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의 대명사 유대인 멸종(2)

Que sais 2021. 1. 2. 20:31

youtu.be/ZlIIiHU95V4

<대학살의 참상>

유대인은 대체로 기차로 실려 죽음의 수용소로 가기까지 게토라는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살았다. 독일군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게토의 주민들인 유대인들을 임의적으로 거주지를 옮기곤 했다. 그러므로 독일군이 게토의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시키는 것임에도 평소와 같은 거주지 이주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말을 순수하게 믿었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저항하기 마련이다. 이왕 죽을 바에는 마지막까지라도 생존을 위해 항거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바르샤바 게토 차단벽공사

그러나 독일군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현재 특수한 노동을 위해 차출되었고 그 임무를 위해 유럽 각지로 이송되고 있다고 선전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들의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든 요인이다. 그 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순순히 짐을 꾸려서 기차역으로 나선 것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독일 측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는 뜻이다.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는 과정도 철저한 사기극이었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노역 봉사새로운 곳으로의 이주를 위해서 이송되고 있음을 믿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귀중품뿐만 아니라 노동 수단이 될 만한 것을 함께 갖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기차에 오른 유대인들 중에는 의료 용구가 담긴 가방을 가져온 의사나 바이올린을 든 음악가, 심지어는 치과용 의자를 갖고 온 치과의사도 있었다. 그리스의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에 상점을 내주겠다는 독일 정부의 계약서를 갖고 나오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

유대인들의 짐 꾸러미 숫자를 하나나 둘로 제한한 것도 독일군의 기만적인 수법이다. 유대인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빵과 자유를 얻기 위한 거래에 대비하여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과 귀중품을 우선적으로 챙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하여 유대인들은 가방 속에 자신들의 전 재산을 갖고 나왔다. 유대인들로부터 재산을 강탈하는데 가방만 챙기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종착역에 도착하면 나치는 유대인을 보다 편리하게 수용소로 몰아 넣기 위해 여러 가지 기만술을 구사했다. 나치는 유대인 음악가로 하여금 막 도착한 기차역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고, 수용소 주변에 꽃을 심었다. 가스실로 몰아 넣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살균과 소독을 위해 목욕을 해야 한다.’

 

몸을 씻을 비누를 지급까지 하는데 누구라도 속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을 하기 전에 벗어 논 옷을 반드시 단정하게 갤 것과 다시 입을 때를 위해 신분증을 옷 위에 남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가스실은 극악무도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진짜 목욕실처럼 가짜 샤워기와 가짜 하수구를 설치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도착한 사람들을 당일에 가스실로 보냈다. 그러나 나치는 이 수용소를 임시 수용소라고 설명했다. 골드버그는 폴란드와 독일어로 쓰인 다음과 같은 표지판을 유대인들이 읽도록 했다고 적었다.

 

"바르샤바에 온 유대인 여러분.

이곳은 이동용 임시 수용소이므로 여러분은 곧 다른 노동 수용소로 이송될 겁니다.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의 옷과 소지품은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모두 소독됩니다. 귀금속이나 돈, 외환 등은 반드시 창구에 따로 맡기고 접수증을 받아야 합니다. 나중에 되돌려 받으려면 접수증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은 여행을 계속하기 전에 청결과 위생을 위해서 목욕을 해야 합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 책임자는 수용소가 임시 수용소처럼 보이도록 가짜 기차역 및 플랫폼을 건설했다. 또 플랫폼 건물은 가짜 창문과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었고 표 파는곳’, ‘대기실’, ‘안내’, ‘휴계실’, ‘열차 시간표 등 기차역에 있는 모든 시설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 사기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치는 한 번에 250명의 유대인이 16 평방미터의 가스실로 들어갈 때조차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이 수용소에는 30개의 가스실이 있었는데 하루에 25,000명까지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가고 있는 동안 이를 감시하는 독일군들은 이렇게 말했다.

 

빨리 빨리. 물이 식는다. 다른 사람들도 더운물을 써야 할 것 아닌가?”

 

이와 같은 교묘하게 계획된 절차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양처럼 순하게 나치 학살자들의 명령에 복종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의 저항이나 반란으로 골머리를 앓지 않으면서도 살육할 수 있었다.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모형

트레블링카 수용소19419월에 세워진 '트레블링카19427월에 지어진 '트레블링카가 있는데 이중 후자가 악명높은 절멸수용소. 트레블링카 II는 오로지 유대인 절멸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19427월부터 194310월까지 단 15개월간 운영되면서 8092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소 못미치지만 엄청난 숫자이며 19431020일 해체되어 사라졌다.

오로지 학살을 위한 목적으로만 건설되었고 엄청난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아우슈비츠의 악명에 가려 이 수용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나치가 수용소를 철저하게 비밀로 하면서 모든 자료를 인멸했기 때문으로 종종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 부른다.

 

<홀로코스트 배경>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지만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유대인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제재에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문제는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는 과거부터 내려온 뿌리깊은 전통으로 독일만의 실예는 아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많은 유럽인들이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이 살해되는 것에 대해서도 방관했다.

사실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나치의 대학살이 상당히 교묘하게 비밀로 이루어졌지만 이는 과거부터 내려온 소위 관습으로까지 비쳐질 정도였다. 바로 이 점에서 히틀러의 나치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중세까지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유럽 등지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정도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이후에도 이런 잣대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는데 나치 독일의 말도 대동사의하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그동안 평등사상으로 유대인에 대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어 유대인이 과거보다 상당히 보호되는 상태이지만 나치의 경우 아니올시다를 명백히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시각이 나치 독일만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로 그의 죄는 단 하나 프랑스의 장교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으므로 나치에서 공개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나치 수용소의 경우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해 증오를 나타낸 것은 분명하다.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

 

히틀러1939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이 서신이 보내지기 20년 전에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이 두 발언이 바로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데이비드 어빙 박사는 아주 명쾌하게 생각한다.

히틀러가 말한 베르니슈테트(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군사적으로 보아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므로 몰살이라는 뜻과는 달라진다는 내용이다.

 

트레블링카의 학살현장

이것이 매우 중요한 논란이 되는 것은 이런 특이한 상황의 경우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히틀러가 적어도 유대인을 절멸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추방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히틀러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 등이 반대하여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을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물론 갑자기 척박한 환경으로 내몰리면 그 자체가 학살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나치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유대인 학살 공장이 돌아가게 한 것은 독일의 관료 즉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교통부, 체신부, 동유럽부, 선전부 등 거대한 독일 관료 기구 전체가 이 절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법무부는 학살당할 유대인의 범위를 정의했고, 경제부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는데 몰두했고 내무부는 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을 체포했다. 교통부는 독일이 관할하는 지역에 있는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홀로코스트 기계가 돌아가는데 모두 반유대주의로 무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가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라는 특이성과 결합하여 전대미문의 대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았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