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독가스실(2)

Que sais 2021. 1. 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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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높은 가스실>

아우슈비츠가 악명높은 것은 바로 가스실을 사용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수용소는 살해대상들을 깨끗하게 처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수사했다.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의 문제점은 전쟁 중이라 귀중한 탄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처형에 동원된 장병 역시 독일인 이전에 인간이므로 처형후 스트레스 등을 겪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신속하고 문제점이 다소 작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발터 라우프

바로 가스를 사용한 집단처형 장치이다. 19426, 헤움노 수용소에서 베를린의 가스실 총책임자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 SS대령에게 자신들이 사용 중인 학살용 가스 트럭의 개선점을 보고한 서한에 가스 장치에 대한 적나라한 증거가 적혀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194112월 이래 3대의 특수차량(spezialwagen)으로 97,000명을 처리했는데 차량에 별다른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음의 사항들의 개선을 건의했다.

 

과잉압력을 막고 일산화탄소가 빠르게 퍼지게 하기 위해 차량 후방 벽면의 위에다 10x1cm의 구멍을 뚫을 필요가 있음. 압력 과잉은 밖에서 이 구멍을 막는 덮개를 여닫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음.

 

통상 적재 시 평방미터 당 9~10명임. 최대한으로 적재 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차량 안정성에 문제가 있으므로 적재공간의 축소가 필요함. (중략) 그렇다고 화물(사람)의 양을 줄이면 남는 공간에도 일산화탄소를 채워야 하므로 '가동 시간'이 늘어나게 됨.

 

차량 내부 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 중앙에 밀봉된 배수구를 설치해야 함. 적재공간의 바닥은 중앙을 향해 약간 기울도록 해서 오물들이 중앙으로 모아져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함.

 

적재공간 내 램프를 더 철저하게 보호해야 됨. 램프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문이 닫히려 할 때 깜깜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기에 문을 닫기 어려워짐. 또한 어둠으로 인한 공포로 적재된 사람들이 소음을 일으킴.

 

이 보고에서 이들은 처형될 사람을 화물로 적시했다. 한마디로 나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람을 처리하려는 계획을 작성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스 아이디어는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의 경험담에서 도출되었다.

그가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는데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다. 겨우 탈출에 성공했고 이 경험이 가스형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치클론 B

여기에 나오는 가스실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켜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일산화탄소는 과거 한국에서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하튼 이것이 S트럭이라고 불린 처형 방식이다.

나치의 6개 홀로코스트 수용소 중 트레블링카,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보르에서 수용소가 폐쇄되는 1944년까지 이들 방식을 사용했다. 물론 이들은 곧바로 가스트럭을 업그레이드하여 별도 가스실에 건축한 다음 거대한 엔진을 부착하여 엔진을 공회전시켜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학자들은 이 4곳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나치로부터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유명한 '치클론 B이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을 방역하는 살충제인데 청산가리가 사용되므로 인간에겐 치명적인 독가스이다. 그러므로 19419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시행했는데 효과가 좋자 배기가스식보다 더 저렴하게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좋은 치클론 B는 모든 수용소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만 사용되었다. 전쟁 중기 이후 치클론 B의 대량 생산이 가능했음에도 다른 수용소들은 기존의 일산화탄소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수용소들은 1944년 이전에 폐쇄되었고, 치클론 B를 사용하는 마이다네크 수용소19447, 아우슈비츠에서는 19451월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다소 엉뚱한 기사가 발견된다. 독일 언론들이 수용소에서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위생적으로 운영되는 증거라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클로드 리베그(Claude Ribbe)2005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서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은 르클레르 장군의 프랑스군은 아이티에서 벌어진 흑인 노예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한 후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몰아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고 적었다.

 

나폴레옹 우표

클로드는 이 학살의 원인으로 다음을 들었다.

아이티프랑스 1식민제국주요 수입원이었는데 그 핵심은 아이티의 사탕수수. 사탕수수는 인원이 많이 소요되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들로 운용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 소식이 알려지자 자유 사상을 접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이티에 살고 있는 흑인 전체를 반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조리 제거한 후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클로드는 가스실에서 살해된 아이티 흑인들이 약 10만 명을 상회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주장은 아직 정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서조차 가스실의 존재를 믿지 않아>

놀라운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건설한 각종 수용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일반인들에게는 전쟁 중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에서 일부 나치의 간부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에 대해서 일부 레지스탕스들은 비밀리에 첩자들을 잠입시켜 진상을 폭로하려고 했지만 독일 측은 물론 서방측에서조차 이를 진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보고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유대인들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일 국민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이런 참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찬성한 적도 반대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이다.

승전한 연합국조차 실제로 수용소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스실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 당시 수용소를 포위한 후 해방시킨 적군(赤軍) 4개 사단의 지휘관 바실리 페트렌코 퇴역중장도 다음과 같이 경악했다.

