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세기의 재판 아돌프 아이히만(1)

Que sais 2021. 1. 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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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411, 예루살렘에서 세계 최초의 TV 생방송이 세계를 상대로 '세기의 재판' 생중계가 계획되었다. 생방송의 주인공은 600만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전범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61962)으로 그의 생방송 재판을 37개 나라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기의 생방송을 위해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에 의해 블랙리스트명단에 오른 TV감독 허위츠, 프로듀서인 프루트만이 재판정에 3개의 카메라를 설치코자 했다.

그런데 생방송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일밖에 남아있지 않는데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생방송 촬영을 허가하지 않았다. 특히 법원에서는 TV카메라로 인해 재판이 방해될지 모른다며 우려를 제기했는데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하는가? 더구나 허위츠와 프루투만은 테러 로 인한 살해 위협을 받는다.

 

아이히만 쇼

결론을 말하자면 실무자들이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여 세기의 재판은 당초 예상대로 생방송에 들어간다. 영화 아이히만 쇼는 바로 이 당시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그러므로 1961년 당시 BBC에서 촬영되었던 재판장에서의 원본 필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청률이 생명이라고 믿는 프로듀서인 프루트만은 시청자들이 흥미를 느낄 자극적인 장면을 원하며, 반면 감독 허위츠아이히만이 진정으로 나치에 반성하는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울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고 목석처럼 앉아있다. 허위츠와 프루트만은 실망하지만, 영화는 이 모습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중을 자극하거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방송의 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는 아이히만이 전대 유례없는 홀로코스트를 실행한 장본인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거를 볼 때 누구나 천하의 악당 그 자체로 여겼지만 그는 재판에서 끝까지 자신이 누구보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공무원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질문은 대체 세계에서 최초로 생방송할 정도로 주목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누구이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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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실체>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움직인 절대 고위직이 아니다. 전쟁 중 그는 중령 계급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유대인 등을 멸종시키는 실무 기획자로 엄밀한 의미에서 군사작전이 아닌 유대인 등을 학살하는데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홀로코스트실무를 책임지고 관할하고 집행한 당사자.

아이히만은 독일의 서부도시인 솔링겐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의 린츠로 직장을 옮기자 가족 모두 1914년 린츠로 이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아이히만은 안색이 검었으므로 다른 아이들이 그에게 유대인같다며 놀려댔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에 종군했으며 세계대전이 끝나자 1920년에 가족들은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아이히만은 기계공학을 전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갔지만 학비 염출이 어려워 외판원으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여 학비가 떨어지자 대학을 중퇴한 후 린츠 지역 정유회사에서 외판원으로 근무했으며 아버지를 따라 1930년 다시 독일로 갔다. 이후 야외집회에서 나치당과 처음 접하면서 흥미를 가졌는데 1932년 린츠의 변호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의 권유에 따라서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나이 26살이다.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나치당의 친위대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34년 베를린의 나치 친위대의 보안국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아이히만

당시 그는 레히펠트와 다카우에 있던 바이에른 친위대 훈련소에서 SS 소대 지휘관이 되었는데 당시의 계급은 중사급이다. 그런데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친위대의 실력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자질은 남다른 기획능력으로 1937년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대량 이주계획을 평가하는 실무자가 되었는데 이를 실무 기획하면서 영국의 방해 공작 등을 체험했다. 그는 국내외 상황을 볼 때 독일의 유대인 강제이주 정책은 모순이 있다며 유대인의 이주를 재고해야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마디로 이주가 아니라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치의 상층부와 교감되어 193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친위대 보안국의 유대인 추방을 주관하는 일에 투입된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단순히 서류만 성실히 작성 하는 실무자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추방, 수송, 학살을 주도했는데 그의 승진은 놀라워 1941년 친위대 소속 대대장 즉 중령이 되었다. 그의 임무는 국가안보부 제5국 즉게슈타포의 유대인과의 과장이다.

19421월 유럽 전역의 유대인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차관급 회의가 독일 반제 마을에서 열렸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이 논의하는 <반제 회의>로 그는 자료 작성자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 제출된 자료가 바로 학살 대상자를 정리한 '아이히만 리스트'. 이 리스트에는 독일 점령지역의 유대인과 그 외 지역들의 유대인을 모두 포함했다. 그런데 그 결론이 황당하다.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인데 한마디로 유대인의 대량학살이었다.

이 회의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하이드리히와 뮐러를 비롯한 상관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다. 이후 그는 마지막 해결책의 책임을 맡았다. 전쟁 중 아이히만은 <제국안전중앙부>에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 책임자였다.

그는 스스로 약500만 명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라고 자랑했는데 1944년에 헝가리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도 그의 능력은 십분 발휘되어 무려 40만 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고 알려진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각 수용소를 방문하여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 지도했다. 그가 유대인 대학살을 창안한 사람은 아니지만 유대인 말살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며 효과적으로 수행했음을 인정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유대인 제거에 대한 공적을 보고 그의 상관인 하인리히 뮐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악명을 보다 높인 것은 1945년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친위대의 최고위 하인리히 힘러유대인 학살중지령을 내렸음에도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에 따르지 않고 계속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점이다. 이 행동이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유죄가 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그는 끝까지 상부의 지시에 의해 움직였다고 했지만 이 부분은 상관의 중단 명령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이히만이 자발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주도 및 수행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탈출>

아이히만은 소련군이 진군해오자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는데 독일이 항복하자 미 육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친위대 중령 계급인데다 가명을 사용하였으므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고 1946년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하여 독일 북부 니더작센주의 소도시를 떠돌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가짜여권

그러나 1946루돌프 헤스주요 전범 재판이 시작되고 자신의 이름이 전범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탈출을 계획한다. 그는 옛 친위대 동료들과 가톨릭교회의 도움을 받아 1950국제적십자사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국제적십자사의 난민 여권을 갖고 19506아르헨티나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 페론파시즘에 경도되어 있었으므로 아르헨티나나치 잔당의 주요 도피처였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건설사 직원, 물류업체 감독관 등으로 지내며 15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가 체포될 당시에는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의 현지 지사 부장급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나치 잔당들은 자주 회합을 가졌는데 그는 이에 주저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독일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반유대주의독일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1960년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인 빌렘 사센(Willem Sasen)에게 자신의 사상과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자신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1,000만 명의 유대인, 아니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였다면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이에 불과한 놈일 겁니다. 나는 나치당원들과 함께 똑같이 생각했으며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우고 싶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