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발키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3)

Que sais 2021. 1. 1. 09:48

youtu.be/wfoYq-698hk

<배신자 5,000명 처형>

히틀러가 배신자들을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자 나치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을 곧바로 열었다. 반란자들 대부분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거의 대부분 신속하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7,000명 또는 자료에 따라 8,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이 중 약 5,000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들 대부분 교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히틀러가 그들 모습을 보고 푸줏간의 돼지같다고 묘사했을 정도다.

 

폰 슈타우펜버그가 처형된 연병장

당시 처형된 저명인사 및 군 장성, 고관들이 워낙 많지만 폰 슈타우펜베르그의 친형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그는 전직 법학대학원 교수해군에 몸담고 있었는데 벨트 없는 누더기를 입은 상태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재판장에게 엉터리 심문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기개를 잃지 않았다. 육군총사령관 폰 비츨레벤은 처형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총살시키지만, 몇 달 뒤면 성난 국민들 손에 산 채로 독일 거리를 끌려 다니게 될 것이다.”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를 비롯한 경찰 총수들도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들 경찰총수들이 처형되자 혁명에 직간접으로 연류되는 경찰 500여명도 처형당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반나치에 동조했다가 최후에 배신한 프롬도 처형당한다. 다만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당했는데 프롬은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리 없다며 배신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서 있었으므로 총통이 살아있는 한 배신하지는 않는다고 확언하곤 했었기 때문이지만 그가 처형된 것은 히틀러에게 반란의 의도가 있음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발키리 작전이 실패하자 가장 큰 피해를 본 측은 아무래도 폰 슈타우펜베르그 가문이다. 히틀러가 펀 슈타우펜베르그의 가문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려 가문이 거의 멸족될 위기에 빠질 정도였다. 막내딸을 임신하고 있던 폰 슈타우펜베르그의 부인 니나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서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딸을 낳고 길렀다. 폰 슈타우펜베르그의 4명의 자녀들은 공립 고아원으로 보내져 강제로 폰 슈타우펜베르그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마이스터라는 이름이 대신 주어졌다.

그러나 히틀러의 그런 명령에도 폰 슈타우펜베르그가 워낙 거물 귀족 가문이므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이들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국에게 독일이 패망한 뒤였지만 폰 슈타우펜베르그의 가문은 옛 명성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큰 아들이 나중에 서독군이 새로 탄생하자 바로 임관하여 38년간 복무하고 육군 소장으로 은퇴했다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의 부인 니나20069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2008년 출시된 영화 작전명 발키리 Valkyrie를 보지 못했다.

 

<발키리가 성공했다면?>

2019720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발키리거사 75주기를 맞아 개최식을 개최한 베를린의 벤들러블록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 거사에 실패한 후 처형당한 지점이다.

그를 포함한 발키리 참여자들은 유럽에서의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이 기울자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만이 독일이 살 길이라고 결심하여 결국 히틀러가 있는 방카에서 폭탄을 터트렸지만 폭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무사히 살아남고, 발키리 거사에 가담한 핵심들이 줄줄이 처형되었다.

 

‘발키리’ 거사 75주기 추모식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AP연합뉴스)

여기에서 지적되는 것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들어갔을 때 발키리에 참여한 사람 모두 히틀러를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독일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 일어난 상황은 그야말로 상식에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 발단은 승리한 영국, 프랑스 등의 강압적인 정전 조건 때문이었는데 히틀러는 이를 복원 하여 과거의 독일 위용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인 거의 모두 열광했으며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유럽 전체를 석권하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역사는 히틀러의 장담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데 독일이 패망한 후 독일이 어떻게 되느냐이다. 한마디로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후와 같은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는데 어떤 정황이든 히틀러가 살아 있는 한 연합군과 휴전 협상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키리 작전은 독일의 상층부에서 매우 광범위한 기획을 거쳐 벌어졌다. 그만큼 독일의 사정이 좋지 않아 지식인들이 적극 관여했다는 뜻이다. 발키리 프로젝트에는 그야말로 제국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제도권의 귀족은 물론 상류층들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광기에서 독일 조국을 위해 자신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누군가가 일어서야하는데 자신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히틀러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무려 42차례의 암살 기도에 굳굳히 버텼으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현대 지도자 중 가장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던 인물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로 인식한다. 피델 카스트로-마이 라이프에 따르면 모두 600여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는 계속 있었지만 독일의 제도권이 국가에 대항하는 발키리와 같은 쿠데타는 독일에서 아주 예외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독일의 역사에서 조직적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독일의 특수성은 진정한 독일의 출발로 인식하는 프로이센국가가 군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 이상한 체제인데 이것이 독일의 기본 정치 이념이 되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즉 국가와 상층부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이다.

