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의 대명사 유대인 멸종(4)

Que sais 2021. 1. 2.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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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유대인인가>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나치의 유대인 배척운동이 한창일 때 나치의 핵심인 헤르만 괴링이 한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은 매우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는데 이는 제거해야 할 유대인이 대체 누구이냐이다. 한마디로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각국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 모두 하나의 잣대로 유대인을 단정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무위키>는 매우 적나라하게 실예를 들어 설명했다.

유대인 소년 한스는 부모가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인으로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았으며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교사가 다음날 골상학적과 유전학적 측면에서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인종인지를 설명하겠다고 했다.

한스는 겁이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 당장 소문으로만 들리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학교를 가지 않으면 그것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하므로 한스는 다음날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은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다. 측정이 끝나자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으로 매우 우월한 혈통이다.’

 

훗날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였고 동부 전선에서 복무한 후 무사히 군복무를 마쳤다.

 

베르너 골드베르크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루터파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를 둔 1/2 유대인인데 193812월 독일군에 입대하여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이때 군에서 찍은 사진이 이상적인 아리아인 병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모병 포스터에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골드베르크1단계 혼혈 유대인을 군에서 추방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제대 처분되었고, 입대 전에 일하던 의류 회사에 복직했다. 개종한 순수 유대인 아버지는 결국 전쟁 중에 죽었지만 그는 나치가 여러 면에서 면죄부를 주어 유대인 제거 명령에도 살아남아 자식 셋을 얻고 2004년에 사망했다. 가장 이상적인 아리아인으로 선정되었는데 유대인으로 처형한다면 그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코미디는 1935년 베를린에서 일어났다.

1935년 베를린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 선발대회가 열렸는데 요제프 괴벨스 선전상이 직접 우승자 아기를 선정했다. 부모에게는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실렸다.

 

1935년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는 유대인 혈통이다. 아이의 이름은 헤시 레빈슨으로 부모는 당시 베를린에 유학하러 온 라트비아계 유대인 성악가 커플이었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란색의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았는데 간 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 아이를 참가시켰다.

사실 유대인인 그들도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은 전혀 몰랐다. 진상은 헤시 레빈슨을 찍은 사진 작가가 부모 몰래 대회에 사진을 보낸 것인데 놀랍게도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부모는 유대인이므로 이를 사진작가에게 실토했으나 사진작가가 당초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나치들을 놀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반골도 있다는 뜻인데 여하튼 가장 완벽한 아리아인으로 헤시 레빈슨이 선정된 것은 사실이다.

1938아이의 부모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으나 이때 그들이 유대인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탈세 문제로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괴벨스히틀러도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헤시 레빈슨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는 다행하게도 홀로코스트가 심해지기 전 독일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갔는데 곧바로 나치의 프랑스 침공 이전에 쿠바로 이민을 떠났고, 거기서도 공산 혁명을 운 좋게 피해 미국으로 옮겼다. 헤시 레빈슨은 미국에서 자라 뉴욕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근무하다 은퇴했다. 인생에 억세게 운이 나쁜 사람도 있지만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도 태어나기 마련이다.

이 말은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상당수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 유대인 중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라는 거대한 제도가 중요시되면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진 것도 한 요인이다.

문제는 당대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각가지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 중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본다는 경직성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꼼꼼하게 따져서 판정하면 유대인으로 판정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이 있었음에도 이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므로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100년 전 선조라 해도 이미 개종하여 유대교인이 아니고 문화적으로 볼 때 유대인이 아닌 유럽인으로 잘 적용하고 있었으므로 자신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나무위키>이런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룬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를 예로 다루었다.

유대인의 나이 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고 아들이 경고했다. 자신은 1차 대전 때 히틀러와 함께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이므로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며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반대한다. 결론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

이 경우 그는 1차 대전 때 참전 경험을 토대로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했다. 유대인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보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자부한 것이다.

이런 정서는 19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어 헤르츨조차 젊을 때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서 중부유럽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하여 선진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가스를 개발하여 연합군에 치명상을 준 노벨상 수상자 하버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독일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독일의 군수력 증진에 총력을 다했다. 그가 독가스를 개발한 것은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마우스(쥐)에서 아우슈비츠에서 한 수감자가 외치는 말을 적나라하게 적었다.

 

나는 저 유대인과 서 있을 수 없소! 나는 독일인이란 말이오! 내 아들은 독일군이고 나는 독일 황제에게 훈장도 받았소!’

 

그의 이런 항의에도 불구하고 경비병은 그를 살해한다. 아우슈비츠에 수백만 명이 수용되었으므로 이런 일반 독일인 죄수들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살해된 유대인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표현해준다 볼 수 있다.

 

아트 스필그만의 마우스(쥐)

 

여기에서 유대인은 두 가지로 나온다. 첫째는 쥐 즉 유대인이고 둘째는 고양이 즉 독일인이다. 그런데 그가 살해당한 이유는 간단하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그는 독일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독일에 이와 같이 생각하는 유대인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서구 문화권 국가 전반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지만 근대 초중반까지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독일 문화권이 유대인들이 터 잡고 살기에 유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부터 독일의 유대인들은 독일 사회로 적극적으로 진입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19세기 초부터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이와 같은 독일의 조처는 인종적 관점에서 관대해진 것이 아니라 성장한 유태계 상인과 중산층들을 다독거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본의 요네하라 마리 박사가 바로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독일 문화권이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 사회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 문화권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정착하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회에 정착하면서 국가에 대한 소속감 역시 가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독일 주류 사회로 입장하는 최종 관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이 개종하고 법학자가 되거나 작위를 받은 판사가 배출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유태인이라는 자각 없이 자신은 혈통은 유태인이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자신이 충성했던 독일에 의해 갑자기 홀로코스트 대상이 된 경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어느 경우나 인간적인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나치 고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지인유태인일 경우 학살에서 빼주는 것이 다반사였다. 히틀러의 경우도 자신의 어머니를 치료해준 유대인 의사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1940년까지 히틀러가 특별 보호를 조처 했다. 히틀러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

 

물론 블로흐는 유대인 탄압이 거세지자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그의 재산을 모두 갖고 있을 정도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또한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신의 상관인 에른스트 헤스(Ernst Moritz Hess)를 특별히 봐주었다. 나치 당원 초기부터 함께 지내던 에밀 마우리스(Emil Maurice) 또한 유대인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힘러의 반대에도, 자기가 직접 명예 아리아인 칭호를 주었다.

여하튼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단 한 번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인들이 하루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했다는 것이 비극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나치처럼 무조건적 말살을 당연시한 사례가 없었다는 것이 비난받는 핵심이라 볼 수 있다. 학자들이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Porajmos : 잊혀진 집시 홀로 코스트 무시되는 세계, 마크 올리버, ATI, 2018.05.31.

홀로 코스트를 잊지 말아야합니다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은 변할 것입니다, 에르 나 파리, 글로브 앤 메일, 2020.01.25.

집단학살, 위키백과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나무위키

https://historycollection.com/32-photographs-porajmos-romani-gypsy-genocide/

홀로코스트, 나무위키

미래 속으로, 에릭 뉴트, 이끌리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