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5)

Que sais 2020. 12. 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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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십자가형

베드로가 로마 시대에 처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당시 로마시민이었으므로 십자가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이는 십자가형이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처형 중에서 가장 혹독한 처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법에 규정된 형벌은 가혹했다. 반란죄나 대역죄 등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로마법전인 12동판법에도 방화범과 대역죄인에게는 이와 같은 처형을 내린다는 조항이 있었다.

기독교에 관한 영화나 소설을 보면 유달리 십자가에 의해 처형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십자가형은 기독교인을 처형하기 위해서 특별히 고안된 것은 아니다. 발명에 재주가 많은 로마인들은 희생자들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할 때 가장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십자가형반역자, 범죄자, 노예, 검투사 등에게만 적용되었으며, 로마의 시민이라는 것만 입증되면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짓더라도 십자가형은 면제해 주었다. 사형수국부(局部)만 가리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발가벗긴 채로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한다.

초기의 십자가형은 단지 수직으로 세워진 말뚝에 사형수를 묶어두고 목이 마르거나 굶어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 후에 로마인들은 여러 가지의 십자가 처형 방법을 고안했다. Y형 십자가, X형 십자가, T형 십자가. 현대 미식 축구 골대 모양으로 사형수의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매달아 놓는 네 번째 방법도 있었으나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십자가의 모양이 어느 것으로 결정되든 처형되기까지의 방법은 거의 같았다.

판결이 언도되면 죄수의 목 부분에 가로대가 놓인다. 양 팔를 뻗쳐 가로대에 단단하게 묶인 채 형장으로 끌려간다. 이따금 사형수에게 채찍질을 한 뒤 고통을 증가시키기 위해 피부 속으로 작은 뼈 조각들을 찔러 넣었다. 그 후 사형수는 사형장에 세워진 기다란 말뚝 위에 그대로 올려진 후 죽을 때까지 그대로 방치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의 처형이다. 예수의 경우 자신이 처형될 십자가를 운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학자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불길의 나무즉 하나의 기둥을 짊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가 두 명의 도둑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로마인이 생각할 때 예수가 도둑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죽은 뒤에 곧바로 나무 기둥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바로 장사 지낼 수 없도록 하루 이상 감시했다. 이것은 죽은 자가 장사를 제대로 지내 죽은 뒤에 천국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사후 세계가 현생보다도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했던 로마 시대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한 형벌은 없었다.

십자가에 못으로 박히는 경우는 보다 큰 중죄인에 한했다.

손바닥은 뼈가 얇아서 쉽게 찢겨져 나갈 수 있으므로 손바닥에 박지 않고 손목 관절부에 박았다. 그 다음에는 발을 지지대라는 명칭의 나무 블록에 못으로 박아 몸무게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리스어의 성경에는 예수가 쉐이르 형태로 처형되었다고 했는데 쉐이르못이 박혔던 부분을 뜻하며 이것은 손뿐만 아니라 손목, 팔목을 모두 포함한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사형수들이 빨리 죽도록 자비를 베풀 경우 창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형수들은 고통을 겪으며 23일 동안이나 살아 있을 수 있었는데 로마인들은 특히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주는 의미에서 이 방법을 선호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크라수스가 포로가 된 6,000여 명을 노예로 팔지 않고 모두 십자가형에 처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런데 이런 처형은 크라수스만 가능한 처형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래 포로들은 노예로 상당한 값을 받고 팔 수 있으므로 크라수스의 경우 6,000명 포로라면 그가 지출한 많은 경비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포로 모두 처형한 것으 크라수스가 당대 최고의 부자인데다 반란에 대한 응징을 로마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로 추정한다.

신학자 브란덴부르크는 십자가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사형수는 팔을 벌리고, 어깨 위에 메고 있던 가로대에 붙들어 매인다. 못질에 대한 증언은 확실하지 않다. 위쪽에 가로대를 메고 십자가의 수직 기둥에 매달린 인간은 아마도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채 질식해 죽어갔을 것이며, 죽음은 극심한 고통 뒤에야 서서히 찾아왔을 것이다.’

 

1968년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근교 스코푸스 산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것은 1세기 전반에 십자가형에 처해진 20대 남성의 유골로 이를 연구한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종래 십자가형은 양손이나 팔뚝에 못을 쳐 박고, 양발은 포개서 한 개의 못으로 고정시키거나 나란히 늘어뜨려 고정시켰다고 믿어왔으나 유골의 흔적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자의 양쪽 발뒤꿈치11.5센티미터의 길고 굵은 쇠못이 박혀 있었다.

