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의 대명사 유대인 멸종(3)

Que sais 2021. 1. 2. 20:39

youtu.be/FpV176GoKfI

<나치의 홀로코스트 배경>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패전국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모든 식민지잃었고 독일 경제는 승전국에 대한 배상금 문제 등으로 파멸에 이르렀다.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초인플레이션 등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초 인플레이션(봉급으로 받은 지폐 더미)

그런데 독일의 이런 악재의 불똥반유대감정으로 뛰었다. 사실 반유대감정기독교가 태어난 이후부터 등장했는데 이는 기독교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사탄'으로 규정했고, 자신의 나라 없이 전 유럽 대륙에 퍼져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 융화되지 않았고,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선민사상과 함께 이질적인 유대인 독자의 문화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알려지기는 히틀러가 원래 반유대주의는 아니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가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제1차세계대전이 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당대에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원인유대인이라는 주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떠돌던 음모론의 일환인데 핵심은 독일이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비수를 뒤에서 맞았다는 뜻의 비수 전설이라고도 하는데 그 큰 배후가 유대인이라는 주장이다.

여하튼 독일의 엄청난 고난의 시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929,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더불어 러시아가 공산화된 것도 큰 소재였는데 이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로 설명된다. 더불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원로들의 의정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나치 치하의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전쟁터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니라 나치 제국 내에서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라는 점이다. 일부 학자들은 유대인을 특별히 지목한 것은 유대인들이 소유한 경제권과 상권, 자금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고도 설명된다. 단적인 예로 유대인들이 살던 집을 빼앗아서 독일인에게 분배한 것은 작은 단편 중 하나다.

여하튼 히틀러가 집착한 것 중 하나는 아리아계 독일인만으로 유럽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이의 걸림돌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유럽다운 유럽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불행하게도 나치의 기본 정신 이념이 되어 유대인 말살의 명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소 의아한 일이지만 나치당원 중에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유대인 부르주아 계층좌파 논리로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

 

여기에 덤으로 들어간 것이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도 학살에 포함된다.

엄밀하게 이들에 학살은 유대인과 관련없으며 독일인도 관련된다.

그러나 나치에 행해진 홀로코스트라는 면에서는 같은 맥락이므로 같은 범주에 넣어 설명된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라는 점이다.

나치당이 이들을 지목한 것은 일반인들에 비해 이들에게 과대한 복지 비용이 든다는 것을 걸고 넘어졌다.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등으로 낭비되는 재원이야말로 사회적 병폐나 다름없으며 장애인들이 도태되면 그들의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는 발상이다.

장애인 제거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를 시켰는데 이때 장애의 정도나 종류에 관계없이 시행되었다.

2003에 공개된 극비문서에 따르면 나치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된 다음해인 19401월부터 19418월까지 독일 각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 275천 명을 모두 학살했다. 위대한 독일을 건설하는데 장애가 되는 소위 불량품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장애인 제거 프로그램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반면 집시를 배제하는 것은 과거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질시를 받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집시 자체가 국가 없이 떠돌아다니므로 어느 곳에서나 말썽을 일으킬 요인이 있다며 나치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박해받았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집시

 

특히 독일에서의 집시 박해는 매우 유명한데 1899년부터 1933년 나치가 등장하기 전에 독일은 집시들이 공공 장소에 접근하지 못하게하는 것은 물론 정착 장소도 제한했다. 다소 놀랍지만 그들은 수영장이나 공원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경찰은 이유없이 집시를 체포할 권리가 있었다. 한마디로 집시가 감옥에 있어야 나라가 편하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을 정도다.

그런데 나치가 정권을 잡자 상황은 보다 나빠졌다. 집시들을 통제할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나치는 그 이유로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1936년 독일의 <인종위생 및 인구생물학 연구센터>로버트 리터 박사집시들을 조사한 후 독일 인종 순결에 위험을 초래하는 퇴행성혈액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리터박사의 집시 조사

곧바로 집시들의 시민권, 독일인과의 혼인 불가, 투표권을 박탈한 후, 불임 시술을 단행했다. 그런 다음 집시를 유대인과 함께 게토를 거쳐 강제 노동 또는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특히 194212 , SS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모든 집시들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라고 명령했는데 목표는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집시들을 절멸시키는 것이다. 러시아를 독일이 통제할 때도 집시들이 대량 학살되었는데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나치에 의해 희생된 집시들은 거의 80만 명에 달한다.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1/4로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194482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고 한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한편 독일인 동성애자들을 배척한 것은 전통윤리적개념에 따랐다 볼 수 있다.

