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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여우, 롬멜장군(3)

Que sais 2021. 1. 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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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된 독일군 기만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66일 새벽 3시에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세르부르 반도 남동쪽의 후미진 곳인 이지니공습했는데 이것 역시 사상 최대의 위장 작전이었다. 공습3명의 낙하산병, 수백 개의 모조 폭탄, 매연을 뿜는 매연탄, 총성과 병사들의 고함, 군화발 소리 등이 녹음된 축음기와 증폭기 한 대 등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위장화력이 독일군 352사단 916 보병 연대를 본래의 위치에서 오마하 해변까지 물러서게 만들었다.

연합군에서 사용한 속임수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보다 확실하게 상륙지점이 파드칼레 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잠수함과 소해정, 수뢰정 등을 고의적으로 파드칼레 근처에 출현하도록 했고 전투기들로 하여금 그 곳 해변을 공습하기도 했다.

상륙작전이 개시된 이후에도 연합군은 파드칼레가 진정한 상륙지라는 속임수를 계속 시도했다. 작전 개시와 더불어 연합군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유포했다.

 

노르망디 공격은 독일군이 잘 막아내고 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 장군은 파드칼레 공격을 위한 병력의 일부를 노르망디에 투입시킬 계획이었는데 미국에서 신규 병력이 파병됨에 따라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제 연합군은 독일군이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병력이 분산되는 시기를 기다려 아이젠하워 장군의 공격 개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같은 메시지가 영국 국영 방송인 BBC와 무선 통신사들에도 배포되었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이 정보를 독일군에게 보내달라는 뜻이었다. 연합군의 예측은 어김없이 맞아 들어갔다. 전후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가르보라는 암호명을 가진 영국 통신사가 노르망디 작전 개시 4시간 전에 그 작전에 대한 정보를 독일군에 발송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특히 가르보의 메시지는 히틀러에게 즉시 보고되었고 히틀러는 69일 자신이 내린 명령을 다음날 철회했다.

이는 독일의 최정예부대를 노르망디로 급파하려는 계획을 철회하고 제15군이 파드칼레에 계속 주둔하는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독일 제15군이 48시간만 노르망디에 투입되지 않는다면 작전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일군의 작전은 그의 계획대로 움직여졌다고 후술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모습

사상 최대의 거짓말 작전은 수많은 인원이 참가했으므로 한 두 명으로 수훈자를 거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영국 정보부의 국외 첩보부 소속 물리학자인 R. V. 존스 박사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진다.

무선 전파와 작은 금속 조각을 붙인 기구(氣球)를 이용하여 독일군의 레이더를 혼란시킨 경험을 갖고 있었던 존스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장 아이디어를 실현에 옮겼다. 우선 존스팀은 위장 작전의 전 단계로 파드칼레의 레이더를 제외한 모든 곳의 독일군 레이더망을 파괴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파드칼레의 독일군 레이더 화면에 마치 수많은 전투기와 전함들이 그곳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종하자 독일군은 레이더에 나타나는 반점들을 연합군이 상륙한 대규모 부대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존스팀은 작은 금속조각으로 레이더 상에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이 방법은 현재도 미사일을 피하는 방법 중에 하나인 작은 금속조각을 발사하는 채프와 같은 원리이다.

물론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은 연합군의 기만술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사실 연합군으로서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 연속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항상 돌발적인 사고와 우연이 따라다니지만 독일군에게는 초기 대응에도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독일군 지휘관인 롬멜이 현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상륙 전날, 아내 루시에의 생일로 베를린에 있었다. 현장 지휘관인 요들 장군은 베르흐테스가덴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부하들이 그를 깨우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반면에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상륙작전을 보고 받고도 진짜 상륙작전을 펼치기 위한 위장 작전일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두 번째는 상륙 날짜를 잘못 예상한 것이다. 연합군이 상륙하기 가장 적합한 순간은 해가 늦게 뜨고 새벽에 썰물이 일어날 때였다. 그 조건에 알맞는 시기는 65일에서 7일 사이였다. 그런데 6월이 되어 날씨가 매우 나빠지자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합군은 예상을 뒤엎고 66일 아침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군을 발진시켰다. 때마침 날씨가 약간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상 예측을 정확하게 보고한 기상장교는 그 공으로 장군으로 진급하기까지 했다.

