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6)

Que sais 2020. 12. 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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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죽음>

반역자에 대한 결말은 추호의 용서도 없는 무자비한 처형이지만 네로를 처단한 후 황제로 내정되었다고 의심받은 피소는 체포되기 전에 자결하여 비참하게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대형 사건에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확실히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스토아 철학자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파이투스 트라세아 등이 억울하게 희생된 유명인사들도 있어 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타키투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렇게 수많은 명사들을 참살한 뒤에, 마침내 네로는 미덕 그 자체도 근절시키려고 했다.’

 

네로는 피소 음모 사건으로 로마에 긴급 사태와 군법을 선포하고 근위대 장교, 원로원 의원 등 19명을 사형, 13명을 추방한 뒤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특히 62년 갈리아에서 추방생활 중인 파우스투스 술라를 처형한 후 4년 뒤 피소 음모 사건과 엮이면서 마지막 남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직계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도 처형하여 아우구스투스 일가를 완전히 멸문시킨다.

네로의 스승으로 명망이 높은 세네카의 경우는 다소 자비로운 혜택이 주어졌는데 자택에서 체포되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맥을 끊고 자살하는 방식으로 죽었다. 세네카는 담담하게 자택에서 아내와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스스로 나이프로 팔목 혈관을 자른 다음 증기욕탕에 들어가 최후를 마쳤다고 알려진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인데 세네카는 로마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므로 좀 더 설명한다. 그에 따라다니는 직함은 여러 가지로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특히 대표적인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네로 황제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네카가 유명한 것은 로마인으로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작가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고전 라틴어의 표준으로 여겨져서 중세시대 고전 라틴어 교과서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공자논어동양 고전의 표준이듯 세네카의 수상집과 서간집이 서양의 라틴어 문화권의 고전으로 간주된다.

세네카의 아버지는 히스파니아 코르도바 지방의 지방관으로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3대 황제를 보좌했을 정도로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히스파니아를 떠나 로마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정치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는데 젊을 때 심한 천식으로 이집트에도 체류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왔는데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세네카수사학적 웅변 실력이 뛰어났고, 정치적 야심이 상당했으므로 젊은 황제가 야심가였던 세네카를 미워하여 세네카의 비리 등을 이유로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머리가 비상한 세네카는 천식으로 몸이 허약해 비쩍 말라,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변론하여 칼리굴라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욕을 먹을 일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세네카가 유난히 부유하고 총명하지만 그가 고리대금업 등에 손을 대므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세네카와 황제의 조카 율리아 리빌라 공주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발됐다. 이때도 클라우디우스가 그에게 비리는 있지만 작가적 능력을 인정하여 사형 판결 대신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세네카는 코르시카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 메사리나가 죽고 소아그리피나가 황제의 황비가 되자 로마로 돌아왔고 50년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이때 네로를 황제로 올리려는 소아그리피나와 밀착하여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사하고, 네로가 황제가 되자 세네카의 연설문으로 로마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특히 그는 히스파니아 출신으로 로마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네로의 신임 아래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런데 로마의 브리타니아 원정 전쟁 후, 이 일대의 노예 무역, 고리대금업 등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어, 부디카 여왕로마에 반란사건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세네카가 여러 면에서 자질이 있지만 금전적인 면에서는 남다른 비난받을 일을 계속하여 네로의 측근들이 그를 항상 감시했다. 특히 네로의 평소 행실과 그의 직계존비속 살해를 봤기 때문에 나이와 건강 등을 이유로 은퇴를 요청했고 이를 허락받았지만 결국 65년 네로 살해 음모 죄목으로 고발되어 네로로부터 자살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세네카에 따라다니는 것은 그가 스토아 철학자임에도 엄청난 부를 모았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그의 자신이 무려 3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제정 전 최고의 부자로 알려진 크라수스17,040만 세스테리우스를 훨씬 상회한다. 크라수스와 년대적으로 약 100년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그가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이 자신의 측근이라는 것에 놀란 네로는 이후 아무도 믿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반란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점점 광적으로 변해갔다. 네로는 자신의 불안감을 섹스로 벗어나려고 했다.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짐승과 수간(獸姦)을 하는 것은 물론 나무로 만든 페니스를 달고 여자들과 섹스를 했다.

