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불명예 대명사 코모두스(2)

Que sais 2020. 12. 2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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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조>

역사물을 작품화할 때의 문제는 역사적인 사실과 영화라는 특성을 어떻게 조화를 시키느냐이다. 역사적인 사실만 그대로 전한다면 영화 작품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역사물인 영화라 하더라도 영화는 개연성 있는 허구의 드라마가 기본이라 할 수 있으므로 굳이 역사교과서처럼 제작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래디에이터의 가장 큰 오류는 공동 황제인 코모두스에게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황제 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막시무스에게 황제직을 이양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포옹하는 척하면서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장면이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역사의 변조가 아닐 수 없다. 로마에서 검투 등으로 살인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일반 살인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일반 살인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는데 경기장 안에서 공개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형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아들이 부모를 살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데 어느 나라에서나 부모를 살해한다는 것은 가장 경원하는 범죄 중 하나이다. 왕좌를 탈취하기 위해 선왕을 살해한다는 것은 더욱 그러한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러한 경우는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자식이 선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받고자 할 때 적어도 자신의 부하들을 활용하지 직접 살해에 나서지 않는다. 아무리 왕위가 중요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부모를 살해하고 왕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심적인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마는 기본적으로 공동 황제 제도를 유지했으므로 당시 코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로마의 공동 황제였다. 이와 같이 로마에서 공동 황제 제도를 채택한 것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로마의 속성상 여러 가지 변수로 황제가 사망하면 후계자 문제로 국정의 공백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모두스도 엄연한 황제로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가 보다 실권을 가졌을 뿐이므로 굳이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 고대 국가에서 공동 황제 제도를 채택한 곳은 여러 곳인데 그중 잘 알려진 국가가 이집트로 클레오파트라 7도 동생과 공동 파라오에 있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보면 아우렐리우스 황제마르코만니족(Marcomanni)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도중, 역병에 걸려 다뉴브강과 알프스산맥 사이에 있는 로마의 지방으로 현재의 헝가리인 판노니아(Panonia)에서 1803월에 사망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사망 당시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은 암을 사망의 원인으로 추정한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할 때에 코모두스는 함께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공동 지배자였으므로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19살의 나이로 실권있는 황제가 된다. 역사에서는 국민들에게 칭송받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여 폭정과 군인정치의 시대로 들어서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서술한다. 또한 자신을 신으로 여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달들의 명칭을 바꾸는 등, 코모두스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평가하지만 여하튼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아니다.

코모두스의 누이인 루킬라의 화려한 등장은 그야말로 역사의 왜곡 중에서도 압권이다.

영화에서 루킬라는 난폭한 동생의 야망과 사랑하는 남자의 복수심에서 갈등하는 착하기 짝이 없는 로마의 정통 공주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역사는 코모두스가 황제가 된 2년 후 즉 182년에 루킬라가 중심이 되어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루킬라164년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했는데 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젊은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재혼했다. 그러나 루킬라가 퀸티아누스가 자신과 신분 격차를 이유로 반대한 결혼이므로 부부 사이는 매우 나빴지만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어머니 파우스티나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루킬라내정에 간섭했고 아버지의 말년에는 아버지가 잦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월권을 행사했다. 코모두스는 누나인 루킬라를 엄마처럼 따랐는데 정작 루킬라는 그 반대였다.

알려지기는 루킬라가 코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현직 황제의 황후가 되면서 자신이 점차 허울뿐인 신세가 되자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루킬라는 자신이 스스로 코모두스 암살 계획을 주도, 182년 두 번째 남편의 조카, 루킬라와 내연관계였던 애인들, 코모두스의 장인 등과 음모를 꾸몄지만 이렇게 거창한 음모가 발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가 건장한 코모두스 암살을 담당했고, 코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올 때 칼로 저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콜로세움으로 들어오는 코모두스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는데,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낸다라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그는 즉각 호위병에게 칼을 빼앗기고 붙잡혔다.

코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아 눕기까지 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완전히 사람이 변했다.

