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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생체실험(3)

Que sais 2021. 1. 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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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실험의 악당 멩겔레>

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적어도 150만 명 이상 살해되었다고 알려지지만 이들 모두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학자들의 발표에 의하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유대인이 약 3분의 1, 나머지는 폴란드인, 집시, 동성연애자였다. 19451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을 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7,6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가 유대인 등 포로들을 독가스실에서 대량 학살했다는 것으로 세계를 경악시켰지만 더욱 사람들을 전율케 만든 것은 생체실험이었다. <과학동아>홍대길 기자는 이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체실험을 담당한 사람은 나치스 친위대 의사로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멩겔레(Joseph Mengele). 그는 나치의 친위대 장교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로 기차로 도착하는 포로들을 제일 먼저 맞이했고 그의 손짓은 포로들의 운명을 순간적으로 갈라놓았다. 권총을 든 손으로 왼쪽으로 지적하면 독가스실로 직행하고, 오른쪽이면 강제노동소로 들어가는 식이다.

한마디로 멩겔레 박사는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생체실험의 책임자인데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죽음의 천사(Todesengel)'.

 

멩겔레

이런 예를 보더라도 학자들이 아우슈비츠를 세계적인 악명의 장소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요세프 멩겔레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질문이 나오는데 그가 대체 누구인데 그렇게 높은 악명을 받았느냐이다.

그가 나치의 친위대 장교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라면 별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로 아우슈비츠에서 자행된 생체실험의 책임자라면 그 이유를 금방 이해할 것인데 더불어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죽음의 천사(Todesengel)'라면 더욱 무슨 뜻인지 실감할 것이다.

당시 제3제국의 히틀러로부터 나치독일을 위한 완벽한 인종을 만들라는 임무를 받은 멩겔레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순수 독일혈통 아리안족의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유전학적으로 쌍둥이를 출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른바 우생학을 나치의 국가주의 이념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멩겔레는 바이에른의 귄츠부르크에서 성공한 실업가인 아버지 카를 멩겔레, 어머니 발부르가 후파우어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 귄츠부르크 김나지움 즉 고등학교를 졸업한 멩겔레는 뮌헨 대학에서 의학과 인류학을 공부하였으며, 1934년인 23세에 나치 돌격대(SA)에 입대하였고, 1935 4대 인종 그룹 간의 아랫턱 앞부분의 차이에 따른 인종형태학상의 연구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37나치에 입당한다. 한마디로 당대 독일에서 가장 바람직한 독일인 과정을 순조롭게 밟았다.

이어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유전 생물학 및 인종 위생학 연구소에서 오트마어 폰 페르슈어와 함께 연구를 진행하면서 1938년  갈라진 입술과 구개에 관한 가족사 연구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추후의 일이지만 뮌헨 대학과 프랑크푸르트 대학1964년 그의 학위를 취소했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여하튼 멩겔레는 학업도 우수하고 외모도 출중한데다가 냉철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인텔리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우생학의 전공자로 나치에 접근했다. 나치에서 맹겔레는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 학살은 우생학과 정치 이데올로기에도 딱 알맞은 주제였다.

그는 1938년에는 친위대에 가입하였고 1939년 교수의 딸인 이레네 쇤바인(Irene Schönbein)과 결혼하여 아들 롤프를 낳았다. 1940년 예비군 의무대로 배속되어 무장친위대와 함께 작전에 참여했는데 동료들의 그에 대한 평은 성실하고 무난한 친구였다.

놀라운 것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동부 전선에서의 수훈으로 1급 및 2철십자 훈장(Iron Cross)동부전선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군공을 쌓았는데 특히 불타는 탱크에서 동료를 구했다고 한다. 군에서 이 정도의 공훈을 쌓는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박사 학위를 2개나 갖고 있으며 무공도 남달라 당대의 가장 호평받는 젊은이였다.

그런데 1942독소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했고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현장 전투 임무는 배제되었지만 여하튼 그는 친위대  대위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추후 그의 박사학위와 마찬가지로 그의 공훈모두 삭제되었지만 그가 전장에서 남다른 공훈을 세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43 5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집시 캠프' 의무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 처리가 되면서 캠프가 해체되자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이 되었다. 한마디로 악명 높은 수용소의 핵심이 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인체실험 장면

그가 수용소에서 머문 기간은 단 21개월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죽음의 천사. 이는 외형으로는 친절한 의사처럼 보이지만 하는 짓은 악마와 같다는 뜻이다. 그는 깨끗하게 면도했고 항상 미소를 머금고 가볍게 인사를 하여 친절한 군인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라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했다.

멩겔레는 교대로 가스실로 보낼 유대인들과 강제노역에 동원할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는데 선별 기준은 간단하다. 그냥 그의 내키는 마음이었다.

이때 유대인 미클로시 니즐리는 멩겔레 밑에서 조수로 추후 증언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멩겔레가 죄수들 중 실험 대상을 선별하는 일을 마치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듯이 손으로 쉽게 가리켜서 했다고 했다. 그는 멩겔레가 너무나 활기찬 표정으로 인간의 운명을 간단하개 처리하여 미친 사람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증언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또 다른 별명이 3가지 제복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그가 하얀 가운을 입고 있으면 자신이 만나는 수용소인들을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초록색 수술복을 입고 나타나면 곧 누군가가 가죽끈에 묶여서 수술대로 가게 되며, 회색 제복을 입으면 여러 가지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죽어서야 실험실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멩겔레의 악명이 누구보다도 높은 것은 어린 아이들까지도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멩겔레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는 기간은 단 21개월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야말로 여러 가지 생체실험을 했다.

나치 우생학 신봉자 멩겔레에게 있어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그의 유전학연구에 아주 좋은 실험 대상이었다. 멩겔레는 생쥐, , 원숭이보다 포유류 동물 중 인간만큼 좋은 실험 샘플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쌍둥이들이므로 쌍둥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경우 벽에 150cm 키의 줄을 긋고, 150cm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모조리 가스실로 보냈다쌍둥이들이 살아난 것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의 실험 중 특이한 것은 눈동자 색깔이 화학물질을 통해 변형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쌍둥이의 눈에 화학물질을 주입하거나, 파란 눈동자를 만들기 위해 파란 물감을 눈에 주사하였다. 멩겔레가 이와 같은 실험을 한 것은 다른 인종을 푸른 눈을 가진 아리안 인종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우리가 보는 눈 색은 홍채 자체의 색이므로 유리체에 물감을 주입해도 눈이 파래지지 않으며 당사자는 실명이 된다. 또한 마취없는 발치나 늑골 적출, 기타 잔인한 외과실험들이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숨을 거둔 피실험자들의 눈은 멩겔레의 수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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