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칼리쿨라의 복권

Que sais 2020. 12. 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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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황제 칼리굴라

로마사에서 기행과 악행을 삼은 황제로는 3대 황제인 칼리굴라(재위 3741), 네로 그리고 코모두스를 꼽는다. 칼리굴라가 황제로 재위한 기간은 단 4년에 지나지 않지만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테러와 친속상간, 살인 등의 악행으로 그의 사망 후 2,000년 후에도 타락한 사람으로는 오히려 네로를 능가한다고 지목되기까지 한다.

서기 12년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칼리굴라는 네로의 어머니 소아그리피나의 오빠로 전쟁 영웅인 게르마니쿠스(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된 드루수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를 아버지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인 ()대아그리피나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로마의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가이우스는 몸에 꼭 맞는 제복에 군화를 본 딴 어린이 구두인 칼리가에를 자주 신었으므로 칼리굴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칼리굴라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로마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로마 시민은 물론 원로원도 그의 명성에 마법이 걸려 황제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아우구스투스에 비견할 정도의 권력을 부여했다.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이 기대한대로 티베리우스에 의해 무고하게 투옥된 정치범을 석방하고 감세 조치와 로마인들에게 현금을 살포하여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는 로마의 국경을 수비하고 있던 게르만 용병들에게도 재물을 나누어주어 로마 변방에서의 소요를 잠재웠다.

더불어 칼리굴라는 자신의 어머니인 대아그리피나와 형제들의 죽음에 연루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전전긍긍하던 원로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고 티베리우스 통치 동안에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던 모든 로마인들에 대한 사면을 선언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 머리숱이 적었지만 호남형인 칼리굴라는 로마인들의 신망을 더욱 얻기 위해 원형경기장에서의 검투를 활성화시켰다. 칼리굴라에 대한 로마인들의 찬사가 얼마나 높았는지 그의 할머니와 세 명의 누이동생들은 모두 성처녀로 추앙되었고 원로원은 모든 서약 문구에 소아그리피나, 드루실라, 리빌라의 이름을 넣게 했다. 서약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끝맺음을 해야 했다.

 

또한 본인은 본인 자신과 본인의 가족을 사랑하기에 앞서 가이우스와 그 누이들을 더 사랑하겠노라.’

 

또한 역사상 전례가 없이 그들의 얼굴을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하여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칼리굴라가 한 달 동안이나 생사를 드나드는 중병에 걸렸다. 칼리굴라가 중태라는 소문을 듣자 동정적인 로마인들은 궁전 앞에 모여들어 밤낮을 지새웠다. 궁전에서 800미터 반경 안에서는 전차나 손수레의 통행, 음악 소리나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소리가 금지되었고, 오직 칼리굴라의 회복을 비는 시민들의 기도 소리만 허용되었다. 로마 상류층들은 황제의 병환이 낳을 수만 있다면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싸우거나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맹세했다.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의 열정적인 소망에 의했는지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칼리굴라가 친구들과 가족들을 불러 자신의 심경을 발표했을 때 로마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황제를 맞이해야 했다.

 

내가 정말로 앓았던 것이 아니다. 나는 완전한 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죽음에서 살아나 신으로 태어난 칼리굴라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주피터 신과 왕래해야 한다팔라틴 언덕과 카피톨 언덕을 잇는 높은 다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자신이 병상에 있는 동안 자신의 쾌차를 빌면서 맹세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했다. 검투사가 되어 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에게는 맹세를 지키는 영예를 주겠다며 목숨을 걸고 싸울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수많은 축제와 원형경기장에서의 경기를 계속 열었는데 문제는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마자 많은 부분에서 세금을 면제했기 때문에 그가 등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티베리우스 황제가 열심히 모아 두었던 로마제국의 국고를 텅 비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텅 빈 국고를 새로 채우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검투사에게 줄 상금조차 적어지고 동물들의 반입이 줄어들어 경기가 재미없게 되자 칼리굴라는 구경꾼들로부터 야유를 받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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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는 국고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식품, 소송, 매음에 세금을 매겼고 로마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전 재산을 칼리굴라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한 후 살해했다. 특히 유언장에 자신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으면 배은망덕하다는 이유로 유언장의 효력은 상실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세 명의 여자형제들과 친속상간을 주저하지 않았고 또 공개적으로 그들과 섹스를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난잡한 섹스 행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들과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졌다. 많은 사람이 참석한 연회에서 누이동생들을 차례로 자기 아래에 눕게 하고 그 위에 자기 부인을 눕게 했다.”

 

그러다가 소아그리피나가 아들(네로)을 낳자 그녀에 대한 칼리굴라의 성적 관심은 완전히 식어버리고 막내동생인 드루실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칼리굴라로서는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아니었다. 칼리굴라의 첫 번째 부인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이 된 리비아 오레스틸은 빼앗은 여자였다. 칼리굴라가 오레스틸의 결혼식을 주재했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해 결혼식 날 남편이 아닌 그와 관계를 맺게 한 후 아예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실망을 느낀 후 곧바로 이혼하고 로리아 파울리나라는 매우 유복한 유부녀를 점찍었다. 파울리나의 남편은 지방 군대의 지휘관이었는데 칼리굴라는 그를 협박하여 그녀와 이혼시킨 후 결혼했지만 그녀에게도 곧바로 싫증을 내고 이혼 한 후 그녀에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라고 명령했다.