우선 충격을 받은 젊은 황제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직접 원로원을 이야기했으므로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때 퀸티아누스는 심문 후 처형되었고, 암살 주동자였던 누나 루킬라와 그녀가 낳은 딸은 유배후 처형되었다. 다만 루킬라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는 모든 암살 사건과는 무관하여 숙청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킬라와 공모했던 5명의 누이들의 남편-매형, 매제들 중 3명은 공모자로 체포돼 살해당했다.

한마디로 이 사건으로 루킬라와 퀸티아누스는 처형되었으므로 글래디에이터에서는 루킬라가 동생의 죽음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코모두스가 사망할 때인 192년 루킬라가 막시무스와 우아하게 폼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반면에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인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다.

한국에서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역사 조작이 일어난다면 수많은 한국인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 영화 자체가 상영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계에서 헐리우드가 워낙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세계사를 좌지우지하던 로마와 같이 정통적인 나라의 역사를 마음껏 훼손한다는 것은 지적받아 마땅하다.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인 코모두스가 직접 검투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대에 검투 시합 개최는 일반적으로 황제의 의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코모두스는 로마 황제 중 직접 검투에 참가했다. 놀랍게도 코모두스는 로마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로 인정받기 위해 1,000회 이상 투기장에서 싸웠다. 이 사실은 로마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신이자 황제인 코모두스가 직접 검투에 참가했는데 당시에 검투사들은 가장 천한 계층에 속한 사람이므로 그들과 검투를 한다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도 수치를 안겨주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비난하는 가장 큰 요건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코모두스가 황제가 되어서 비로소 검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090회 검투에 참가했는데 그 중 355는 아버지가 황제로 있을 때였으며 735는 자신이 황제일 때였다. 이 말은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가 검투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코모두스가 검투장에서 검투하는 것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코모두스가 17년간 실권있는 황제로 재위하던 기간 즉 약 6,000일 중에서 거의 1주일에 한 번 정도 검투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검투사로 참가하여 단 한 번도 살해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코모두스가 자신과 검투한 검투사는 한 명도 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과 대결하다 패배를 선언한 검투사를 모두 살려주었다. 그런데 그와 싸운 검투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관전한 검투경기에서 검투사들이 볼거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한 사실은 있다고 한다.

그가 황제였으므로 그가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싸운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가 맹수와 싸우는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에 남다른 실력을 갖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는 검투장 안에서 기린, 얼룩말포획하고, 코끼리 3마리를 제압했으며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와 곰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사격술이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다고 한다.

실제로 코모두스는 돈을 걸고 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결투에 나설 때마다 검투사들의 공동기금에서 50만 세스테르츠를 보내도록 시켰는데 그것이 로마 국고를 채우는 큰 도구였다. 한마디로 로마의 황제가 직접 검투사와 싸울 때 판돈을 걸라는 것인데 황제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판돈을 코모두스가 거두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에서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코모두스의 경우 자신이 목숨을 걸고 검투에 임하니 판돈을 걸라는데 신하들이 주저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판돈을 걸어 딸 수 없는 불공평한 게임이라는 것은 코모두스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로마의 황제가 직접 검투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검투에 남다른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다른 검투에 자신이 있는 코모두스인지라 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직접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두르며 곤봉을 든 모습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다. 또한 네로 황제의 거상 콜로수스(Colossus)을 자신의 코모두스 헤라클레스상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도 마음에 들지 않자 당시 유명한 검투사였던 파울루스를 선망하여 자신의 동상 밑에 그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실예인데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한 코모두스의 흉상은 현재 로마의 콘셀베아트리 미술관에 있다.

 

<복권되지 않는 천하의 악당>

글래디에이터의 역사 오류는 여기에서 마치며 코모두스의 역사적 사실로 들어간다.

코모두스가 로마 황제 중 3대 악당으로까지 거론되는 것은 여러 가지다.

182년 친누나 루킬라가 원로원과 공모해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것을 발각한 후 그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진다. 한마디로 정치는 아버지 시절의 관료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무위도식으로 일관한 것이다. 또한 애첩과의 결혼하기 위해 황후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카프리 섬에 유배한 후 처형했다.

코모두스는 이후 더 이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고 모든 사항을 근위대장티기디우스 페렌니스가 처리토록한 후 자신은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