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네로황제의 복권(7)

Que sais 2020. 12. 2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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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의 몰락>

로마가 뒤숭숭할 때 마침 극심한 식량 부족 상태가 일어나자 로마인들도 네로에게 멀리하기 시작했다.

네로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안전한 곳에 피해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네로는 자신이 노예일 때 자유를 준 파온 별장으로 피신한 후 이집트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는 해방 노예들을 오스티아 항에 파견하여 탈출 준비를 지시했다.

그런데 로마에서 네로가 달아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평소에 네로에 반기를 들던 원로원이 재빨리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원로원이 네로국가의 적으로 선언해 갈바황제로 추대하기로 한 것이다. 네로의 근위대장님피디우스 사비누스도 갈바의 손을 들어주었고 네로가 믿고 있던 충복 티켈리누스도 도망쳤다.

최후의 수단으로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에서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을 변호하는 연설을 하려 했다. 그런데 로마 시민들은 원로원에서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는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는 보고를 받았다. 네로는 귀족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어도 일반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네로가 이와 같이 생각한 것은 네로가 탄압하고 숙청한 대상이 주로 귀족과 상류층과 기독교인이므로 그의 영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던 로마 민중들은 네로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 민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것은 노예법정에서 주인에게 항의할 수 있도록 법도 제정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노예숫자를 생각하면 네로의 이런 조치는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는 수많은 경기장에서 검투를 주재하여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마디로 로마인들을 위해 수많은 검투는 물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우리고 백성들을 위해 일을 했으므로 적어도 백성들이 등을 돌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룸에서의 연설도 실행되지 못했다. 포룸으로 가는 도중 어떤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때는 이미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후로 네로를 찾기 위한 수색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자신의 은신처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황제는 흔히 행해지는 방식대로 처형당한다는 것이었다. 네로처형 방법을 묻자 하인이 대답했다.

 

죄인을 발가벗겨서 형틀에 목을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네로는 최후가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 후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찔렀다. 그가 묘지에 묻히는 것을 본 사람은 그를 끝까지 따랐던 두 명의 유모뿐이었다. 네로는 칼로 자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 같은 예술가가 죽다니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군.’

 

네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놀랍게도 네로에 대한 추모가 봇물을 이었다. 네로가 검투와 올림픽 등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황제로 기억되는데다 그에 대한 시민들과 하층민들의 원한이 그리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로가 백성들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한 것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그가 죽은 뒤 그 시체를 테베레 강에 던지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기본 장례법화장 이후 영묘에 묻히지도 못했다.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추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시각이 다른 악당

네로가 로마를 대표하는 악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악당이라는 단어에 만만치 않은 걸림돌이 있음은 물론이다. 악랄한 면이나 잔인한 면만 생각하면 그가 로마황제 중 절대 악당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원로원의 글로도 알 수 있다.

 

코모두스는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로마 제국의 원로원이 19212, 코모두스의 암살 소식을 듣고 언급한 말이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로마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이런 발표를 한 것을 보면 코모두스의 악행도미티아누스와 네로를 능가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근래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알려진다.

우선 원로원으로부터 그야말로 욕을 얻어먹은 로마 제국의 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복권이다. 그는 두 번째 세습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데 네로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처음 박해한 황제로 유명하다. 또한 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노골적인 공포정치로 정국을 운영하여 원로원을 비롯해 역사학자 타키투스수에토니우스 등 은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황제로 거명했다. 따라서 사후 로마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에는 폭군 중 폭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원로원, 지식인 등 로마 상류층의 평가와는 달리 당대 기사계급, 일반민중, 군대에게는 지지를 받은 황제라고 평가한다. 또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와 행정적, 국방적 성과를 볼 때 잔인하고 악랄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벗고 행정가로 상당히 뛰어난 황제로 재평가받고 있다. 한마디로 고대의 전설을 그대로 믿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면을 감안하더라도 로마의 황제들은 아시리아인들의 악행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라고 볼 수 있다.