 

조립식 항만시설

여기에 세 번째 실수는 상륙군을 퇴치하는 데도 독일군 수뇌진의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속임수이고 이후 적의 주력부대가 다른 곳에 상륙할 곳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초반전에서 주력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상륙 작전의 승패는 상륙하자마자 교두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일인데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하자마자 반격을 가하여 바다를 등지고 있는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친 것이다.

더구나 가장 치명적인 것은 많은 기갑부대들이 히틀러의 개인적인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 지휘관들 사이에 작전상 혼선을 갖고 올 수 있다면서 자신이 직접 정예 사단의 작전을 명령하도록 체계화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연합군의 계교를 그대로 믿는 실수 때문에 기갑사단의 동원을 스스로 막는 악수까지 저질렀다.

결국 독일군의 반격은 기민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연합군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사상자의 규모만 따져도 연합군의 작전은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애초에 처칠은 작전 개시일 당일에만 2만 명의 병력이 손실될 것으로 추산했고 일부는 75천 명까지 예상했다. 그러나 D-Day 당일 9,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순간 이미 교두보를 확보했다.

611일에는 모든 상륙 거점이 연결되었고 612일에 이미 326,547명의 병력이 54,186대의 차량과 104,428톤의 군수품을 확보했다. 놀라운 것은 상륙 당일부터 마지막 날까지 연합군의 피해는 사망자 2,500, 부상자 또는 실종자가 91만 명 정도였다.

이렇게 교두보를 확보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빠른 속도로 진격했고 8월말에 이미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봉기로 파리가 해방되어 연합군은 유유히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롬멜 회유>

1944년 7월 17, 연합군이 상륙 후 양측 간에 전투가 한참 치열할 때, 롬멜의 전용차가 영국군 전투기의 저공비행 습격을 받아 길에서 탈선했다. 롬멜은 머리에 중상을 입어 이내 곧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8월에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집인 울름으로 돌아가 요양한다.

학자들은 이동안 롬멜이 다음 사실을 확신했다고 설명한다.

 

공습당한롬멜차량

이미 전쟁은 독일이 패배했으므로 연합군과 협상을 벌여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독일군과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고 또한 독일이 폐허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롬멜의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인 194479, 케사르 폰 호프아커가 라 로셰-기용에 있는 롬멜을 찾아왔다. 롬멜과 같은 슈바벤 출신인 호프아커1차 세계대전 때 중장으로 참전한 아버지를 통해 롬멜과 친분이 있었다. 롬멜은 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에게 할 말이 무엇인가?”

 

호프아커는 곧바로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의 히틀러 암살 계획과 베를린 그룹의 쿠테타 움직임,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의 계획들을 설명했다. 히틀러가 제거되면 서부 전선의 전쟁이 즉각 중단될 것이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철수한다. 그런데 이 일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롬멜과 같은 명망있는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롬멜에게 히틀러를 제거한 뒤 군통수권과 대통령직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이들 대화에서 롬멜의 반응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롬멜이 암살 계획에 동의하며 적극적 동참 의사를 밝혔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롬멜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히틀러에게 신속하게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추정한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현재 독일 부대는 각 전선에서 용감히 싸우고 있지만 중과부적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조속히 종결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선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의 입장에서 이에 관한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합니다.’

 

롬멜은 연합국과 휴전을 전제로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와 강경파들은 롬멜배신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여하튼 롬멜이 히틀러에게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히틀러의 미래를 예측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히틀러의 비서관 마틴 보어만1944927일 즉 롬멜이 자살하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폰 스퇼프나겔, 폰 호프아커, 이미 처형된 클루게의 친척 라스겐스 중령,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많은 피고인들은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 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 밝혔다고 한다.’

 

학자들은 롬멜이 폰 슈타우펜베르그 백작의 발키리 작전이 거행된 1944720일 직전에 히틀러의 쿠데타 음모를 보고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롬멜이 히틀러의 제거 계획을 사전에 알았지만 그가 그 일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는 데 모두 동감한다.

이는 롬멜의 성격과도 관련되는데 그는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의 살인을 옳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롬멜은 처음부터 히틀러를 암살하는 데 반대했는데 실제로 그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 온 호프아커는 히틀러 암살계획의 상세 부분을 롬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쿠데타팀원 중 한 명이 고문을 받다가 롬멜의 이름을 댄 것이 화근이었지만 독일의 자랑인 롬멜을 히틀러가 함부로 처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