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제국의 악당, 불명예 대명사 코모두스(3)

Que sais 2020. 12. 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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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두스의 불행은 한마디로 부하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가 온천욕을 즐기면서 300명의 미소년과 300명의 미녀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가 좋아하던 검투사 경기에만 심취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악당 중 악당이 되는 요인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연유로든 근위대장인 페렌니스를 처형하고 신임 근위대장으로 노예출신 클레안드로스(클레안데르)를 임명했는데 그는 그에게 위임된 권력을 마음껏 활용하여 어느 해에 무려 25명을 집정관직에 임명하면서 막장통치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벌어들인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가졌지만, 상당한 몫을 코모두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무렵 코모두스를 노리는 두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군대를 이탈하여 산적 두목이 된 마테르누스(Maternus)187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레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다. 또 다시 일어난 암살 사건으로 그는 보다 많은 호위병을 곁에 두면서 더욱 더 정사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런 코모두스에게 정치적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는데 그 이유는 클레안드로스였다. 그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 있던 성난 군중들이 6km 떨어진 코모두스의 퀸틸리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드로스의 처형을 요구했다. 시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코모두스가 사태를 깨닫고 사태수습에 나서 그들의 표적인 클레안드로스를 참수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어 봉기를 가라앉혔다.

이 사건을 통해 코모두스는 클레안드로스 같은 사람을 재상에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권력을 모조리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문제는 행정 능력이다. 제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속주의 총독이나 국경의 군대 지휘관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수많은 전문 관료들이 숙청되었고 코모두스 본인도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황제가 보내온 편지에는 항상 잘 지내라 혹은 안녕정도의 의미인 바레(Vale)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었는데 이는 코모두스의 매형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원로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루킬라의 암살계획 당시 개입하지 않아 처형되지 않았고 끝까지 코모두스를 지지했다.

문제는 그와 원로원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원로원코모두스를 암살하는데 가담하였으므로 코모두스가 원로원에 부정적이지만 로마의 근본인 원로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모든 의원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많은 의원들을 파면하면서 의원직을 박탈하는 꼼꼼함도 보였다.

그런 191, 로마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반이 소실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부유한 많은 로마인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던 팍스 로마나의 상징인 평화의 신전까지 불에 탔고트로이 전쟁에서 아버지를 업고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성상베스타 신전이 파괴되기도 했다.

도심의 많은 지역이 큰 타격을 입어 대대적인 복구 작업과 재건축이 필요했는데 이때 코모두스가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지휘하면서 자신이 2의 로마를 창건했다며 자평했다. 문제는 이후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코모두스의 땅)이라고 이름을 짓고 달력에서 달의 이름을 자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러면서도 검투장에서의 활동은 계속했다.

그의 몰락은 192년 마지막 몇 달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 19211, 코모두스는 새해를 맞으며 로마의 새로운 건국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로 재건한 것을 축하하고, 황제를 '로마의 건국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방법이 다소 해괴한데 그가 선출된 집정관 두 명을 모조리 죽이고, 다음 날 자신이 검투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 검투사 집정관까지 되려고 했다. 한마디로 아무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인데 그를 저격할 기회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근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장한 채 지내는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암살의 원인은 그의 검투사 기질 때문이다. 그가 정무를 돌보지 않고 검투에 열중하는데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코모두스는 아예 검투사 숙소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검투사질을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적었다. 신하들이 그의 행동을 적극 만류했는데 아무리 황제가 검투사로 자질을 보인다고 하지만 신분상 천민인 검투사와 똑같이 숙소에서 살겠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코모두스가 오히려 그런 지적을 한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처형하라고 서명했는데 이 내용이 당사자에게 알려진 것이다. 코모두스를 암살하려는 계획 즉 코모두스를 죽여 다음 황제를 옹립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라이투스처형하라는 명령이 그의 목숨을 단축시킨 것이다.