칼리굴라는 39년에 케소냐와 네 번째로 결혼했는데 그녀로부터는 비교적 안식을 찾았지만 케소냐 역시 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음탕하고 허영을 쫒는 여자였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녀가 수많은 남자와 자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그녀의 몸매를 자랑하도록 궁정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걸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칼리굴라의 유일한 자식을 낳았는데 누이동생의 이름을 따 드루실라라고 지었다.

칼리굴라는 여동생 드루실라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드루실라가 386월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드루실라를 여신으로 봉했고 그녀의 추도 기간 동안 제국에서는 웃거나 씻거나 가족끼리 식사하는 것도 모두 금지시켰다. 칼리굴라는 그녀의 황금 조상을 만들어 원로원 안에 설치하라고 명령했고 양성(兩性)을 갖고 있는 사람을 사제로 임명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주관하게 했다.

칼리굴라는 황제에 오른 지 2년이 지나지 않아 그동안 숨겨두었던 카드를 뽑아 들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위선자라고 매도하면서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죽음에 관한 증거를 없앴다고 공격했다. 황제가 된 초기에 그 사건에 대해서는 묻어 두기로 했었지만 칼리굴라의 변심에 원로원은 결국 반역재판의 재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고발되었고 즉결 처형되었다. 원로원의원들의 업무가 말보다도 못하다며 자신의 애마인 인시타투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이 이야기를 쓴 수에토니우스는 단지 소문이라고 적었다).

칼리굴라는 로마인들이 미워하는 행동만 찾아서 즐기기도 했다. 자신의 업적을 축하하는 거대한 파티를 열고 참석한 시민들의 지갑 속에 있는 모든 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강요했다. 모든 돈을 내지 않고 동전 한 푼이라도 지니고 있으면 즉시 처형당할 정도였다. 또한 황궁 내에 창녀촌을 만들게 한 후 원로원 의원에게 섹스 향연에 참석하라는 명령서를 보냈고 입장료로 엄청난 돈을 지불케 했다. 창녀촌의 여자들은 원로원의 부인과 딸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칼리굴라의 행동은 마침내 저항에 직면했다. 공교롭게도 사망한 드루실라의 남편 레피두스반란의 주모자였다. 레피두스는 칼리굴라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때때로 황제와 드루실라, 리빌라, 소아그리피나와 함께 한 침대를 쓸 정도였다. 하여간 레피두스는 체포되어 정식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고 소아그리피나도 고발되었다. 죄목은 소아그리피나가 간통했고 황제에 대한 반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칼리굴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칼리굴라는 그녀를 코르시카 섬으로 추방했는데 그것이 결국 소아그리피나가 다시 재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칼리굴라에 대한 사치와 성적 쾌락, 폭력에 집착했던 무절제한 미치광이라는 악평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시작된 이미지이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통치 내내 로마 제국이 잘 굴러갈 수 있는 정책들을 유지했던 황제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는 로마의 악당 세 명 중 하나로 거론되는 코모두스와는 달리 본인이 직접 정사를 돌봤으며 일부 사가들은 칼리굴라가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 황제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사치가 심했으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유산을 마구 퍼주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을 위한 사치라기보다는 즉위 직후 검투와 빵이라는 인기 영합 정책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황제는 즉위 후 곧바로 로마인을 위해 선심 정책 즉 뿌리기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어린 시절 본인과 황실 일가 전체가 세아누스라는 사람 한명에게 멸문될 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 자신과 율리우스 가문을 우상화했고 지나치게 근위대와 반대파들을 견제하여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었으며 결국 411, 근위병을 포함한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몸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30군데 이상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 말은 세기의 천재가 이렇게 죽는다였다고 한다. 황후 케소냐는 도망가다가 잡혀서 죽었고 그의 두 살 난 딸 드루실라도 암살자가 벽에 여러 번 던져서 죽였다.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위기를 겪었고, 특히 그의 난행에 대한 이력은 계속 포장되어 미치광이’, ‘근친상간하는 변태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사실 이런 설명은 그가 죽고 백여 년 뒤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가 하지 않은 일까지 첨가되어 그는 구제불능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그보다 선임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내린 중요 결정들을 제멋대로 교체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그의 짧은 치세동안 팔라틴 언덕과 카피톨 언덕을 잇는 높은 다리 즉 .2개의 대수교를 건설했다. 대수교는 로마가 1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전염병이 거의 없었던 것은 바로 대수교로 로마에 청결한 물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 일대의 경제 활성을 위해 만든 운하 건설을 착수했다. 더불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의 경제, 사회 정책들도 칼리굴라가 입안했거나 실행에 옮긴 부분이 이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네로도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천하의 악당으로 매도된다. 그런데 근래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가 적은 기행과 악행 상당부분은 그가 하지 않은 일까지 첨가되어 그를 구제불능 폭군으로 낙인찍었다고 설명한다. 그가 비판받는 상당 부분 그가 하지 않은 일이라는 결론으로 과거처럼 절대 악당으로 분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로마의 3대 악당으로 거론된 칼리굴라, 네로, 코모두스 중 칼리굴라와 네로가 어느 정도 복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가 행한 여러 가지 난행이 모두 벗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서로마는 그가 사망한 지 400여년 후에 멸망했지만 많은 학자들이 로마의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만성적인 부패와 사치, 타락된 생활을 거론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굴라와 네로가 로마를 궁극적으로 패망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라고 지적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참고문헌 :

칼리굴라, 나무위키

칼리쿨라, 위키백과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 리처드 생크먼, 중앙 M&B,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