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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여우, 롬멜장군(1)

Que sais 2021. 1. 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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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키리 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암살 시도에 참여하여 처형된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르빈 롬멜 원수. 일부 학자들은 롬멜 원수가 억울하게 반나치에 동조했다는 누명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하지만 롬멜이 의심을 받을 일을 한 것은 틀림없다. 우선 폰 슈타우펜베르그 대령롬멜 장군의 부관이었으므로 끈끈한 연계가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가장 유명한 독일군 원수 중 한 명이다.

 

롬멜 원수

에르빈 롬멜은 1891년 11월 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덴하임안데어브렌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31녀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롬멜은 유년 시절을 평안하게 보냈다고 알려진다. 191018살에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한다. 1911년 3월, 단치히에 있는 군사학교를 다녔을 때 그는 어느 한 무도회에서 당시 17세이던 '루시에 마리아 몰린'(Lucie Maria Mollin)이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롬멜이 그해 11월에 복무를 위해 바인가르텐에 있는 군사학교로 돌아가면서 그는 루시에와 헤어졌고 1912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바인가르텐으로 돌아올 때, 그는 발부르가 슈테머(Walburga Stemmer)라는 당시 20세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귀족출신이었던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엄청난 지참금이 들었기 때문에,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두 사람의 결혼은 연기되었다. 그녀가 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는 전선으로 나갔고 결국 결혼은 슈테머가 아니라 첫 사랑인 루시에 마리아 몰린과 1916년에 결혼한다. 그런데 슈테머가 딸을 낳고 일찍 죽자 롬멜의 부모가 딸을 양육하였다. 한편, 롬멜과 결혼한 루시에는 1928년 아들 만프레트 롬멜을 낳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슈투트가르트 시장을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은 1915년 프랑스 전선을 시작으로 루마니아, 이탈리아 전선 등지에서 싸웠는데 그는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는 두 번에 걸쳐 심한 부상을 당했고, 중위로 진급하면서 1, 2철십자훈장수여받았다.

특히1917년 10, 이탈리아 마타주르 산에서 불과 1개 산악중대병력 150여명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무려 10,000여명의 이탈리아군과 마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속전속결작전으로 무려 9,000명의 적군 포로로 잡는 등 눈부신 전공을 세워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로부터 푸어르 메리테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 훈장은 처음에는 다른 장교에게 주어졌는데 그 이유는 롬멜이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장교였기 때문이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았을 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는데 계속 군에 남았다. 이후 바이마르 정부를 사수하는데 일조하면서 슈투투가르트 보병 연대의 참모가 되었고 1929년 9월, 드레스덴 보병학교 감독관으로 부임하여 사관후보생들을 가르쳤다.

1933년 소령으로 진급한 롬멜17보병연대 3대대장으로 임명되었고 히틀러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때 그가 나치스 정당에 호의적이라는 것은 3대대 지휘관 임명식에서 행한 짧은 연설에서 '우리의 제국 총통이신 아돌프 히틀러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 역설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때 히틀러에 대한 추종보다는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던 독일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군대의 정비', '군비 확장 정책'을 취한 히틀러에 호의적이었던 독일군 장교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고, 히틀러가 총통에 올랐다.

롬멜은 이후 히틀러의 본부 병력을 지휘하면서 히틀러와 매우 가까워지며 각종 연설을 통해 히틀러를 찬양하며 포츠담에 있는 군사학교의 전술교사가 되었다. 1937년에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보병전술록이란 책을 발간하여 명성을 높였다. 19383, 오스트리아가 나치스 독일에 병합되었을 때, 롬멜은 빈 근처에 있는 비너노이슈타트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히틀러를경호하는롬멜

19398, 롬멜은 사상 처음으로 대령에서 곧바로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총통 지휘본부에서 히틀러를 경호하는 경비대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히틀러 옆에는 항상 롬멜이 있었고, 나치 독일군의 핵심 엘리트가 되었다.

평민, 사병 출신의 히틀러는 평소 귀족 출신의 독일군 장군들을 탐탐치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평민이면서 이론을 갖추고 전술에도 능력이 있는 롬멜같은 장교와 자신의 친위부대인 SS부대만 신임했다. 롬멜히틀러동지적 유대 관계를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단 20일만에 폴란드가 무너지자 그는 7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한다. 보병대 출신의 군인이 전차부대 지휘관이 되었지만 그는 전차에 잘 적응하였고 1940년 5월, 7기갑사단을 이끌고 프랑스 서부전선의 프랑스의 마지노선도달했다.

