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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생체실험(5)

Que sais 2021. 1. 5. 10:26

수많은기차들이 정차한 아우슈비츠의 종착지

youtu.be/TGkGVXtsVp0

<뉴른베르크 의사재판>

멩겔레가 보다 유명해진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가 전설이기 때문이다.

생체실험 등으로 악명을 높인 카를 브란트나 카를 게프하르트 등은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지만 멩겔레는 운 좋게 빠져나갔다.

우선 그의 도주 과정이 마치 소설과 다름없다.

그는 가장 중요한 전범 체포리스트에 올랐는데 미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소장이 수용 캠프에 도착하지 않아 석방되었고 고향인 군쯔베르그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다른 SS와 달리 문신을 하지 않았고, 아우슈비츠를 나온 후 6주간 국방군 병원으로 들어가 잠시 군의관 행세를 했으므로 어느 누구도 SS 장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소속 의사들이 194612, 재판에 회부되자 언젠가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1949년에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 가 남미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친가가 독일에서 농기구 생산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자금을 대주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서의 멩겔레

이후 파라과이, 브라질 등을 전전하면서 산부인과 의사로 활약했는데 놀라운 것은 남아메리카에서도 자신이 흥미있는 의학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 초반 독일인들의 정착촌인 칸디도 고도이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도 당당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탈출 기간 동안 일화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체포에서 피한 많은 나치당원들과 만났는데 대표적으로 아돌프 아이히만만난 적도 있다. 그러나 멩겔레아돌프 아이히만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아 아이히만을 목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유럽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롤프 멩겔레를 남미로 불러서 같이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물론 장인과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생존사실을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그의 행방불명은 전범재판의 진행에 따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예루살렘에서는 그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려 전세계의 TV가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교황 바오르 2에게 모든 카톨릭 신도들이 멩겔레의 행방을 찾는데 협조해 달라고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1980년대 드디어 그의 소재지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던 아내와 그의 가족들이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멩겔레1979년 브라질 상파울로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을 알고 난 후이다.

그가 1979년에 사망하였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계속되었는데 브라질 경찰이 1985년 그의 시체를 발굴하여 이빨과 DNA를 통해 정밀 분석한 결과 1993년 최종적으로 멩겔레임이 확인되었다.

학자들이 멩겔레에 대해 헷갈리는 것은 그는 나치 내에서는 정말로 엘리트이며 유능한 인재들이었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으며 자기 아이들에게는 더 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는 점이다. 그가 평소에 한 말은 그야말로 놀랍기만 하다.

 

나는 수용소에서 많은 환자들을 도왔지만 나의 이런 선행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략) 전선의 군의관도 선별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수술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통해서 부상자들의 생과 사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력이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서 선별 작업을 했다. (중략) 어느 나라이든 전시에는 그 나라에 위험이 되는 인사들, 태업 혐의를 받는 외국인들,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쓸모없는 인간들, 창녀, 집시와 직업적 범죄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는 1977년 즉 사망하기 2년 전에 자신의 아들인 롤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나의 유일한 아들아, 나에 관해서 쓴 내용을 네가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다오! 내 어머니에게 맹세컨대 나는 결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사실 그에 대해서 다소 긍정적인 다음과 같은 평가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멩겔레가 단독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가 했다고 지적하는 비난하는 행위를 멩겔레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을 사람과 죽을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았을까?’

 

아우슈비츠에서 멩겔레와 함께 근무했고 1947년 뉴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무죄 판결로 석방된 한스 뮌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되었던 모든 친위대원들 중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명령을 받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아우슈비츠 주둔지 의사로 멩겔레와 함께 생체실험을 한 에두아르츠 비르츠는 그야말로 멩겔레에 대해 상당히 신뢰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종종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그에게 부여된 모든 임무를 신중하고, 끈기있게, 열과 성을 다하여 그의 상관이 확실히 만족할 수 있도록 수행해 냈으며, 모든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그는 인류학자로서 짧은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을 계발하는 데 열성이었으며, 업무를 보면서도 자신이 업무상 다룰 수 있는 학문적인 자료들을 이용해서 인류학 분야에 가치 있는 기여를 했다.’

 

한편 그의 부인인 이레네는 매우 심오한 말로 그를 평했다.

 

그의 야심이 그를 망쳐 놓았다. 나는 요제프 멩겔레를 매우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양심적이고, 매우 매력적이고, 세련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용소에 있었던 쌍둥이의 증언이다.

 

우리 수용소에는 발육부진 쌍둥이를 포함해 100명에서 120명 정도의 쌍둥이가 있었다. 멩겔레는 우리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우리를 학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검사했고, 우리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취해야 했다. 그의 조수들이 다른 검사들을 했었고 멩겔레는 우리에게 주사를 놓지 않았다.’

 

멩겔레에 대한 반대 증언이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편임은 분명하다. 그의 아들 롤프의 이야기도 알려진다.

 

내 아버지 요제프 멩겔레는 내게 있어 언제나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전쟁 영웅이였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정통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우슈비츠의 의사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멩겔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궁한 가능성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그가 이런 가능성들을 놓쳐버린 것이 내게는 무척 가슴 아프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내팽개쳐 버렸다.’

 

흥미있는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간호사 베라 알렉산더의 증언이다.

 

화물 전용 플랫폼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떤 아리아를 조용히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오른쪽과 왼쪽 또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절한 수용소 의사였다. 그 당시에 나는 그의 본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쌍둥이가 멩겔레에게 큰 우대를 받았다는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난 쌍둥이 에바 쿠파스의 다음 말로도 알 수 있다.

 

우리 쌍둥이 형제는 어머니와 같이 독가스실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얘들아, 어서 독일인들에게로 돌아가거라. 그들이 쌍둥이를 찾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시체 소각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몸을 돌려 화물 전용 기차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멩겔레 박사가 서 있었다.’

 

 

별도로 수용된 쌍둥이

흥미로은 것은 에프라인 라이헨베르크의 말이다.

 

수용자복을 입은 유대인들에게 쌍둥이들은 나오라고 소리치며 난쟁이와 기형인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왔다. 내 형과 나는 쌍둥이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매우 닮았다. 그들은 우리를 열에서 빼내 끌고 가면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멩겔레에 대한 평을 보면 호의적인 발언을 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가 아우슈비츠와 같은 특이한 환경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선악의 기로에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이 멩겔레의 사건을 중시하는 것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단호하다. 그가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남긴 유산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으로 눈이 먼 명분을 가진 과학은 결코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그가 행한 선행이 설사 있었더라도 수많은 악행 즉 자신의 잔혹한 행각에 대해 한 번도 후회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믿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인종차별정책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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