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발키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2)

Que sais 2021. 1. 1. 09:47

youtu.be/ZRS-awfJiCU

<신화 속의 발키리>

작전명을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로 부르는 것은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할 당시, ‘독일예비군모집책(German Reserve Army's Valkyrie)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직책을 이용해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였으므로, 이것을 발키리 작전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히틀러오딘’, 퇴역한 군인은 전쟁 영웅으로 비유하고,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을 오딘과 영웅을 연결해 주는 발키리로 묘사한 것이다.

발키리 작전은 매우 세심하게 진행된다.

원래는 1944715,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 하에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연기해 1944720일로 변경했다. 720, 히틀러가 마침 동프러시아에 있는 볼프산체(wolfsschanze, 늑대굴) 벙커에서 작전 회의를 주재하므로 군 상층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이 폭탄을 들고 벙커에 들어가 히틀러를 폭사시킨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사망하면 곧바로 프롬 장군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예비군들이 나치를 전부 체포하고, 이어서 베크 원수독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면 그가 연합군과 협상해 소련을 막는다는 것이다.

히틀러를 제거시킬 폭탄은 국방군정보부의 사령관인 칼 카나리스 제독이 제공한 것으로 연합군이 레지스탕스에게 보내는 것이다. 폭탄일반적인 폭탄과는 달리 파편에 의한 살상이 아니라 화력에 의해서만 살상이 가능하다. 폭탄에 부속된 캡슐을 깨트리면 캡슐의 액체가 신관을 녹이고, 이어 뇌관을 건드리면서 폭발하는 것이다. 이런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볼프산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같아서 호신용 권총은 물론 결혼반지까지 전부 뺀 다음 들어갈 수 있으므로 금속제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폭탄을 최고지휘소로 반입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를 수행할 실무자로 폰 슈타우펜베르그적격이었다. 당시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은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당시 비행기 폭탄에 피격당해 오른팔과 왼손가락 3개를 절단하고, 눈 하나를 잃은 장애인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데다 독일의 명문 귀족이므로 독일 상층부로부터도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직접 폭탄을 운반한다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사실이 그랬다. 비록 실패했지만 벙커에 폭탄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히틀러 암살음모를 추진했던 주체세력은 큰 틀에서 기득권 세력이라는 점이다. 히틀러 암살의 실무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비롯하여 에빈 폰 비츨레벤 장군, 헤닝 폰 트레스코프, 메르츠 폰 크비르하임, 베르너 폰 헤프텐, 파울 폰 하세,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등 히틀러 암살 음모의 주역들 대다수는 중간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von)이 들어있다.

이들 모두 독일의 전통적인 귀족융커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에 비록 1차 세계대전에서 최고의 훈장인 철십자훈장을 받은 히틀러는 하사출신으로 그야말로 평민 중 평민이다.

사실 히틀러가 그들 귀족계급 즉 당대의 독일을 지배하던 독일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자초한 장본인들이 귀족 계급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에르빈 롬멜 장군을 총애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음모의 핵심(발키리의 한 장면)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여 히틀러 암살 이후 권력수반에 앉을 계획이었던 루드비히 베크 전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라이프치히 시장인 칼 프리드리히 괴들러 같은 인물들이 히틀러 암살 이후 수립하려 했던 독일은 과거와 같은 지배엘리트들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이들이 처음부터 히틀러의 반대파는 아니었다. 도리어 이들은 히틀러의 지지자들이었고, 그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히틀러에게 등을 돌리게 된 이유에 대해 영화 작전명 발키리유대인학살인류에 대한 범죄, 역사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양심적 갈등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지만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요인은 히틀러의 주장이 독일인들의 구미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등에서 볼셰비즘의 발호한 것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등에 의해 히틀러가 패망하면 결국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후와 같은 악몽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암살 계획은 그동안 부단히 추진되었으므로 히틀러는 자신과 급이 다른 귀족 계급을 가능한 한 배제했다.

그런데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귀족 중 귀족인데도 아프리카에서 한쪽 팔과 눈을 잃을 정도로 중상을 입은 당사자이므로 히틀러로 보아서는 제3제국에 그야말로 충성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귀족임에도 구세대에 물이 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정했는데 결론을 보면 히틀러가 허를 찔린 것이다.