다소 년대가 올라가지만 기원전 11세기에 아시리아에 걸출한 영웅인 티글라트 필레세르 1가 세계 문명사에 잘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잔혹한 유혈 정책 때문이다. 아시리아라면 공포와 고통을 주는 야만성으로 대표되는데 그 원조가 바로 필레세르 1. 그의 비문 속에는 피비린내 나는 냄새가 넘쳐나는데 그가 니네베의 북쪽에 있던 아나톨리아 인과 동맹군에 대한 승리를 적은 대목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2만 명의 병사 및 그들의 5명의 왕과 싸워 크게 물리쳤다. 나는 그들의 끈적끈적한 피를 골짜기의 산봉우리에 흘리게 했다. 그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도시 주변에 그 목들을 마치 곡물의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나는 그들의 도시를 불사르고 파괴하고 무()로 돌아가게 했다.’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 2(기원전 883859)도 잔인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이다. 그것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면서 적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산의 모든 봉우리를 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험준한 산중에서, 나는 그들을 죽이고 피로 산을 붉게 만들었다. 시체가 모든 산의 골짜기와 절벽을 덮었는데 나는 병사들의 목을 자르고, 그것을 쌓아올려, 기둥을 만들었다. 젊은이도 처녀들도 불 속으로 던졌다.

나는 도시의 문을 향하여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중요한 사람들 모두의 가죽을 모조리 벗겨, 그 가죽으로 기둥을 감았다. 또 어떤 자는 기둥 속에 넣어 버렸으며 어떤 자는 말뚝에 꽂아 기둥 위에 세우고, 어떤 자는 기둥 주위의 말뚝에 결박했다. 나의 영토내의 수많은 자의 가죽을 벗겨 그것을 벽에 바르기도 했으며 반역한 관리들, 궁정의 신하들의 수족을 잘랐다. 그들 중에 많은 젊은이와 여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어떤 자는 코와 귀를 베어내고 많은 사람의 눈을 도려냈다.‘

 

이런 잔혹한 행동을 자랑스럽게 기록한 그는 아시리아의 이리라는 이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이러한 공포 정치가 그를 당대의 패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지중해 방면으로 원정할 때 그의 잔학성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페니키아의 모든 도시들은 재빨리 공물을 바치면서 환심을 사기에 애썼다고 한다.

이런 면만 보면 네로가 특별히 로마 황제들 중에서 비난받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네로가 가장 크게 비난받고 악당의 대명사로까지 거론되는 것은 로마인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네로 시대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멸망하고 암흑시대로 들어간 후 중세시대가 기독교 열풍으로 뒤덮여 있을 때 악당으로 네로가 거명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상 네로는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든 로마시민 중에서 네로가 검투를 통해 로마인들을 즐겁게 했기 때문에 그가 자살하자 오히려 그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로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무덤엔 그를 기리기 위한 흉상들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네로가 초기에 내린 칙령들은 로마인들을 위한 조처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가 다시 부활하여 자신의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말도 퍼졌다.

그러나 그가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 또는 제거하는 등 연이은 행동으로 군대의 신임마저 잃어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오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무리한 친족 살해와 스승 세네카 처형 등은 반대파들이 그를 실각시킬 명분이 되었다.

물론 그가 악행을 저지른 로마황제 중 가장 악당이냐는 데는 이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로마의 수많은 황제들도 악행을 저지르는데 뒤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대 황제의 기본 권한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네로를 엄밀히 연구한 학자들은 네로가 과거처럼 무조건 폭군이라고 비난만 받는 것은 아니며 그가 다른 황제들보다 초창기 5년 간은 상당히 현명하게 로마를 통치했다고 두둔한다. 즉 네로가 자행한 것에 비해 그의 악명이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 대화재의 배후에 네로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콜로세움에서 기독교인들을 죽였다는 것은 중상모략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수많은 황제 중에서 네로가 가장 악당이라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네로가 부분적으로 복권된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양에서 가장 악당이라고 거론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악행의 대명사가 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평가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는 설명네로에게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세네카, 나무위키

네로, 나무위키

네로, 위키백과

세계 사형백과, 카를 부르노 레더, 하서, 1995

기이한 역사, 존 리처드 스티븐슨, 예문, 1998

무서운 세계사의 미궁, 키류 미사오, 열림원, 2001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리처드 셍크먼, 중앙 M&B, 2001

네로 광기와 고독의 황제, 필리프 반덴베르크, 한길사, 2003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 이종호, 문화유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