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전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2)

Que sais 2021. 1. 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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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피해

나치는 유대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손을 대지 않는다고 천명했지만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는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죽음의 수용소는 유대인 학살을 용이하게 만든 방법인 동시에 그들의 돈과 귀중품을 모두 빼앗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들은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빼앗겼다. 우선 강제 수용소의 하급 경비원카포라는 모범수로 구성된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소지품을 조사한다. 유대인 가운데는 토지와 가옥의 몰수를 예상하고 재산 모두를 보석으로 바꿔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몰수된 귀중품은 수용소 본부의 특별위원에게 넘겨지고 전문가에 의해 선별된다. 유대인이 좋아하는 금시계나 백금시계, 다이아몬드나 루비와 같은 보석은 물론 현찰도 적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몸에서 수만 파운드의 돈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스실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고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시체에서 금니와 백금을 뽑았다. 금니 정도를 뽑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계산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티끌모아 태산이 된다는 말같이 작은 금니가 금 막대기로 둔갑해서 매월 친위대 위생국으로 보내졌다.

금니를 시체에서 뽑은 것은 1925년 독일의 한 의사가 <시체가 지닌 금>이라는 논문에서 금니를 시체와 함께 매장하는 것은 낭비라며 시체로부터 금니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체에서 금을 빼는 것을 혐오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체 해부가 당연시되고 있는 점도 상기시켰다. 게다가 금을 재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모든 시체를 소각하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의 논문은 발표와 동시에 독일에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고 유대인이 죽어서 금을 갖고 간다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까지 퍼져 있었다.

 

유대인 상점의 불매운동

그러나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빼앗은 재산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히틀러는 1933년에 정권을 잡자마자 유대인들의 재산을 계획적으로 약탈하려는 작업에 착수했다. 19334월 독일인들은 유대인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살 수 없도록 하는 등 유대인 배척 운동을 제도화했다. 193811월에는 독일계 유대인을 재계에서 몰아내고 유대인 사회에 집단 벌금 10억 마르크를 부과한 법령이 공표됐다. 이어 유대인 소유의 상점, 기업 39천 개 가운데 80%가 독일인에 의해 접수되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박해를 예상하고 해외로 탈출하려고 했지만 나치는 독일을 빠져나가려는 유대인에게 현금을 지닐 수 없도록 조치했다. 독일을 떠나는 유대인은 10마르크 이상 들고 나갈 수 없었는데 이것을 달러로 환산하면 2.5달러에 불과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나치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경제적은 물론 육체적으로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나치에 압류된 결혼 반지

독일 은행은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금시계, 금귀걸이 등 재화로 익사할 정도였다. 은행측은 1942년 전리품을 현금화하기로 결정하고 베를린의 전당포에 그것들을 저당 잡혔다. 그러나 1944년 전당포는 모두 유대인들로부터 약탈한 물건으로 흘러넘치자 더 이상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치가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재화가 얼마나 되는가하는 질문은 종전 뒤 나치의 전쟁 배상금을 산정한 기준으로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의 경제적인 손실은 당시 기준으로 120억 달러에 달했다.

1950년대에 구 서독은 나치 독일에 의해 희생된 50만 명의 유대인에 대한 명예 회복과 약탈에 대한 배상금으로 1인당 평균 3,000달러, 150억 달러를 신생 이스라엘에 지급한다는데 동의했다. 독일이 통합되기 전의 구 동독도 구 소련이 붕괴하자 비로소 자국 내에서 자행된 물리적 파괴 행위에 대해 일부 배상한다는 데 합의했다. 유럽의 유대인들이 입은 손실에는 수백만 명의 인명 손실뿐만 아니라 수천 개의 유대인 공동 사회가 입은 손실도 포함된다

 

<세계의 제노사이드>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 학살이 워낙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와 유사한 집단 학살이 나치 독일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의 자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소련인들은 약 3,0004,000, 중국인들은 약 2,300만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이 문제는 미국에도 비화된다.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이 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전세계에서 일어난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 언론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던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다소 다른 시각으로 홀로코스트과대평가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설명된다. 과거 공산화된 동독의 경우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여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무려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부풀렸다고 지적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수용소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지만 대체로 300만 명보다 적은 150만 명으로 알려진다.

가장 중요한 지적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 즉 대량학살을 자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강조하느냐이다.

 

스탠리의 콩고 주민 학살

사실 홀로코스트를 나치의 학살만이 아니라 제노사이드로 범위를 넓히면 그야말로 누가 누구를 비난할 상황이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에서 자행한 것은 물론 벨기에레오폴드 2세와 스탠리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학살(끄새이야기-천사와 악마의 만남, 리빙스턴과 헨리 스탠리)에 의한 희생자는 나치의 만행에 의한 유대인 희생자보다 더 많은 1,5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밖에 나라인 소련, 중국, 미국, 터키, 폴란드, 이라크 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이런 모순을 지적한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

 

이런 이유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세계적 영향력 때문임은 물론이다.

홀로코스트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인 유대인이 미국에서 강한 경제적 영향을 행사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며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 등 여러 굵직한 식민제국들은 현대에도 선진국이거나 강대국으로서 강한 지위를 행사하고 있다. 반면에 피해국들은 거의 대부분 약소국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학자들의 지적은 분명하다.

홀로코스트가 인류역사에서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홀로코스트가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다는 점이 분명하므로 수없이 많은 다른 학살 역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폴 포트로 이에 대해서 별도로 설명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비젤은 매우 간결하게 발언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여담으로 근래 매우 특이한 히틀러에 대한 주장이 발표되었다.

히틀러유대인을 지목한 홀로코스트를 만든 이유가 유대인 여성으로부터 매독이 옮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영국 정신병리학가인 바셈 하비브 박사는 유대인 학살이 게르만 우월주의에 의한 것이란 통설과는 달리 히틀러의 병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하비브 박사는 독일 베를린도서관에 소장된 관련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히틀러가 악성 매독을 앓았던 사실을 찾아냈다. 더불어 그가 1908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화류계 여성과 관계를 맺어 병을 얻었는데 히틀러의 주치의 테오 모렐의 일기에서도 그가 매독에 걸렸으며 이로 인해 히틀러가 생리적이나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모렐의 일기를 보면 히틀러는 전형적인 매독 증상으로 피부 손상과 파킨슨병, 극심한 정서불안, 조울증과 편집망상 등으로 모두 신경성 매독의 말기 증세에 해당한다.

당시 의료 여건 하에서 히틀러는 부적절한 치료를 받았고 이는 결국 그를 미치광이로 변하게 해서 전대미문의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명령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비브 박사는 히틀러가 비교적 젊었을때 성병에 걸렸지만 매독은 일생동안 생리적, 심리적 영향을 가했으며 매독 예방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Mein Kamf)에서 무려 13페이지에 걸쳐 매독의 폐해 등에 관해 언급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히틀러가 다음과 같이 유대인과 매독을 연계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질병인 매독에 대항하는 것이 우리 독일 민족의 사명이다. 유대인을 소멸시켜야만 독일 국민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하비브 박사히틀러매독이 유전질환으로서 유대인의 몸을 통해 전파되는 것으로 맹신했다며 이러한 그릇된 성병 지식이 결국 전세계의 유대인을 말살해야한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독침과 독화살」, 캐시 뉴먼, 내셔널지오그래픽, 2005년 5월
『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 강준만, 인물과 사상, 2004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바다출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