라이투스시종장 에클렉투스, 코모두스의 애첩 마르키아와 음모를 꾸몄다. 마르키아는 코모두스가 맹수 사냥을 마치고 피곤해진 때를 틈타 은밀하게 독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

암살자들은 코모두스가 죽기를 기다렸지만 남다른 강단의 체력을 갖고 있는 코모두스인지라 독약을 토해냈다. 그가 회복될까 두려웠던 그들은 나르키우스라는 코모두스의 레슬링 교관을 시켜 목졸라 죽이라고 했다. 살해된 코모두스의 시신은 감쪽같이 궁전 밖으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물론이고 궁정 안에서조차도 황제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황제의 시신은 코모두스가 죽일 계획이었던 집정관 당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파비우스 킬로에게 넘겨져 밤 사이에 매장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신을 파내 일반 죄수처럼 시내를 끌고 다녀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지만 그는 시신 훼손을 반대했다.

그런데 코모두스의 시신은 놀라울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테베레 강에 던져지는 굴욕도 없었고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 황제에 의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이장되었다. 관례상 악당 황제에 대한 기록말살형은 그대로 집행됐는데 그는 놀랍게도 사후 4년 만에 기록말살형 철회와 동시에 신격화까지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죽은 후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코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까닭은,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기록말살형 철회는 원로원 입장에서 크나큰 굴욕이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족쇄>

로마의 3대 악당 황제 중 코모두스만은 카리굴라, 네로와는 달리 전혀 재평가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당대 로마인들에게 공인된 진짜 폭군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모두스에 역사가들이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은 광대한 로마제국을 통치할 생각은 없는 것은 군사적인 면에도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야만족인 게르만족과 휴전하여 전쟁을 일소시킨 것은 큰 업적이지만 이것이 계속 그를 비난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가 로마의 기본인 정복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남다른 비난을 받는 것은 얼렁뚱땅 졸지에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황제로 키워졌음에도 로마제국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가 비난받는 큰 죄목 중 하나는 그가 정치에 무관심하여 대리 정치를 시킨 부하들이 하나같이 매관매직으로 로마를 곪아들게 만든 것은 물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는데 이중 로마의 가장 중요한 기관인 원로원 위원들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원로원이 나라를 방치한 채 온갖 부작용만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그를 두둔할 수 있는 방법조차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코모두스가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지만 그가 국가를 위해 한 업적이 하나도 없어 원로원에서 공식적으로 지울 기록이 한 가지도 없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황제로 가장 큰 모욕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코모두스보다 악행에 관한 한 그의 후배 황제인 카라칼라(재위 198217)와 격이 다르다. 그는 코모두스를 이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었는데 사실 그가 황제로 오른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당대의 로마 정책으로 그는 198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공동통치를 했는데 그의 위치는 동생 게티와의 경쟁 때문에 매우 불안했다. 그런데  211년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브리타니아 원정 중에 사망하자 그보다 게타가 로마 제국의 2인자에서 1인자로 올라 그의 지위가 불안해졌다.

결국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만인 212카라칼라게타를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단독 황제로 올랐다. 이때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해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과했는데 이것이 로마제국에 장단점을 갖고 왔지만 그의 큰 업적으로 알려진다.

그는 적어도 코모두스와는 달리 213년 로마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고 215년 1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으나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 5세가 그의 요구를 수락하는 통에 전쟁없이 원정을 중단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머물던 중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대량으로 주민들을 학살하여 악명을 얻었다. 216년 파르티아의 볼로가세스아르타바누스에게 살해되자 다시 군사를 이끌고 파르티아군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인 카라칼라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로원까지 반카라칼라 진영으로 돌변했다.

로마의 정통성을 잃어버리는 이와 같은 카라칼라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병사들이 그를 경원하기 시작했고 결국 217년 4카라칼라는 자신을 경호하던 백인대장의 형을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메소포타미아 카레 근처의 신전에서 암살당했다.