히틀러가 통치하는 제3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독일은 군체제로 움직여 이에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독일 군부의 뇌리에는 쉽게 자리 잡을 수 없는 논의, 쿠데타를 끌어들인 장본인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귀족 중 귀족인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독일의 최고 정치인들의 쿠데타 주역과의 논의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지적했다. 히틀러 암살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될 최고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동안 쿠데타란 생각조차해보지 않았으므로 쿠데타를 기획한 사람조차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지적에 쿠데타 동지들이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전황이 워낙 나쁘다보니 일단 히틀러를 제거해야 연합군과 협상의 카드라도 쥘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계획대로 거사에 들어갔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이 여기에서 매우 껄끄러운 질문을 제기한다. 발키리 작전을 만약이라는 단어를 대입하여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해보자는 것이다. 즉 히틀러가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과 그의 동지들이 계획했던 대로 암살당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의문이다.

이 질문에 관한 한 학자들은 대답은 대체로 현재 진행된 역사와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히틀러가 사망했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극적인 상황이 오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당대 정황을 구성해보면 히틀러의 암살 시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66일로부터 44일이 경과한 1944720일의 일이었다. 한마디로 당대의 전황은 연합군의 전황이 압도적이므로 독일에서 휴전을 제의해도 이를 수락할 이유가 없었다. 쿠데타로 나치 정권은 전복되었다 해서 그 결과로 독일이 정말 연합국, 소련 등과 휴전을 맺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연합군으로 참석한 소련독일과의 어떠한 협상에도 반대했다. 그러므로 히틀러의 독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을 상대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안감 힘을 다 사용하지만 히틀러가 1945430일 사망하고 후계자로 지명된 데니츠 제독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 소련이 무조건 항복이 아니면 어떠한 협상도 반대했기 때문으로 결국 발키리작전이 실패한 지 약 10개월쯤 뒤인 194558일 되니츠 제독의 명목상 제3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

 

폰 슈타우펜베르그 서거 20주년 기념식

메르켈 총리가 강조한 것은 제3제국이 통째로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갔지만 히틀러 정권에 반대했다는 독일인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군국주의로 똘똘 뭉친 독일 정부 즉 제3제국을 상대로 한 쿠데타가 실패했지만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때까지 조직적으로 히틀러에 대항한 사람이 독일에도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발키리의 희생자들이 제3제국의 극우 극단주의, ()유대주의, 인종주의와 결연히 싸운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총리는 불복종이 의무가 될 수 있는 순간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바로 이것이 토대가 되어 2차 대전 후 기본법에 저항권명시됐다는 것이다. 즉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과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저항권리가 명시되었다는 뜻으로 이런 역사적 교훈이 잊히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이 후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같은 사람이 독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뜻과 다름없는데 이는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거사 즉 발키리 프로젝트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고문헌 :

발키리 작전 - 슈타우펜베르그 대령, 울프독, 야후코리아, 2009.01.20.

에르빈 롬멜, 평화재향군인회, 2009.07.21.

카를 되니츠, 나무위키

달려라 달려, 무적 로봇, 유용원, 조선일보, 2010.08.03.

롬멜도 죽게 만든 '작전명 발키리'메르켈의 추모, 김태훈, 세계일보, 2019.07.21

https://windshoes.khan.kr/645

한국7대불가사의, 이종호, 예담, 2007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 백산자료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