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로마제국

로마의 영광 : 콜로세움(1)

Que sais 2020. 12. 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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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위용을 발하고 있는 콜로세움2,000년 전에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거대한 것은 물론 그곳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갖은 만행이 벌어진 현장임은 틀림없다.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서로 죽음의 결투를 하거나 검투사와 야수들이 싸움을 벌였고 죄수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야수들이 달려들게 했다.

콜로세움이 그런 목적으로 설계된 것은 지하 시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원형 극장의 바닥에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으며 그 위를 모래로 덮었다. 미로와 같이 복잡한 지하실에는 검투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은 물론 맹수들을 가두어 놓은 우리가 있다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 모두가 로마시대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 모양이다.

로마기원전 753년에 늑대의 젖으로 자란 로물루스 형제건설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로마가 생긴 후 처음 몇 백 년은 특별한 예술이나 건축물이 없었다. 이런 양상은 기원전 1세기부터 변하게 된다. 로마의 장군 술라는 기원전 86, 그리스의 아테네를 정복하고 수백 개의 그리스 조각상을 로마로 갖고 왔다. 이 약탈된 조각상들이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후 최초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부터 로마는 세련된 예술의 시대로 접어들어 궁정 건축을 비롯하여 대형 건축물들이 들어선다.

기원 68네로의 자살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끝나자 그의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승리한다. 그는 원로원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의도적으로 선대 황제 시대의 궁정 예술과 결별했다.

그의 시대에 초상들은 남자답지만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뚜렷하게 개인적인 특성을 강조한 초상과 마찬가지로 건축물 대부분이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평민을 강조했다.

이런 목적에 의해 건설된 건축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콜로세움이다.

황제들의 포룸과 비아 사크라(신성한 길)가 만나는 교차점에 있는데 신성한 길은 로마 포룸에서 신전들이 모여 있는 길을 말한다.

콜로세움의 건축지를 선정할 때 실용적인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종교적 중심지인 포름 로마늄 즉 로마 광장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지만 호수가 있어 건축에 매우 불리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선정한 것은 정치적 의미 때문이다. 호수는 극히 화려한 설비를 갖춘 네로의 황금의 집의 일부였다. 이 집은 네로가 64년에 도시의 화재로 인해 비워진 시내 구역에 건설했다. 즉 황제의 사적 공간을 공적 공간으로 변모시킨다는 큰 명분이 있었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으로 서기 72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이 완성되자 시인 마샬은 공언했다.

 

로마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때 폭군의 전유물이던 것이 이제는 시민들의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형 원형극장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최초의 원형 극장이 언제 등장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록에 등장하는 원형경기장은 기원전 75년의 폼페이. 이 경기장은 바위와 흙 언덕에 나무로 된 자석을 깔았다. 원형경기장은 매우 정교한 건축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대체로 타원형으로 만들어져 관중이 어느 곳에서도 경기장내의 모든 동작을 편리하게 불 수 있었다. 콜로세움과 같은 급의 경기장은 둘째 베로나 그리고 셋째가 카푸아 경기장이다.

카푸아 경기장의 정확한 크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로나 아레나152 x 123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엄청난 크기이다. 학자들은 스파르타쿠스카푸아 및 폼페이에서 검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기장은 로마 본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님므, 아를르에도 있었고 로마인들이 진출한 독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는 물론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알려지기는 로마제국 전역에 200 개가 넘는 원형 극장이 건설되었으며 예루살렘의 원형 극장헤롯 대왕이 건설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Domus Aurea)의 일부인 인공 호수를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였으므로 이곳을 건축 후보지로 선정할 때 실용적인 관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황금궁전은 네로 시대인 64년에 일어난 도시의 화재로 인해 빈 공간이 된 로마 시내의 구석에 있었으므로 대형 경기장의 건설은 자살한 네로의 망령을 제거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검투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거대한 바위 축대 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 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으로 건축가는 라비리우스(Rabirius)로 알려진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콜로세움은 높이 45미터로 가로, 세로가 각각 190미터, 155미터에 이른다