그의 상관인 제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Hans Guenther von Kluge)상급대장이 롬멜에게 '절대 돌파하지 말 것'이라 명령을 내렸지만, 롬멜은 기습공격을 시도하여 대 성공을 거둔다. 이후 연합군은 7기갑사단도깨비 사단’, ‘유령 사단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가 남다른 명성을 받은 것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말단병사의 경험과 고충에 귀를 기우리는 것은 물론 점령지의 주민들에게는 깎듯했으며, 특히 포로가 된 적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예우를 갖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롬멜은 프랑스와 독일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독일이 프랑스 북부지역을 획득하자 롬멜의 공이 인정되어 철십자상받으며 48세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1940년 6,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한 후 이탈리아군 사령관 그라치아니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공격한다. 그러나 리처드 오코너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대반격을 시도해 이탈리아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이탈리아 식민지 리비아를 거의 점령했다. 이에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리비아를 잃은 이탈리아가 동맹의 대열에서 이탈할 것으로 염려해 15 기갑사단과 제21 기갑사단 등 아프리카 군단을 조직하고, 롬멜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한다.

당시 롬멜은 독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괴벨스의 독일 선전성은 프랑스 작전에서의 독일군의 승전을 담은 영화 서부의 승리독일 국민과 군인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롬멜이다.

19412, 롬멜과 아프리카군단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사막의 여우로 불리게 된 롬멜 신화의 시작이다. 그와 맞서는 영국군 사령관아치볼드 웨이 장군이다. 그는 영국군의 영웅이며 수많은 전투 교본을 쓴 장군으로 롬멜은 그가 쓴 책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롬멜은 키라나이카로 진격을 명령했는데 이는 아군과 적군 모두 예상을 뒤엎는 작전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군단의 사령관인 롬멜이 사막 전투에 경험이 없으므로 적어도 몇 달 정도의 적응기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의 상당수가 그리스 전선에 투입되었음에도 장병수에서 독일군이 열세였는데 이를 위장술로 극복했다. '위장 전차'로 전차수를 증강, 아프리카 군단의 대대적인 기습 공격과 공세로 영국군을 격파했다. 예를 들어, 롬멜은 10만 명의 병력과 불과 약 150대의 전차를 갖고 있었음에도 20만 명의 병력과 1,300대의 전차로 무장한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사막전의 전문가인 영국군 지휘관 리처드 오코너 육군 소장포로로 잡는 등 영국군을 초토화시키면서 연합군의 혼과 진을 빼놓아 연합군은 그를 사막의 여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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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탈피한 작전>

롬멜이 사막의 여우라고 불린 것은 독일을 철저하게 미워하던 연합군 측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롬멜의 장점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전술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는 빠르고 많은 적 앞에서는 천천히 대적하되 추격할 때는 후퇴하는 적보다 더 빠르게 기동전을 펼쳤다.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해 대항했다. 거대한 적은 분산시키면서도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해 대적했다.

또한 그는 위장과 기만전술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우선 롬멜은 영국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열세인 전차 수를 위장 전차를 만들어 극복했다.

폭스바겐 승용차에 널빤지를 붙여서 전차처럼 위장하고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전진했다. 영국군은 숫자가 별 것 아니라고 예상했던 롬멜의 전차부대가 무려 수백 대나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보고 영국군은 혼비백산해 후퇴를 했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롬멜은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대공포를 경전차에 고정시켰다. 영국군 전차는 롬멜의 부대를 뒤쫓다가 매복해 있던 대공포를 직격으로 맞아 패배했다. 한마디로 롬멜전차전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토부르크에서 롬멜

롬멜은 승리를 위해 조직에 속도를 부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가 제7기갑사단을 맡을 때 전차들은 전진하다가 목표물을 발견하면 멈추어서 포격을 했다. 명중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멈추는 순간 적에게 노출되는 단점이 있으므로 롬멜은 이를 변경했다. 전차 전투 시 모든 전차는 달리면서 포를 쏘라는 것이다.

이런 포사격은 전함이 해전에서 쓰는 방법인데 그럴 경우 탄환이 낭비된다. 부하들의 지적에 롬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투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전차전은 현대 전차전의 교범이 되었다.

문제는 병참 지원이었다. 전황은 병참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진퇴를 계속하지만 부족한 전력으로 잘 버텨 대장으로 진급한다. 이때 그의 이름을 세계로 널리 알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1942년 1월 의회에서 적장인 롬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현재 키레나이카의 서부전선이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대에게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대담하고 솜씨 좋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전쟁의 재앙인 그는 그러나 장군으로서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며 영국군이 당한 참패 바로 옆에는 항시 이 걸출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처칠이 그야말로 극찬했는데 이후에도 롬멜의 성과는 놀라워 영국군의 제8 군단을 섬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드디어 혈투의 현장인 토브룩 요새를 함락한다. 바로 이 공로로 롬멜은 대장에서 원수 계급으로 승진하지만 히틀러의 파격적인 신임이 없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은 물론이다.

롬멜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군인으로서 롬멜이 거둔 위대한 승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의 부하들은 우리의 대장이 롬멜이다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와 상대한 연합군조차 패배의 요인으로 우리의 상대가 롬멜이다라는 것을 당연한 듯 여겼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