그도 원로원으로부터 천하의 악당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그가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는 것은 그의 커다란 치적으로 치켜진다.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정책은 세수 충원을 원활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전부터 제국에 인력과 세수에 많은 기여를 하던 속주민에게 새로운 자긍심을 심어주어 제국 일체화에 공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자신을 욕하는 일반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학살하기도 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코모두스는 전반적으로 자신에 반대하는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여 처형하고 재산을 뺐기는 했지만 카라칼라처럼 자신을 욕하는 일반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학살하지는 않았다. 이를 보면 코모두스는 카라칼라나 동서고금에서 폭군으로 공인된 군주들에 비하면 약과로 보일 수 있다.

더구나 코모두스가 제위에 앉은 12년은 기근, 홍수, 전염병, 야만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아버지 등의 통치기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시기였다고 알려진다. 황제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잣대노예,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언급이나 이야기도 없다.

사실 코모두스가 즉위한 시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인 오현제 시대 직후였다.

코모두스가 가장 크게 비난받는 것은 아버지인 아우렐리우스가 로마를 지키기 위해 게르만족과의 전장에 혼신의 힘을 기우렸지만 그는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가 정복한 지역을 포기하면서 게르만족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 자체는 그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가 최악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화친 조약 자체는 로마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이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더 이상의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의 화친이 약 250년 후 로마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고 극구 비난하지만 거의 200여 년 동안 로마에서 커다란 전쟁을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코모두스에 역사가들이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은 광대한 로마제국을 통치할 생각조차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는 점이다. 게르만족과의 화평으로 로마의 기본 즉 정복전쟁을 포기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평화를 갖고 왔지만 그후의 그의 행태가 로마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코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일생 대부분을 게르만족 평정에 공을 쏟았다. 그런데 코모두스는 게르만족을 토벌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에 반하여 평화조약을 맺어 로마의 팽창정책을 포기했다.

그의 야만인과의 평화협정이 로마에서 전쟁이 사라지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지만 전쟁을 사라지게 한 후의 잇점 즉 그가 전쟁으로 지출되어야 할 수많은 전비가 확보되었음에도 이들 전비를 로마를 위해 사용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폭군으로 인정되는 카라칼라조차 기동대와 타격대로 군체계를 정비해 언제든지 소요사태가 있는 곳에 진출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히했다. 한마디로 역사학자들이 코모두스에 대해 가장 나쁜 점수를 주는 것은 평화협정을 맺어, 추후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하게 되기까지 그가 로마를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난은 그로부터 로마제국의 고질인 근위대장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시절까지의 문민 통치가 그로부터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로 전환된다. 페렌니스가 피살되고 그 뒤를 이은 클레안드로스는 제국을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었다. 즉 코모두스 시대 이후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해 이후 황제인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장인 레토에 의해 피살되며 이후 군인황제시대를 이끌면서 로마 제국이 군국주의화하는 단초가 된다. 한마디로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끈 장본인이라고 매도한 이유다.

가장 놀라운 것은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코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학자들은 코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으로 평가절하한다.

한마디로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해서 기독교 박해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얼마 안 되는 선행 중 하나로 설명된다. 심지어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신고해도 코모두스 황제가 무시하고 기각했다는 설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명군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후세에 기독교가 제국을 장악한 후 그야말로 혹독하게 매도당하여 그의 기마상이나 동상은 보는 즉시 파괴될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사실 코모두스는 검투에는 탁월한 재주를 보인 스포츠 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악평을 받는 역대 로마 황제들처럼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없다. 또한 시민들을 핍박하거나 무리한 세금징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로마가 막장에 몰린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학자로부터도 큰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명군인 아버지를 이어 로마제국의 틀을 반석으로 올려놓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행한 행동은 악당으로 치부되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콤모두스, 나무위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3757&cid=40942&categoryId=33098

영화에 보내는 러브 레터, 김정수, 인간사랑, 2000

예수에서 글래디에이터까지, 윤문원, 노블웍스, 2001

로마 황제, 크리스 스카레, 갑인공방, 2004

로마 황제의 발견, 이바르 리스너, 살림, 2007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기번, 대광서림,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