정면부는 축과 층들이 합리적으로 구분되었는데 정면부 앞쪽에 놓인 4두 마차로 꼭대기를 장식했다. 각 층마다 기둥 모습이 다른데 1층은 도릭식 기둥, 2층은 이오니아 그리고 3층은 코린트식의 둥근기둥으로 80개의 원형 아치가 연속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각상, 4층의 막힌 벽면에는 청동 방패들을 세웠다. 관람석은 모두 4층인데 45,000의 좌석과 5,000명의 입석을 갖추었다고 알려지지만 일반적으로 80,000명까지 입장이 가능했다.

출입구가 건물의 디자인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층 외부의 각각 번호를 매긴 총 76개의 보미토리아(vomitoria, 아치형 출입구)는 여러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는 총 48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관객들을 바로 지정된 좌석으로 안내하는 계단 진입로와 일치한다.

콜로세움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물로 만든 벨라리움(velarium)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하였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구 역할을 했다고 한다. 관중은 입구 번호표를 갖고 들어가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좌석 배정 및 출입 통제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사용된다.

정면부 분할에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표준을 따랐지만 건축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콜로세움은 철저히 로마 건축이다. 받침 기둥, 지하층과 지층의 받침벽, 정면부 등만 값비싼 자연석을 이용했고 내부의 토대와 담은 저렴하고 가벼운 콘크리트와 기와를 이용했다. 이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소요된 석회석10만세제곱미터, 철은 330톤이다. 대리석은 특별석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접합제인 시멘트의 발명이다. 사실 로마인들이 당대의 신기술인 시멘트 덕분에 석조 건물을 훨씬 더 저렴하고 쉽게 만들 수 있었으며 확장된 로마 제국을 말 그대로 시멘트답게 공고히 다지는 역할을 했다. 사실 콜로세움과 같은 거대한 건물을 시멘트라는 첨단 자재가 없었다면 건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콜로세움로마식이라는 것은 아치가 주요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람들도 아치 개념을 숙지하고는 있었으나 대규모 건축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에서는 아치와 아치통로의 체계가 줄지은 아치로 이루어진 3개 층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둥근 아치 구멍들은 구조 원칙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면부는 반듯한 덮개라는 그리스 건축 원칙도 보인다. ‘받치는 기둥과 누르는 가로대라는 원칙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아치들에 의해 가려졌다. 콜로세움이 그리스 건축의 기본인 신전 건축과는 다르므로 눈에 덜 띄는 방식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콜로세움과 같이 그리스식의 독립적, 로마식의 담을 구조화하는 두 형식으로 기둥과 가로대를 사용한 것은 이후 유럽 건축사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한 모티브가 된다.

경기장은 80 x 50미터의 넓이로 카베아 즉 관객석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고 모두 80개의 출입구로 5만에서 8만 명의 관객이 단시간에 콜로세움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매우 합리적으로 설계되었다. 콜로세움의 규모는 현대의 경기장들 속에서도 중간 그룹에 속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이다.

중심축으로 통하는 네 개의 출입구는 황제, 고관, 화덕의 여신인 베스타 여사제, 사제 등의 특별손님용이다. 나머지 관람객은 76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지층의 아치문을 이용했다. 입장권에 쓰인 번호는 이 숫자와 일치했는데 입장료는 무료였고 때때로 입장료를 받기도 했다.

관객석에서 발견된 명판을 보면 로마 사회가 엄격한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경기장과 경계를 이룬 여러 줄은 원로원 의원과 그 수행원들의 자리였다. 이어서 군인과 나머지 계층들의 자리가 확보되었고 가장 나쁜 다섯 번째 객석여자들 차지였다.

검투사를 위해 두 개의 입구가 사용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로마의 죽음의 여신으로 불려지는 포르타 리비티나죽은 사람들이 나가는 문이다. 다른 한 문은 포르타 사니비바리아(Porta Sanivivaria)로 검투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사용했다. 또한 2개의 문은 황제의 전용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