 

<볼프산체의 거사>

1944720일 오전 10,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베크 장군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요?라고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편 오전 7,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은 그의 부관인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함께 랑스도르프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동프러시아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에 오전 1015분에 도착하여 1035분에 히틀러가 있는 볼프산체에 도착했다. 볼프산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는데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고 오전 11, 총통 본영의 참모 멜렌도르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정오가 되자 대기실에서 카이텔 원수를 만나 예비군 사령관인 프롬 장군의 국민척탄병 보고서를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카이텔은 총통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이 있기 때문에 일찍 회의를 끝내야 하며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원래는 지하 벙커의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으나 이 날 마침 재공사를 해야 하므로 위층의 개방된 회의실에서 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카이텔과 회의실로 가던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가는 길에 볼프산체의 통신감인 에리히 펠기벨을 만났다. 벨기벨은 폰 슈타우펜베르그에게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암호였다.

 

파괴된 벙커회의실내(괴링아 보임)

회의실로 가면서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갑자기 모자와 벨트를 안가지고 왔다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가방 속의 폭탄을 조작했다. 시간은 오후 1232분으로 폭탄은 예정대로라면 10분 뒤에 폭발할 예정이었다.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대기실에서 나오자 카이텔은 지각했다고 호통을 쳤고,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그에게 사과했다.

오후 1236, 회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베를린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올 예정이므로 오는 즉시 알려달라고 통신 교환수에게 말했다. 이것은 카이텔이 일부러 이 말을 듣게 해서 폭탄이 터지기 전에 빠져나갈 빌미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당시 회의실 내에는 히틀러를 비롯하여 군 장성과 그들의 부관, 타이피스트 2명까지 해서 총 2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 육군 참모총장 호이징거가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히틀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호이징거의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과 공군 참모총장 코르텐 사이에 서 있다가 몰래 가방을 히틀러 옆에 있는 테이블 기둥 옆으로 옮겨 놨다. 그리고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폭파까지 이제 5분 남았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나간 직후 하인츠 브란트 대령이 지도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기둥 옆에 있던 서류가방을 발로 건드렸다.

브란트는 가방 때문에 히틀러가 거추장스러워 할지 모른다며 폭탄을 자기 쪽, 즉 테이블 바깥쪽으로 폭탄을 끌어당겼다. 카이텔호이징거 다음에 보고할 사람이 폰 슈타우펜베르그였기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그는 없었다. 카이텔은 다소 당황했지만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에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베를린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 밖으로 찾아 나섰지만 그곳에서도 폰 슈타우펜베르그를 찾지 못하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후 1242, 호이징거는 브리핑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 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고, 순식간에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카이텔은 회의실 문 앞까지 왔을 때 갑작스런 폭발에 놀라 뛰어 들어갔다. 회의실 내에는 폭탄의 화염이 가득 퍼졌고, 지붕은 거대한 구멍이 났으며 창문은 모두 깨져 있었다.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폭파한 히틀러 방커(울프독 자료)

이 순간 에리히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던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폭발음을 듣고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후 펠기벨과 악수한 뒤, 부관인 폰 헤프텐과 함께 볼프산체를 떠났다. 마지막 검문소에서 그들이 빠져나간 시간은 1244분이었다. 중간에 폰 헤프텐은 폭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사용하려고 했던 2의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다. 볼프산체의 펠기벨도 통신선을 절단해 볼프산체를 고립시켰다. 오후 1255, 라스텐베르크의 비행장에 도착한 폰 슈타우펜베르그와 폰 헤프텐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한편, 폭탄이 터진 회의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끌어놨던 브란트와 타이피스트 베르거, 공군 참모장 코르텐, 히틀러 수석 부관 슈문트 등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히틀러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약간의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혀 이후 히틀러의 팔은 자주 마비 증상을 보였다. 기절한 히틀러를 회의장 밖에 있던 카이텔이 뛰어 들어와 불길을 헤치며 히틀러를 끌고 나와 결국 히틀러는 생명을 건졌고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무소리니와 히틀러

 

오후 115, 펠기벨은 예비군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올브리히트에게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보고했다. 올브리히트는 당황했지만, 아직 베크와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이 무렵, 볼프산체에서는 SS사령관겸경찰총장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건 현장에 도착해 사건을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엔 아무도 폰 슈타우펜베르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폭발이 연합군의 정밀 폭격이나 이미 오래 전부터 폭탄이 비밀리에 설치된 걸로 여겼으며, 모두 그가 죽은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환수와 카이텔이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사라졌다고 했고, 검문소에서도 폭파 직후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볼프산체을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오후 4, 히틀러와 히틀러는 예정대로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무솔리니에게 자신이 테러를 당한 회의장을 공개했고, 현재 전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만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결국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그의 설명에 감동하면서 이 사건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결국 둘 모두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5, 무솔리니와의 회담 중에 통신선이 복구되며, 사방에서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다. 히틀러는 1934SA대장 에른스트 룀이 테러에 의해 사망했던 사건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겠다고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