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 체포>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의 추적으로 납치되었다.
사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민간인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 등의 추적은 종전 직후부터 시작됐다. 비젠탈은 54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첩보를 모사드에게 전달했고, 60년 아이히만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아이히만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동생의 사진을 몰래 찍어 건네기도 했다.
철저하게 은신하던 아이히만이 발각된 것은 그의 장남 클라우스가 1957년 여자친구인 유대계 실비아 헤르만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유럽에서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비아의 아버지는 아이히만의 희생자로, 부모를 잃고 자기 역시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서독 검찰에 제보했고 이어서 이스라엘에 알려졌다.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3년 간 감시하며 신원을 확인한 후 모사드 요원 7명을 투입하여 아이히만의 자택 인근에서, 그를 납치했다.
이스라엘에 압송된 아이히만은 9개월간 집중적인 심문을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세기의 재판은 1961년 4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주심 판사는 대법원 판사였던 모셰 란다우, 기소를 맡은 담당검사는 기드온 하우즈너 등인데 흥미로운 점은, 하우즈너를 제외한 모든 판사와 검사들이 독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가족이 없었는데 이는 재판이 보복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판사와 검사가 독일어를 모국어로서 구사했는데 가능한 한 히브리어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이히만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피고와 논쟁이 거세질 때나 즉각적인 답변을 들으려는 경우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독일어로 직접 질문했다고 한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단은 독일인 로베르트 제르바티우스 변호사가 이끌었다. 당시 이스라엘 법정은 외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으나 아이히만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경우 외국인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세기의 재판이므로 아이히만은 물 한 잔과 공책, 필기구가 놓인 방탄유리로 제작한 피고인석에 섰다. 검찰은 재판 모두 발언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은 단순히 개인이나 나치 독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상징한다며 재판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아이히만은 텔아비브의 공개재판에서 ①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수백만 명 학살, ② 치클론-B 독가스 도입 및 운용, ③ 리투아니아 8만 명 학살, ④ 라트비아 3만 명 학살, ⑤ 벨로루시아 4만5천 명 학살, ⑥ 우크라이나 7만5천 명 학살, ⑦ 키에프 3만3천 명 학살 계획 입안 등 모두 15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에 대한 단죄는 1946년 9월 30일, 뉘른베르크(Nuremberg) 전범 재판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바 있었다. 이 국제군사재판에서 12명의 나치 지도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공군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 빌헬름 카이텔 육군원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하여 독일군 수뇌, 나치당 고위 간부, 점령지 총독 등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이들처럼 고위층은 아니지만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이므로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전범으로 인식되었다.
검찰측 증인심문은 56일간 지속되었으며, 총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증언하였다. 그들은 가스 살인, 구타, 시체 소각, 고문, 생체 실험 따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학살극의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검사의 공격에도 그는 기소된 범죄 혐의에 대해 답변할 때마다 한결같이 ‘나는 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거듭해 명령을 불복종하기엔 무력한 존재였기에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특히 변호사는 재판에 제시된 수많은 홀로코스트 증거물들 중 아이히만과 직접 관련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고,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찰 측은 빌렘 사센과 나눈 대화 내용을 다시 증거로 제출했으나, 아이히만이 직접 쓴 메모 일부분만이 증거로 인정되었다. 아이히만은 시종일관 자신은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며 자신의 무죄를 고수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크건 작건 아돌프 히틀러나 그 외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물론 검사는 이와 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이히만에게 다음을 강조했다.
‘명령이 잘못되고 불법적인 경우에는, 명령을 마지못해 따른 것 또한 불법적인 행위로 성립된다.’
여하튼 아이히만은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을 특정하여 학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검사의 끈질긴 교차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유도하는 개가를 얻었다.
‘내가 500만 명을 죽였다는 사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특별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내게 묘한 웃음을 짓게 한다.’
아이히만은 이 500만 명이 소련인, 즉 제국의 적을 지칭한다고 모호하게 답변했다고 한다. 방탄유리 칸 속에서 아이히만이 기소 내역을 들으면서 자신은 떳떳하다는 태도를 취하자 검사는 아이히만이 수십만 명을 아우슈비츠로 압송시키고, 1939〜1940년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지옥 같은 참상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1944년 8개월간 약 50만 명의 헝가리계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임산부에게 낙태를 강요하고, 독일 내 유대인 남성 수천 명을 거세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전(前)과 그 기간 동안 수 백 만 명을 기아와 파멸 그리고 죽음으로 몰고 간 나치 관료 체계 전체를 통솔한 자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기소된 15가지 혐의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그 범죄들은 그들의 본성과 능력에서 나온 전례가 없는 참상이다. 유대인을 겨냥한 범죄의 목표는 유대인만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제거하려 한 것과 같다. (중략) 법원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아이히만은 법정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자, 항소했으나 3심 끝에 기각되었고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집행 전 아이히만의 부인으로부터 선처를 요망하는 편지를 받은 이츠하크 벤즈비 이스라엘 대통령은 거절 회신에 성경 사무엘기 상권 15장에 나오는 구절을 육필로 적어 보냈다.
‘너의 칼이 뭇 여인을 자식 없게 만들었으니, 네 어미도 여인들 가운데에서 자식 없이 지내야 마땅하니라’
그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과 정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준비되었다.’
아이히만의 시신은 화장되어 이스라엘 해군 경비정에 의해 지중해 공해상에 뿌려졌다.
<국제적 문제가 된 아이히만 사건>
아이히만의 재판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극심한 외교적 마찰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아이히만 확보는 이유야 어떻건 외국인들이 아르헨티나에서 불법 납치를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했으므로 아르헨티나는 아이히만의 납치가 공개된 즉시 아이히만의 송환을 요구했고 UN 안전보장이사회 역시 이스라엘의 주권 침해를 인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에게 사과, 배상함으로써 아이히만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했다.
당시 이스라엘 법정에서도 불법납치에 의해 확보된 피의자에 대해서는 법원의 관할권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피의자의 확보수단은 재판관할권과 무관하다며 재판을 강행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불법납치를 통한 재판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국제법학계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부가 1954년에 사형제를 폐지한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 유일무이한 사형수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를 처단하기 위해 특별법까지 만들어가면서 사형을 집행했다.
미 CIA와 서독 연방정보원(BND)이 아이히만의 소재를 파악한 시점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그들은 아이히만이 체포되기 최소 2년 전부터 거처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나치 잔당 다수가 서독 안보요원으로 활약 중이었다. 미국과 서독은 아이히만이 체포돼 재판을 받을 경우 그런 사실이 폭로될지 모른다고 염려했다고, 2006년 공개된 정부 문서에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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