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독가스실(1)

Que sais 2021. 1. 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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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 전용으로 변형>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가스실을 운용하여 사상 최악의 장소로 변모하게 만든 장본인은 하인리히 히믈러이다. 19416,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 소련군 포로들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지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이곳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비르케나우 즉 실제로 가스실이 있었던 장소에 죄수들로 하여금 거대한 2단지를 세웠다.

대다수 소련군 포로들이 사망하자 악명 높은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럽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장소로 결정했다. 아우슈비츠에 독일이 점령한 각지로부터 유대인이 실려 오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특히 게쉬타포에게 붙잡힌 유대인들은 곧바로 아우슈비츠로 향했으며 대부분이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행했다. 가스실로 직행하지 않은 사람들도 강제노동, 구타, 질병, 기아 등으로 6개월을 넘기지 못했으며 하루에 9,000명이 살해된 적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 출발

열차에서 내리는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데려가고 그들 시신을 시체 소각로로 끌고 가는 일을 한 만델바움은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전했다.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면 탈의실에서 옷을 벗게 했는데 그들은 샤워하는 줄 알고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곤 했다. 가스실이 절반이상 찰 때쯤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동요가 일지만 경비원들이 몽둥이로 마구 갈겨댔다. 가스실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체코 국가를 부른 집단도 있었으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장병들의 증언은 더욱 충격적이다. 아우슈비츠에서 3년 동안 근무했던 필리프 뮐러아우슈비츠의 목격자들 : 가스실에서 보낸 3』에서 독가스 처형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 명의 나치 친위대원들이 입구 양쪽에 자리 잡았다. 나머지 나치 친위대원들은 사냥터의 몰이꾼처럼 고함을 지르고 곤봉을 휘두르면서 나체의 남자, 여자, 아이들을 소각로 안에 있는 큰 방으로 몰아넣었다. 나치 친위대원 몇 명이 밖으로 나왔고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은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다. 얼마 후 문 뒤에서 기침 소리, 비명 소리 도와달라며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략) 얼마 지나자 소리는 점점 미약해졌고 비명은 멈췄다. 갑작스레 고요가 찾아오자, 우리들은 각자 이 끔찍한 집단 죽음에 두려움을 느꼈다. (중략) 소각로 안이 완전히 잠잠해지자 평평한 지붕에서 토이어 하사와 슈타르크 하사가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목둘레에는 가스 마스크가 걸려 있었다. 그들은 통조림처럼 생긴 직사각형의 상자들을 내려놓았다. 각각의 통에는 해골 그림이 그려진 독극물 표시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저 끔찍한 의심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 확실해졌다. 소각로 안으로 들어간 저 사람들이 독가스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정치부에서 복무했던 수비대원 페리 브로트 하사의 증언도 있다. 그의 독가스 처형과정은 보다 정확하다.

 

소독기가 작동했다. 그들은 철봉과 망치로 무해하게 보이는 깡통상자 두세 개를 열었다. 취급 설명서에는 사이클론 버민 디스트로이어. 경고. 맹독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상자 속에는 파란 콩처럼 생긴 작은 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상자를 개봉하자마자 곧바로 지붕에 난 구멍으로 내용물을 털어 넣었다. 그 다음은 옆에 있는 구멍으로 상자 하나를 또 비워 넣었다. 그렇게 몇 차례 계속되었다. 2분 정도 지나자 비명 소리는 잦아들고 낮은 신음 소리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의식을 잃었다. 2분이 더 지나자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중략) 시체들은 서로 포개져 쌓여 있었고 입은 크게 벌어져 있었다. 가스로 인해 사지가 모두 뻣뻣해졌기 때문에 서로 뒤엉킨 시체들을 들어 올려 가스실 밖으로 옮기기가 힘들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의사 요한 파울 크래머 박사도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4292일 오전 3. 이미 내겐 사람들을 독가스로 처형하는 활동에 참여할 임무가 주어졌다. 이런 집단 처형은 비르케나우 수용소 밖 숲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이루어졌는데 나치 친위대원들은 저희들끼리 그 오두막을 벙커라고 불렀다. 수용소 내 근무 중인 모든 나치 친위대 군의관들은 독가스 처형에 참여하기 위해 교대 근무를 했는데 이를 특수 활동이라 불렀다. 거기서 의사인 내가 맡은 역할은 벙커 근처에서 대기 상태로 있는 것이다. 나는 차를 타고 거기로 갔는데 만에 하나 독가스 처형에 투입된 나치 친위대원들이 독성 증기를 마시고 쓰러질 경우 소생시킬 산소 장비를 갖고 있었다.

처형될 사람들이 철로 비탈길로 이송되어 오자 나치 친위대 장교들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 중에서 일할 만한 사람들을 골랐다. 나머지 노인들, 아이들, 아이를 팔에 안은 여자들, 기타 일하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가스실로 향했다. 사람들을 막사로 들여보내 옷을 모두 벗게 하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들여보냈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이를 제거할 거라는 말로 사람들 입을 다물게 했기 때문에 별다른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모두 가스실로 몰아넣고 문을 잠그자 가스 마스크를 쓴 한 나치 친위대원이 치클론 통 속 내용물을 벽에 난 구멍으로 던졌다. 구멍을 통해 희생자들의 외침과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외침은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폴란드 크리니카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194212게슈타포에 체포되었던 스테판 포후펙은 악명 높은 비르케나우에 수용되었다. 그는 1943년 수용소 밖의 철도역에서 가스실까지 직접 연결되는 철로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을 처리하는 작업반에 배치되었다.