나치는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이 번식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동성애자들은 번식자체의 행위를 피하는 부도덕으로 보았다. 독일에서 동성애자 제거는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44년까지 약 10만 명이 체포되어 15,000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어져 이중 6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로 희생자가 된 사람들은 5,000명에서 10,000명 사이로 추정한다. 물론 자료에 따라 15,000명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런데 동성애자는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는 유럽만 아니라 세계의 사회적 시선이라 볼 수 있는데 당시 영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신이라 볼 수 있는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다소 놀라운 것은 동성애자들은 종전 이후에도 해방되지 않고 오히려 동성애자라는 이유서독, 동독 정부에 의해 다시 수감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성애자 처벌법 때문으로 이 법은 1969년에 사문화됐고 1994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독일 정부2002, 비로소 동성애자들에게 사과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3제국의 홀로코스트 진행>

학자들은 히틀러가 원래 반유대주의는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무는 동안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흡수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종론에 바탕을 둔 반유대주의가 득세했는데 당시 독일인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후 패전과 독일이 겪은 모든 수모 즉 고난의 행군 책임을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그러므로 히틀러도 19199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할 무렵에 이미 히틀러반유대주의에 물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 히틀러 정부가 패전과 혁명, 정치 위기, 극심한 사회적 빈곤을 초래한 것이 유대인이라고 지목했는데 엄밀하게 말하여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히틀러 뿐만 아니라 상당수 독일인들이 유대인에 유난히 부자가 많고 경제를 장악하여 해악을 끼치며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것이 확대되어 결국 유대인은 종자가 다르다는 결론이 유도되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 제거는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고 직업공무원재건법에 의해 비아리안 공무원 즉 유대인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참전용사나 유가족은 추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계속되어 유대인 예술인도 독일 예술시장에서 추방당하며 유대인 신문 편집자를 해고하는 행정명령이 발표된다. 이후 유대인들이 기업의 소유나 이사직을 금지하는 법안 등이 공표된다. 1935년에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시행되어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혼인이 금지되고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유대인상점에 불매운동을 촉구하는격문

그러나 나치당 과격파들은 법령이 공포되기 이전에도 대규모로 일어나 유대교 회당 파괴, 유대인 살해, 유대인 상점 습격, 유대인 상점 불매 운동 등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 박해가 처음부터 인종 학살을 통한 유대인 절멸이 목표는 아니었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반유대주의 폭력이 확산되고 갈수록 과격해지었지만 전쟁 발발 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여러 가지이다. 특히 나치는 독일에서의 유대인을 제거하는데 멸종이 아니라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 즉 마다가스카르 등으로의 이주를 수립했고 실제로 약 20여 만 명을 추방했다. 이 프로젝트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것은 영국 등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를 보더라도 유대인의 인종 청소는 처음부터 시도된 것은 아니라 볼 수 있다.

여하튼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처음 반유대인 운동은 히틀러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초창기 반유대 운동은 독일인들이 알아서 유대인 탄압을 이끌고 주도하고 밀어붙였다. 그런데 1939.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정권은 보다 적극적으로 유대인 제거 작전에 들어간다. 유대인이 독일의 작전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막강한 자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똘똘뭉쳐 적군과 연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유대인에 대한 인종정화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1940년부터 유대인 전용의 게토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게토는 1941년까지 건설되고 194112. 3제국의 나치가 유럽 속의 유대인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도 친위대의 핵심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추방령을 등에 업고 유대인 박해를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

19426월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추방하는 프로젝트의 틀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유명한 홀로코스트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등 학살 수용소로의 이송이다. 한마디로 최종 해법으로 조직적 대량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