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1)

Que sais 2021. 1. 4. 12:59

youtu.be/LCVeEAQD8r4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의 대명사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이지만 나치 독일에서 운용한 수용소는 이곳뿐이 아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라면 아우슈비츠를 꼽는 이유는 당대 가장 큰 수용소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홀로코스트 설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기반으로 설명한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지 얼마 안 되는 19406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이다. 당초 지명은 유대어로 '손님'이란 뜻의 오시피친(Oshpitzin)에서 유래됐다. 800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유대인들과 인연이 깊다. 16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술을 빚고 옷을 만들어 팔며 뿌리를 내렸다. 17세기 합스부르크 왕조시대엔 유대 지식인들의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다. 도심 한복판에 회관과 예배당인 시나고그가 들어설 정도로 유대교가 번성했으며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젊을 때는 대도시가 좋지만 죽을 때는 오시비엥침을 찾아야 한다는 속담이 퍼질 정도였다.

 

아우슈비츠 입구

2차 세계대전 직전엔 주민 12,300명 중 7,000명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아우슈비츠로 이름을 바꾼 뒤 수용소가 들어서자 유대인은 자취를 감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맨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대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던 폴란드인들이었다. 이 당시는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지만 수용소측은 아우슈비츠가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었다. 나치 친위대(SS)대장이자 수용소를 책임지고 있던 카알 프리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요양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독일 집단 수용소에 들어왔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굴뚝밖에 없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철조망에 몸을 내던질 수도 있다. 수송돼 온 사람가운데 유대인이 있으면 그들은 2주일 이상 살 권리가 없다.’

 

나치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모두 살해된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아우슈비츠에서만 약 150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해방된 사람들도 7,600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이들의 진실된 이야기는 봇물처럼 계속 발표되었다.

미국 1995118일자 <뉴스위크>지에 제리 아들러 기자가 작성한 기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보다 생생한 내용을 알려준다.

 

‘17세의 리타 얌베르거와 그녀의 언니 베르타 모르간스턴, 그리고 베르타의 두 자녀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기차에 타고 있었다. 칸마다 80명씩 비지땀을 흘리며 나흘 밤낮을 서 있었다. 양동이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먹는 물이고, 나머지는 변기였다.

열차가 한밤중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고 얼마를 기다린 후 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은 줄을 서 선별검사를 받았다. 그들은 5명 단위로 번쩍거리는 군화와 빳빳한 흑색 친위대 복장차림을 한 요제프 맹겔레의 곁을 지나 행진했다. 노인, 환자, 어린이, 애엄마들은 왼쪽에 서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른쪽에 섰다. 얌베르거는 당시를 회상했다.

 

"언니는 내가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라고 내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주었고, 나는 조카 손을 잡고 엄마 행세를 했다. 우리는 모두 왼쪽으로 갔다. 흩어지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누가 내 어깨를 만졌다. 바로 멩겔레였다. '자네 몇 살인가'라고 그가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최면에 걸렸다. 조카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만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는 조카를 밀어버렸다. 걔는 넘어졌고, 나는 오른쪽으로 떠밀렸다. 그 덕분에 시체 소각장행 신세를 면한 것이다."

 

수용자 이동 나치 열차

식구들끼리 흩어지지 않는 가족들도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동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될 당시 14세였던 글로리아 리온12세 여동생 아노슈카가 처음에 노인과 어린이줄에 보내졌는데, 몰래 다른 줄로 들어와 가족들과 재회했다고 돌이킨다.

 

"어머니는 아누슈카의 그런 행동을 나무랐다. 우리는 노인들이 애들을 보살피고 우리 그룹은 힘든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자

부모에 대한 불복종이 그처럼 후한 보답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자매는 모두 전쟁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열차에서 내리는 희생자들을 가스실까지 안내하는 동료수용자들이 자기 목숨을 무릅쓰고 젊은 애 엄마들에게 아기를 나이든 친척들에게 맡기라고 속삭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말에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헬렌 파르카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 언니 에텔은 '저사람 미쳤어? 내 자식을 노인한테 주라는 게 무슨 소리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시어머니가 애를 안고 왼쪽 줄로 가버렸다. 애텔이 그 줄에 끼려하자 경비병들이 못 오게 두들겨 팼다. 작업조로 뽑힌 자매는 강제로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박박 깎였다. 헬렌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모두 벌거벗고 머리털이 없어 알아볼 수 없었다. 마침내 서로 찾아낸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너무나 미친듯이 웃다보니 나중에는 울음이 나왔다.’

 

작업조로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깎이고, 왼쪽 팔뚝에 죄수번호를 문신했으며, 제복과 밥그릇·스푼을 지급받은 뒤 막사로 내몰렸다. 수백 명이 3단 침상에서 잤다. 신입수용자들은 고참 폴란드·체코 유대인들의 놀림을 받았다.

 

고참들은 우리보고 '너희들이 극장 구경을 할 때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헝가리의 한 마을에서 아우슈비츠로 끌려온 유디 페를라키의 말이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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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수용자들은 점호, 구타, 노동, 그리고 전격적으로 벌어지는 가스실행 선별 등의 생활을 시작했다. 나치는 열차가 도착하지 않은 날에도 가스실을 놀리지 않았다. 점호는 하루에 두 번씩, 항상 밖에서 이뤄졌다. 수용자들은 점호가 끝날 때까지 차렷 자세로 서 있었는데 어떤 때는 몇 시간씩 계속되곤 했다. 수용소에 만연한 이질에 걸리지 않은 사람한테도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수용자들의 아침식사는 대용 커피, 점심은 묽은 수프, 그리고 저녁은 200여그램 정도의 빵이 전부였다. 야외에서 중노동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먹고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생존자는 이론상 추가 식량을 구해 먹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많은 생존자들이 신참들의 소지품을 꼼꼼하게 분류해 꼬리표를 달고, 기록하고, 저장하는 곳에 근무하며 도둑질을 했다. 창고는 모두들 따뜻한 양말을 신고 담배를 피운다는 꿈나라 이름을 본떠 캐나다라고 불리웠다.

1942년부터 아우슈비츠에 수용돼 있던 독일 유대인 지기 빌치크는 수용소에서 모두들 탐내는 자리에 배치됐다. 캐나다 창고를 정돈하는 일인데 그는 두루마리에 모두 딱지를 달고 독일인들이 원하는 대로 차곡차곡 정돈했다. 그러면서 두루마리 통 속에다 반지나 시계 등 식량과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귀중품들을 채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