 

모두들 가스실에 대해 알고 있었지요. 한 번은 여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 두 대를 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기도하고 있었고 어떤 여자는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모두 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그 뒤에는 장작을 가득 실은 트럭 두 대가 따라 갔습니다. 치클론 비를 사용해 그 여자들을 죽인 후 벌거벗은 시체를 밖으로 끌어 내 구덩이에 던져 넣은 후 불살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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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독가스는 지클론 B라고 부르는 결정성 분말 형태의 청산가스였다. 이 가스는 희생자의 폐를 마비시켜 질식사시키는데 지클론 B를 마시며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가 살아남은 사람이 단 한 명 있어 그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소피아 리트빈스카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가스실에 투입되어 가스 처형을 받던 도중에 불려나와 목숨을 구했다. 그녀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병원 블록이었던 제4 블록에서 희생자 선별 작업이 있었습니다. 이 선별 작업을 위해 3,000명 이상의 유대인 여자들이 정렬했는데 침대를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번호를 적어갔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죽음을 당했겠지요.

몸매가 예쁘지 않거나 너무 마른 여자들을 포함해서 선별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들은 모두 번호가 적혔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지만 내 번호도 적어 갔습니다. 다음날 다른 블록으로 이동했고 오후 5시 반경에 트럭이 도착하자 우리는 마치 동물처럼 발가벗겨진 채 트럭에 태워져 어떤 건물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Buchenwald 강제 수용소의 화장터

우리를 싣고 간 트럭들은 모래나 석탄 같은 짐을 부리듯 우리를 엎어 놓았고 우리는 즉시 어떤 방으로 들어갔는데 꼭 샤워장 같았습니다. 여기저기 수건과 스프레이가 걸려 있었고 거울까지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고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는데 갑자기 천장에 난 아주 작은 공기 구멍을 통해서 연기가 스며들었습니다. 기침이 심하게 나오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리기 시작했으며 목이 막혀 질식사할 것 같다는 공포감이 업습해 왔습니다.

그 순간 내 이름이 호명되는 소리를 들었지만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나는 그저 손만 들었지요. 그러자 누군가 와서 나를 그곳에서 끌어냈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마신 가스의 영향으로 나는 지금도 자주 두통이 있고 심장에 이상이 생깁니다.‘

 

가스실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체코 국가를 부른 집단도 있었으며, 기도를 올린 사람도 있었다. 유대인죽을 때 셰마신앙고백기도를 올려야 한다. 예호슈아 로젠블룸은 덕망 있는 랍비를 데리고 가스실로 들어가 벌거벗은 그 노인에게 곧 죽을 거라고 알려주며 기도를 올리라고 했다. 누군가가 랍비에게 질문했다.

 

생전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아이, 부모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조용히 하게. 우리는 불평해서는 안 되네. 이건 다 하느님의 뜻일세. 우리는 그런 의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네.’

 

랍비는 로젠블룸에게 부탁했다.

 

이 사악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시오.’

 

그러나 로젠블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랍비, 오늘은 당신이지만 내일은 내 차례요.’

 

로젠블룸는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므로 존데르코만도로 불렸는데 자신들도 결국 언젠가는 화장터의 재가 되고 말리라 예상했다. 나치들은 주기적으로 그들을 죽이고 존데르코만도 그룹을 새로 선정함으로써 말이 새나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가스실 신세를 모면한 유대인 로만 프리스터는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송됐을 때, 15세의 고아였는데 그는 한 번도 본 적도 없던 선반 운전공으로 자원해 일자리를 얻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죄수모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점호 때 모자가 없는 죄수는 총살을 당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다른 죄수의 모자를 훔쳤다. 그 다음날 아침 나 대신 바로 그 죄수가 살해됐다. 나는 그게 누구였는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병이 목숨을 살려준 경우도 있었다. 암스테르담 출신 유대인 막스 가르시아충수염 덕택에 목숨을 건졌다. 4일 동안 심한 복통을 앓던 그는 수용소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것은 화장터로 가는 직행 티켓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친위대 군의관은 급성 충수염환자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삼아 가르시아의 배를 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자료에 의하면 유대인은 최소 약 420만 명에서 570만 명이 대학살로 살해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소련 통계에 따르면 백만 벌 이상의 신사복·코트·드레스와 7톤의 머리칼, 그리고 그에 맞먹는 수의 신발·안경·식기 등의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캐나다의 35개 저장실 중 불과 6곳에서 발견된 것을 헤아린 것이다. 다른 곳은 독일군이 모두 불살랐기 때문이다.

 

수용소 희생자

그러나 근래의 자료에 의하면 나치 집단 수용소의 희생자수는 당초 발표된 400만 명에서 다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안드류 나고르스키는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희생자의 수를 110150만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데 20051폴란드 <아우슈비츠 국립박물관>은 나치 치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모두 130만 명이 구금됐고 이 가운데 백십만 명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각지 수용소에서 대체로 약 300만 명에서 400만 정도 살해되었다고 알려지지만 이들 숫자가 확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 <아우슈비츠 국립박물관>역사학자인 피페르는 수용소에 등록된 유대인은 20만 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수용소 도착 직후 살해됐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몇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