사자는 양쪽 무릎을 잔뜩 굽혀 샅 쪽으로 비틀어 올리고 한쪽 무릎이 다른 한쪽 무릎에 포개져 있었다. 남자의 궁둥이에는 받침세딜레가 있었다. 팔뚝의 못질에 대해서도 좀더 자세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데 팔뚝의 못질은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것과 달랐다. 못을 손바닥에 박은 것이 아니라 팔꿈치와 요골 사이의 팔뚝에 박았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어느 정도로 괴로운가에 대해서는 의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못질로 생긴 고통은 엄청나다. 팔뚝의 상처는 강하게 당기는데 세딜레에 몸이 받쳐지면 그 힘이 얼마간 덜어진다. 그러나 이때에도 근육의 긴장이 요구된다. 팔을 옆으로 들어올린 채 움직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수반한 울혈, 근육 경력, 심장의 과로가 온다. 오랫동안 죽음은 질식에서 비롯되었으리라고 생각해 왔으나 최근에는 죽음이 혈행 장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에게 물을 주면 고통은 더 길어지고 종아리를 구부리면 고통은 단축된다.’

 

십자가형을 받을 경우 사망요인은 대부분 혈행 장애에 의한다.

신체를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매달려 있으면 피가 하반신에 몰린다. 그러면 뇌 속의 피가 결핍되어 심근 경련에 따른 호흡 곤란, 심장 세동(細動), 그리고 실신한다. 따라서 팔만 고정되고 다른 부분은 매달려 있는 경우에는 일찍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죄수의 발이 통나무로 받쳐지거나 다리가 굽혀진 채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으면 죽음은 늦게 찾아오며 그럴수록 사형수의 고통은 오래 간다. 십자가형을 가중시키는 방법으로 때로는 돌로 치기, 또는 화형이 겸해졌다.

 

<피소 사건>

네로가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있었음에도 몰락을 재초한 것은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측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선 네로가 로마인들로부터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로마의 현인 세네카가 적시적소에 충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로가 장성하자 네로는 점점 그의 잔소리에도 싫증내기 시작한 후 세네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세네카가 황제의 비호아래 개인적으로 재산을 착복했다는 고발이 들어가자 네로는 세네카의 은퇴를 허락했다.

세네카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은둔 생활에 들어간 것도 네로에게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네로를 성장하게 만들어 준 세네카를 헌신짝같이 차버린 사건은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시지가 되었다. 언제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귀족들이 자구책으로 원로원 의원, 근위군 장교 등과 손을 잡고 네로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네로도 신하들이 반역을 꿈꿀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보원을 곳곳에 심었는데 마침 함대사령관인 프로쿨루스가 네로에게 자신을 포섭하여 네로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고발했다. 놀랍게도 프로쿨루스를 포섭하려던 해방 여자 노예 에피카리스는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을 불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음모자들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자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처형되었다. 네로가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인 것이다.

네로의 칼날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자 네로 암살단654월의 세레리아 축제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곡물의 여신 세레스에게 감사하는 날로 음악, 퍼레이드, 종합 경기 등을 함께 벌리는데 네로를 축출하고 당대의 저명한 원로의원인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옹립하자는 것이다.

네로의 축출 계획은 전날까지도 보안이 잘 되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로 음모 사건이 발각된다. 플라비우스 스카에비누스가 통상적인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면서 한 일이 의심스럽다며 제보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피소 사건이라 부른다.

스카에비누스유서를 작성한 다음 노예를 불러 단도를 갈게 하는 것은 물론 창을 불에 단련시키라고 지시하고, 아끼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나머지 노예들에게는 돈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혈제를 준비해두라고 명령했다.

노예 밀리쿠스는 모든 정황으로 보아 주인이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주인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에 실패한다면 자신들도 모두 연루되어 처형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털어놓았고 아내와 함께 다음날 아침 황제를 찾아가 음모가 있다고 밀고했다.

네로는 밀리쿠스가 네로를 향한 암살음모라면서 날카로운 단검을 증거로 가지고 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여러 가지 비이상적인 행동을 했지만 수많은 검투 이벤트를 주최했고 올림픽도 개최하여 로마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신이 적어도 칼리굴라처럼 암살당하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카이비누스를 즉시 체포해 심문케했다.

결론은 고문에 의해 스카이비누스는 진실이든 아니든 심문자가 원하는대로 답변했다. 그는 자신의 동료자로 중년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네로의 스승 세네카, 시인 루카누스, 풍자작가 페트로니우스는 물론 수많은 원로원 지도급 의원, 근위대장으로 있던 루푸스까지 연루됐다고 이름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로마에서 이름있는 명사나 유력자들이 죄다 피소음모라는 대형 국가반역죄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