 

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봤다. 교수형이나 화형을 당한 사람들도 봤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특히 경악시킨 것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일부는 유아였는데 나치 군인들이 서둘러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자행한 의학 실험에서 살아남은, 혹은 그 전해 가을 바르샤바의 불운한 반란 뒤에 체포된 폴란드 정치범들의 자녀였다. 나중에서야 페트렌코는 그곳이 아이들을 데려다 죽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1942년 레지스탕스 밀사이자 유대인 대학살을 서방측에 처음으로 알린 얀 카르스키가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원하는 공작 책임자를 맡고 있던 영국의 셀본 경과의 이야기는 매우 함축적이다. 그는 1942년 독일군으로 위장한 채 유대인 수용소로 잠입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목격한 후 자신이 본 참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났다. 그러나 카르스키가 자신이 폴란드에서 목격한 비참한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사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는 독일군이 벨기에 아기들을 붙잡아 벽에 부딪쳐 머리를 박살낸다는 소문이 돌아 다녔습니다. 우리는 그런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됐기 때문입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츨한 사람들의 수기도 간행되었다. 1944타보라는 폴란드 정치범이 다른 수감자와 함께 수용소의 전기철조망을 합선시킨 후 그것을 절단하고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그의 수기는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의해 배포되었다.

또 다른 충격적인 보고서는 두 명의 슬로바키아 유대인이 쓴 것으로 이를 통해 대량 가스 학살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가 유대인 단체 및 서방 정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쟁 기간 중에 언론매체는 정기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해 보도했다.

그러나 이들 보도는 항상 뉴스의 뒷전으로 밀렸다. 1944<뉴욕타임스>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는 뉴스를 겨우 10센티미터 짜리 기사로 취급했다. 그러므로 학살 기사가 전면 기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나서부터이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언론사의 보도 태도는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독일인들의 잔혹 행위를 과장하여 선전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서방기자들은 나치들의 잔혹한 만행에 대해 진담으로 믿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다.

생크먼 박사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박살내려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처음 몇 년 동안 히틀러는 유대인을 독일에서 추방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기 전인 1938년까지 나치는 거의 20만 명의 유대인을 독일에서 추방했다. 생크먼은 히틀러가 독일은 물론 독일이 제압한 지역에 있는 유대인을 모두 추방하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계속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하지 못한 이유는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유대인들을 받아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크먼의 주장은 나치 수용소에서 있었던 이런 홀로코스트조차 부정하는 사람들로부터 좋은 자료로 인용된다. 그들을 홀로코스트의 부정론자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다음 세 가지를 부정한다.

 

일차적으로 인종을 기초로 한 집단 학살의 의도가 있었다.

가스실과 소각로를 사용한 고도의 기술적이고 잘 짜인 말살 계획이 수행되었다.

500만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정론자들이 나치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했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지도부의 많은 수가 유대인을 싫어했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과잉 수용, 질병, 강제 노동으로 희생되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부정론자들은 앞의 세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의 유대인종을 말살하려는 나치의 정책은 없었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들을 외국으로 추방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치가 계속 승리했기 때문에 추방해야 할 인원이 점점 증가하여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전세가 처음과는 달리 기울자 나치는 유대인들을 게토에 감금했고 마침내는 수용소에 수용했다.

 

유대인들의 주된 사망 원인질병과 굶주림이었다. 이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전쟁 말미에 연합군이 독일의 보급선과 물자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가스실은 옷가지와 이불에 있는 이 등 해충을 죽이는데 사용되었고 소각로는 질병, 굶주림, 중노동, 총살, 교수형으로 죽은 시체들을 처분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게토와 수용소에서 죽거나 죽임을 당한 유대인 수는 3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수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부정론자들이 이를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음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영국도 독일에서 유대인팔레스타인 등으로 추방하려는 계획모른 체했다는 점도 알려지기 때문이다.

1940년에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독일에 남아 있는 모든 유대인을 아프리카 해안의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추방하려는 제안을 승인하기도 했다. 이 계획이 불발에 그친 것은 영국이 해상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치에 의해 수백만 명이 살해된 유대인 학살은 당시 주변국들의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히틀러의 유대인들이 학살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이젠하우어 장군의 학살 수용소방문

사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홀로코스트의 책임자가 누구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에 회부된 군수장과이자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은 유대인의 말살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19461220일의 일기에서 히틀러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적었다.

 

히틀러는 항상 유대인을 미워했다. 그는 아무 때나 그 미움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토로했다. 수프를 마시고 야채가 차려지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하게 이런 말을 내게 던지기도 했다. “나는 유럽에서 유대인을 절멸시키고 싶네. 이 전쟁은 국가사회주의 대 전 세계 유대인의 결전이지. 결국 어느 한쪽은 무릎을 꿇게 될 거야. 우리 쪽이 그러지 않을 것은 확실하네.” 그러나 내가 유대인 살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히틀러가 유대인 말살을 명령한 구체적인 명령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알베르트 슈페어도 히틀러가 전쟁 전 기간 동안 세세한 기술적인 문제들에까지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데는 동의했다. 반면에 총살부터 가스실 처형 등은 히틀러가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 중요한 사항을 히틀러가 모르고 시행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참고문헌 :

독침과 독화살, 캐시 뉴먼, 내셔널지오그래픽, 20055

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 강준만, 인물과 사상, 2004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마이클 셔머, 바다출판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