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2)

Que sais 2021. 1. 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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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영국과 미국이 아프리카 전선의 중요성을 깨닫고 막대한 물량과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롬멜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엘아라마인에 도착하지만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당시 연합군 사령관은 몽고메리인데 194210월 전투에서 롬멜은 몽고메리의 연합군에 대패한다. 이 패배로 아프리카 전선의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가는데 롬멜은 베를린에 계속 병력과 전차, 군수품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오는 답신은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무조건 결사항전하라였다.

당시 히틀러는 소련 전선의 늪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 여력도 없었다. 한마디로 히틀러가 롬멜을 지원하고 싶어도 지원해줄 병력과 전차가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카이로와 스웨즈 운하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롬멜에게 고민을 주는 명령이었다. 히틀러의 명령대로 공격하면 병사들만 희생당하는 것이 뻔했고 반면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 항명죄가 되는 것이다. 롬멜은 알라메인을 앞에 두고 퇴각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군인으로서의 야망을 병사들의 생명과 바꾼 것이다.

 

아프리카 전선의 롬멜

학자들은 이때부터 롬멜이 히틀러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동조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롬멜이 '히틀러와 나치 추종자라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할 때 드는 첫 번째 예가 바로 이 사건이다. 1943년 튀니지 전선으로의 퇴각으로 독일의 자랑 아프리카 군단이 궤멸 수순을 밟자 히틀러는 롬멜을 19433, 북아프리카 전선 패배의 책임을 물고 해임시킨 후 본국으로 소환한다. 일설에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 롬멜이 자칫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그가 독일로 소환된 후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과 미국군과 격전을 보였지만 전력의 한계가 명백하여 1943 5, 아프리카 군단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선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롬멜의 소환>

롬멜의 독일 귀환은 총통 히틀러의 총애를 잃었다는 것을 뜻하며 롬멜도 히틀러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상륙에 성공한 후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해 들어오자, 히틀러롬멜을 복직시키고 이탈리아 전선으로 투입했다.

1943년 723,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상륙작전 성공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해 들어오자, 히틀러는 롬멜복직시키고 그리스 살로니카로 발령내었다. 그런데 7월 25일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실각되면서 바돌리오 내각이 수립되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으로 돌아서자 롬멜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한다.

롬멜은 이곳에서도 전격전을 발동하여 729 독일 사령부에서 계획한 '알라릭 작전'개시로 이탈리아 중북부지역을 단숨에 접수한다. 이후 롬멜은 이탈리아 북부지역 사령관으로서 이탈리아 북부지역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힘썼다.

그런데 여기에서 변수가 생긴다. 1943년 9월경, 롬멜이 나치의 집단 수용소와 유대인 학살 행위 즉 홀로코스트를 접하자 직접적으로 히틀러에 대한 비난대열에 동참한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행위는 크나큰 범죄행위다.’

 

롬멜이 히틀러의 미움을 사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194311 히틀러는 그를 프랑스로 이동시킨다. ‘대서양 방벽즉 소위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대한 방어선 구축의 임무를 부여받고 서부전선 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함께 서부전선에서 근무하게 된다.

원래 이 계획은 1941년 12월부터 히틀러의 명령으로 프랑스 해안에 연합군침공에 대비하여 준비하던 것으로 이때 그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휘한다. 롬멜은 연합군이 대규모의 교두보를 설치하는 것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저지해야 하고, 연합군의 반격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선 뒤에 강력한 예비대를 배치해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합군의 공격의 성패첫날에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해변

그러나 독일 국방군최고 사령부 등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 사령부는 그 이유로 먼저 아무리 해안 방어가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후방에 공수부대가 투입할 경우 이를 기갑사단이 제거해야하므로 실질적 해안방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서부전선 사령관 폰 룬트슈테트해안지역 방어대신에 연합군을 내륙 깊이 유인하여, 기갑부대로 전멸시키는 계획을 거듭 주장했다.

롬멜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공권인데 독일군이 연합군을 견제할 제공권이 사라졌으므로 기갑부대 역시 이동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적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구축하기 전에 해안에서 적군을 격파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을 종지부찍게 만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보다 설명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역사상 가장 많은 장병과 장비가 동원된 작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의 100여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이 상륙하기에는 매우 좋지 않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 나타나며 아직도 당시의 전투에 참여했던 장병들이 현장을 찾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거대한 전투가 앞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므로 학자들은 사상 최대의 재래식 전투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합군으로서는 필사의 작전이라고도 부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상 최대의 거짓말 작전이라고 불린다. 2차 세계대전을 운명지은 이 전투가 속임수가 난무하는 전쟁이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성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속임수의 대부였지만 한 차원 높은 거짓말을 사용한 연합군의 속임수 때문에 패배한 셈이다.

D-Day, 194466은 연합군의 유럽 탈환 작전 개시일이자 히틀러에게는 패망의 전주곡이 울려 퍼지던 날이다. 그 날 연합군은 치밀한 기만 전술 즉 거짓말 전술로 히틀러의 최정예 사단 18개 중 15개 사단이 나타나지도 않는 허깨비 군대를 대비하도록 함으로써 작전 지역에서 1백 마일 떨어진 곳에다 묶어 둘 수 있었다. 사실상 전사가들은 이 당시의 거짓말 작전이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연합군은 승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연합군이 상륙 지점으로 선택한 곳은, 센 만을 형성하고 있는 카부르와 발로뉴 사이의 노르망디 지역이었다. 연합군은 전함 5,000, 전투기 9,000, 23,000명의 낙하산병, 176천 명의 돌격 부대, 20,000대의 트럭을 동원하는 사상 최대의 작전을 구상했으나 문제는 독일의 반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질 즈음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많은 병력을 잃자 서부전선을 주력 방어선으로 정했다. 서부 총사령관이며 육군 원수인 폰 룬트슈테트는 휘하에 2개 군 60개 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에서 안트워펜, 노르망디, 비스케이 해안을 거쳐 지중해까지 포진해 있었다. 더구나 사막의 여우롬멜 장군이 연합국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노르망디 해변 상륙

독일군이 각지에서 패퇴하자 연합군이 곧바로 상륙해 올 것이라는 것을 독일군 지휘관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대응 방법은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병력을 약간 내륙 쪽에 유지하고 있다가 적이 상륙 거점에 정렬하기 전에 반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고 반면에 롬멜 사령관은 적이 어느 해안에 상륙할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적이 어느 해안에도 상륙하지 못하도록 병력을 전진배치 시키기를 원했다. 결국 히틀러는 두 사령관의 제안을 참작하여 타협안을 채택한다. 대부분의 보병전진배치하고 대부분의 기갑부대는 내륙에 후진 배치하는 것이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기갑부대가 전장에 곧바로 투입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합군은 그 목적을 위해 노르망디 지역의 상륙작전이 위장지역이라는 것을 히틀러가 믿게 하는 것이 최선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군 병력이 노르망디로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가지 술수를 썼다. 바로 영국에 진주하고 있던 대규모 연합군이 진격해 들어갈 곳은 노르망디가 아니라 파드칼레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사상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상륙작전이 놀랍게도 바로 연합군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상륙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59개 사단 중에서 7개 사단만이 노르망디에 있었고 18개 사단이 파드칼레에 주둔할 정도로 연합군의 거짓말 작전에 놀아났다. 더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막상 전개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연합군의 진짜 공격파드칼레에서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