자들이 극장을 나설 때는 부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네로의 인기가 천장을 모를 정도로 치솟은 이유이기도 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네로는 극장에서 직접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일부 사람들은 네로의 시가 형편없다고 폭언하지만 네로가 지은 시를 면밀히 검토한 학자들은 그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유명한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는데 동의할 정도이다. 한마디로 상당한 예술적 자질을 갖고 있었다는 뜻인데 당대의 일부 지식층들은 로마 황제가 대중에 자주 나서는 것은 위엄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황제가 일반 백성들과 함께 출연한다는 데에 매력을 느꼈다.

네로는 예술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각 부분 콘테스트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집정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노래, 악기 연주, 창작, 웅변술 등의 기량을 겨루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의 전형적인 오락이자 세련된 예술로서 로마인들의 거친 기질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네로 축제라고도 불리는 이 행사는 5년마다 한 번씩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직접 일반 대중과 함께 콘테스트에 참가하려하자 황제가 창피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원로원 측에서 미리 황제에게 1등상을 제안했다. 그런데 네로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원로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른 경쟁자들과 똑같이 신청서를 제출하여 출연 순서를 정하는 제비를 뽑았다.

네로가 예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콘테스트는 2회만 개최되고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네로가 자기보다 더 예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네로가 로마의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가 남다르게 그리스를 비롯한 예술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네로의 통치>

학자들은 네로가 여러 가지 악행으로 결국 자살로 마감하지만 그의 초기 치세는 매우 탁월했다고 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에게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것은 그가 스스로 상당한 예술가로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는 어느 정도 증명된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기도 했는데 그가 황제이므로 봐주었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그가 이 부분에서 상당한 자신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적인 재능만 있다고 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을 냉철하게 판단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라는 직책을 주고 궁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다. 쿼바디스에 나오는 페트로니우스를 말하는데 한마디로 자신이 하는 일에 예리한 조언을 해달라는 것이다.

여하튼 예술가로 자처하는 네로에 학자들이 그에게 큰 점수를 주는 것은 네로 통치하의 로마가 상당히 잘 굴러갔기 때문이다. 사실 네로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제정이 성립된 지 거의 100여 년 후의 황제이므로 제국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가 국방 및 외교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서쪽으로 라인 방어선은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브리타니아는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지키면서 영토를 확장시켰고 동쪽으로는 코르불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코르불로는 그동안 계속 로마를 괴롭힌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성립시켰다.

페르시아 제국을 꿈꾸는 파르티아는 크라수스를 격파할 정도로 로마에 결코 굴하지 않고 로마에 맞서고 있었는데 특히 아르메니아의 관할 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격돌 중이었다. 이때 네로가 개입하여 볼로가세스 파르티아 왕의 이복동생인 티리다테스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려주었다.

이때 왕이 된 티리다테스는 네로에 감명받아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로마에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네로 황제가 국가반역죄다 어쩐다 한 모양인데 우리한테는 은인이니까 계속 축제 열어도 괜찮겠는가?’

 

이의 중요성은 그동안 로마의 고질적인 문제 즉 동방과의 외교 및 국방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하여 더 이상의 분쟁 요인을 사라지게 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 파르티아와 다시 전쟁을 하는 데 이때는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황제 때의 일로 트라야누스와의 전투는 파르티아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의 정책을 파기한 후 출정한 것이다. 협정을 깬 건 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