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4)

Que sais 2020. 12. 2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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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누명, 로마의 대화재>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그의 근친상간 등 비도덕적인 행동 및 정무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처리 방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센케이비치(18461916)19세기 말에 저술한 쿼바디스는 서기 647월에 일어났던 로마시의 대화재와 당시의 황제 네로에 대해 적나라하게 적었다. 이 책을 원전으로 한 영화 쿼바디스도 공전의 흥행에 성공하여 네로와 대화재 사건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켰다.

로마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대화재로 네로의 시크쿠스 막시무스 대경기장 안에 있는 노점에서 불이 일어나 삽시간에 상가지대를 모두 태워 버린 후 무려 일주일간이나 계속 타서 로마시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고 수많은 소사자(燒死者)와 이재민을 내었다. 당시 화재가 일어난 대경기장의 크기는 길이 약 610미터, 너비 약 183미터의 직사각형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는 서기 1세기 경 인구로 따지면 세계 최대의 거대한 도시로 무려 125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살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로마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도심지를 직각으로 관통하는 간선도로가 부족했다. 이와 같이 도로 체계 자체가 미비한데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서 몰려 든 인구 때문에 로마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데다가 좁은 길이 굽어져 있고 상수도 시설이 완벽하지 않은데다 조명으로 등유(燈油)를 쓰고 있었으므로 일단 불이 나기만 하면 순식간에 큰불이 되곤 했다.

서기 6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도 여러 차례 화재 사건이 일어나 7,000명으로 구성된 소방대가 창설될 정도였다. 티베리우스 황제시대에는 첼리우스 언덕 전체가 불에 타서 없어졌고 원형극장이 붕괴되면서 5만 명이 불에 타죽거나 질식사하기도 했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시대에도 대형 화재 사건이 있었다. 54클라우디우스는 대화재가 발생하자 자신이 직접 소방대장 역할을 맡아서 진화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 당시에도 마르티우스 광장 전체가 전소되었다.

그런데 네로 시대막시무스 경기장에서 시작된 불이 상상을 초래한 것은 로마의 14개 행정 구역 중 전혀 피해를 보지 않은 구역은 4개 행정구에 불과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완전히 잿더미로 변한 곳도 3개 구역이나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화재로 인하여 도시의 10분의 1 정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대화재로 로마가 초토화되자 그야말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다.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

당시에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지은 일리아드, 오디세이가 잘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는 트로이 전쟁으로 트로이가 불타는 장면이 있는데 네로 불타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로마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제금이라는 악기로 자신의 자작시 트로이의 붕괴 The fall of Troy를 읊었다고는 것으로도 비화된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네로가 노래와 춤추기를 좋아하고 이 부분에 특별한 재주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로는 화재가 시작되었을 때 로마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안티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네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와 대화재로 인한 수습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집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정원 시설인 마르티우스 광장과 개인 건물들을 개방하여 이재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또한 곡물 창고에 비축된 식량을 방출하면서 곡물 가격을 낮추었다. 추후 로마 대화재의 요인이 된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도 네로.

문제는 로마가 화재로 황폐화되자마자 네로가 새로운 로마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이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황금의 저택등이 들어가는 황금의 궁전짓겠다고 발표했는데 원로원들조차 이를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더욱 그러했다. 이런 대규모 건축 계획은 사전에 준비한 것이 틀림없으므로 네로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로마를 고의적으로 불태웠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특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타키투스(56120)의 추측을 근거로 네로의 방화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적었다. 그는 네로가 볼품없는 낡은 주택과 비좁은 골목길이 눈에 거슬린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다는 것을 단호히 부정한다.

자료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방화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잔인하게 박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네로가 명령하여 방화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도 서기 160년에서 220년 사이에 주로 기독교 박해 사건에 관한 저술을 남겼지만 네로를 방화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네로의 방화설은 처음부터 모순을 드러낸다.

가령 네로가 로마를 일부 후대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아름답게 재건하기 위해 불태울 계획을 세웠다면 자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막시무스 경기장과 자신이 거주하는 황제 궁전은 불태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는 상당히 많은 로마 미술품과 그리스 예술품을 궁전에 소장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궁전을 건설할 계획이라면 구궁전을 태워버리기에 앞서 그들 작품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로예술품을 확보하기 위해 다소 불법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공을 들여 수집한 미술품을 일부러 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고통치자로서 도시를 재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네로는 초토화된 로마의 재건에 힘을 썼고 특히 로마의 골목길이 좁아서 화재가 더욱 커졌다고 생각하자 주랑 건설비용을 모두 부담했다.

 

<기독교도의 처형>

문제는 네로의 화재 후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고의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네로는 희생양을 찾았다. 그런데 그가 희생양으로 지목한 사람들이 당시 급속도로 퍼지면서 로마인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이에는 어느 정도 네로에게도 빌미는 있었다. 로마가 불에 타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 속죄의 날이 왔다며 기뻐 날뛰며 방화를 조장하고 찬송가를 불렀다는 소문도 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은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짐승 같은 존재로 간주하여 더욱 증오했다.

네로는 재판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방화는 살인과 같은 행위이므로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들의 처형은 로마인들의 구미에도 맞는 일이었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기독교인들은 조롱을 당하면서 처형됐다. 일부는 원형경기장에서 짐승의 가죽을 덮어쓰고 개에게 물려 죽었고 투기에 나올 동물의 먹이가 되었다. 일부는 십자가에 묶인 채 맞아죽거나 어둠이 찾아온 뒤에 횃불을 밝히듯이 불쏘시개처럼 화형에 처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네로는 이와 같은 장관을 연출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 서커스 경기를 개최했고 자신도 전차경주 선수 복장으로 군중들 사이에 섞이거나 직접 전차를 몰았다.’

 

네로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설명으로 쿼바디스는 아예 이 내용을 소설의 주제로 등장시킨다.

그러나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왜냐면 네로 때 콜로세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수많은 영화나 자료에서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네로는 68년에 사망했고 콜로세움은 7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네로를 비난하는데 몰두한 타키투스(56120)는 이를 보다 각색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들이 더 무거운 죄를 지었다 해도, 처형 방식의 잔혹함은 그것을 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동정심으로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기독교도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화재가 일어난 후에 태어난 타키투스가 이 글을 쓴 시기는 기독교 박해가 네로 시절보다 훨씬 심각할 때였다. 로마의 열한 번 째 황제인 도미티우스(5196)는 기독교 신자였던 자신의 사촌을 처형하고 그 아내를 유배시켰다.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황제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로마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의 주범처럼 낙인찍힌 것은 네로에 의해 로마제국에서 저질러진 최초 공식적인 기독교도 박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때 주범으로 죽은 사람 중 한 명이 예수의 12제자인 베드로로 고문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으므로 십자가형이 아니라 참수형으로 죽었다.

여하튼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순교는 곧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네로 이후 300여 년 동안 희생된 기독교인들의 숫자에 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적게는 4,000명에서 많게는 1,100만 명에 이른다. 가장 적은 숫자를 제시한 사람은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였던 오리게네스인데 그는 249년에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순교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므로 헤아리기가 쉽다.’고 적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네로가 기독교 자체를 박해했다는 소문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네로 시대 때 기독교가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대화재로 인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도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방화범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처형했다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