네로는 점점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자주 내었다. 마침 전차 경주에 참여하고 돌아온 네로에게 황후인 포파에아가 잔소리를 하자 발로 찼는데 임신 중이던 그녀가 유산 후 사망했다. 당시로서는 배속에 있는 아이가 죽으면 산모도 살아날 길이 없었다.

돌발적인 살인에 네로는 무척이나 후회했다. 그가 포파에아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황제가 로마의 관습과 달리 아내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자신의 가족 묘지에 안치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장례식을 치루면서 황제가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고, 아내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신이 보내준 아이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발적으로 포파에아를 죽인 후, 그는 포파에아와 닮은 소년인 스포루스를 찾아내 거세한 후 여자 옷을 입혀 죽은 황후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했다. 추후에는 신부용 빨간 면사포를 씌워주고 결혼식을 올렸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두 사람은 정상적인 부부처럼 살았고 군중들 앞에서 다정한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로마의 대화재와 피소 사건을 경험하여 자신의 주위가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66년 가을 또 다시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다. 네로는 첫 순회 공연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 등을 여행하며 가수이자 배우, 전차경기 기수로 활동했다.

알려지기는 이때 네로는 1,808개의 상과 우승 트로피를 독식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환영회와 호평에 매우 흡족해 하면서 67년 그리스인들의 염원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부터 그리스를 해방시켜 주었다.

그런데 네로는 유대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로 소환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코르불로에게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을 명했다.

문제는 당시 코르불로가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코르불로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분개하여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는 등 우환이 계속 따랐다.

이때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당한 골족 즉 현 프랑스에서 카이셀리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타키투스빈덱스의 탄핵 발언을 적은 반란의 변은 명쾌하다.

 

우리는 황제에게 반항해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네로는 로마 국을 약탈했다. 원로원의 꽃이라는 꽃은 죄다 뽑아 버렸다. 그는 방탕으로 신세를 망쳤고, 어머니를 죽인데다 군주같지도 않다. (중략) 대체 누가 이런 네로를 황제라 부르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저항하며 일어설 때다. 여러분 스스로를 구하는 것이 로마인을 구하는 것이요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는 폭군 네로에 대항하여 제국 군대가 봉기할 것을 요구하며 세르비우스 술피시우스 갈바로마의 6대 황제(재위 6869)가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루시타니아 오늘날 포르투갈의 총독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도 반란에 가담시켰다.

갈바72세가 된 노인이었지만 네로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법무관, 아퀴타니아 속주 총독, 집정관, 게르마니아 부사령관, 아프리카 총독 등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로 제국을 경영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알려져 네로의 후계자로는 적임자로 적정하다는 평가였다.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갈바 장군을 뜻한다.

네로의 대응도 재빨랐다. 네로는 곧바로 갈바제국의 적으로 선포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에스파냐에 있던 갈바는 네로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네로는 게르마니아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루푸스빈덱스와 결전을 벌여 반란군을 격파했고, 루푸스에게 패배한 빈덱스는 패전 후 자결지만 그가 일으킨 반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문제는 빈덱스가 제거되었음에도 로마군이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네로에게 충성하지 않고 루푸스에게 네로를 탄핵하고 황제로 등극하라고 요청했다. 루푸스는 이를 거절했지만 당대의 제국을 지탱하던 로마군의 이탈은 네로에게 치명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빈덱스로부터 황제로 옹립받은 갈바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에게 어떤 선택을 할 지 압박했다. 그리고 갈바는 자신의 대리인들을 로마 근위대에게 자신을 지지하면 병사 1인당 8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대에 그만한 자금이 있느냐 없느냐는 차치하고라도 이 제안은 로마군으로 하여금 완전히 갈바로 돌아서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