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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생체실험(6)

Que sais 2021. 1. 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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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른베르크 의사재판>

전쟁이 끝난 후 뉴른베르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각종 범죄에 12건의 재판이 벌어졌는데 그중 많은 관심도를 보인 것이 의사 재판(醫師裁判, Doctors' trial)’이다.

공식적으로는 아메리카 합중국 대 카를 브란트 외 판례라고 한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의료에 관한 사람들이 별도로 재판받은 것은 재판 자체가 단순히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만을 하는 게 아니라 반인륜 행위를 저지른 범죄집단을 국제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에서 인체실험들을 수행한 사람들만 재판에 선 것은 아니다. 대의 자료에 의하면 무려 350여 명에 이르는 의사, 연구자, 지도적 위치에 있던 교수나 과학자들이 독일군의 건강과 안전, 독일 민족의 순수성 보존, 의학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생체실험에 가담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좋지 않은 의료에 관련한 사람 23명이 뉘른베르크의 의사 재판에 회부된다. 피고 23인 중 20인이 의사 자격자였고몇 명은 나치 관료인데 인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요제프 멩겔레는 도피하여 기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판이 열렸다.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의 카를 브란트(자료 나무위키)

재판은 194612월부터 19479월까지 139회의 재판을 통해 진행되었다. 피고 23인 중 7인은 사형, 7인은 무혐의 석방, 나머지는 10년에서 종신형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에게 적용된 범죄조항은 다음과 같다.

 

피험자의 동의 없이 전쟁포로 및 점령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의학실험을 자행한 죄. 실험의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모살, 잔학, 잔인, 고문, 참혹, 비인간적 행위들을 저질렀음. 또한 안락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쟁포로 및 점령국의 민간인에게 노령, 광기, 불치병, 기형 등의 핑계를 내세워 독가스, 주사약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으로 요양원, 병원, 정신병동에서 그들을 상대로 한 대량 살인을 계획하고 수행한 죄.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에 대한 대량살인에 참여한 죄.’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 중 한 명인 카를 브란트(Karl Brandt, 1904~1948) 중장과 카를 게프하르트(Karl Gebhardt, 18971948) 중장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나무위키>는 카를 브란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적었다.

카를 브란트 중장은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임에도 재판정에 선 것은 실질적인 제노사이드인 T-4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카를 브란트결혼식(자료 나무위키)

카를 브란트는 독일 제국 직할주였던 알자스-로렝에 속한 현재는 프랑스령인 알사스 지방의 뮐하우젠에서 태어나 드레스덴 대학, 예나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 등 여러 대학들을 전전했다. 1928년에 의사시험에 합격했고 1929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3월 나치당에 입당한 후 돌격대에 입대했다. 1933년 히틀러의 부관이던 빌헬름 브뤼크너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브란트가 수술하여 그를 회복시키자 히틀러의 주목을 받았고 19343월 친위대로 이적하여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다.

19343월 독일의 수영 선수 안니 레본(Anni Rehborn)과 결혼했고 히틀러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카를 아돌프 브란트로 지었다. 이후 히틀러의 주치의가 되어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을 비롯하여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히틀러는 그를 가족 같이 여겼다고 한다.

그가 뉴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처형된 것은 1939T-4 프로그램을 총괄 감독했기 때문인데 ‘T-4 프로그램은 간단하게 말하여 유대인 및 정신질환자를 안락사시키는 것이다. 훗날 T-4 프로그램이 시민들의 항의가 일어나 히틀러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여하튼 이후에도 장애인들이 자연사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병균을 주입하거나 며칠이 넘는 시간 동안 굶겨 죽게 만들기도 했다.

카를 브란트가 악명 높은 것은 T-4 프로그램이후에도 생체실험 등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에서 멩겔레 등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그는 이들 실험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몰락은 코미디다.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는 바람에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된 후 전황이 불리하자 자신의 가족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우려해서 우선 연합군이 있는 쪽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보냈는데 이것이 히틀러에게 발각되었다.

히틀러가 그의 배신에 분노하여 19454,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그와 큰 친분이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 등이 그의 처형을 막아주었다. 곧이어 히틀러가 자살하고 석방되었으나 독일이 항복하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에서 그에 적용된 죄목은 냉동실험, 말라리아 실험, 독가스 실험, 술폰아미드 실험, 근육 및 신경 재생과 뼈 이식 실험, 바닷물 주사 실험, 전염병 황달 실험, 살균 실험 및 발진티푸스 실험을 실행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기소되었는데 이는 아우슈비츠 등에서 실행된 생체실험 전체가 그의 지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에서의 안락사 실험과 프로그램 계획 및 SS에서 침략전쟁에의 협력,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인 범죄혐의로 유죄를 판결받아 사형이 언도되어 194862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은 잘못한 점이 조금도 없으며 자신이 실시했던 안락사 프로그램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주장하며 안락사 프로그램이 매우 인도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나치의 의사들이 실시한 의사실험은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의사들이 저지른 생체실험은 모두 힘러가 명령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를 포함한 피고들은 자신들이 히틀러 총통이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므로 무죄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그는 처형 직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발판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 보복일뿐,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일했다.

 

생체실험을 거론하려면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주치의로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인체 실험을 자행하여 전후 교수형으로 처형된 카를 게프하르트(Karl Gebhardt, 18971948) 중장을 제외할 수 없다.

 

게프하르트와 힘러(자료 나무위키)

바이에른 왕국의 의사였던 프란츠 게프하르트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 게프하르트는 란츠프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하인리히 힘러의 아버지인 게프하르트 힘러가 교장이므로 하인리히 힘러도 이 학교를 다녀 서로 매우 친했다.

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3, 보병연대에 입대하였고 1918년부터 19193월까지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19년부터 뮌헨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1923년에 의사면허를 취득했고 1924년에 뮌헨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수여받은 게프하르트는 나치당 정권이 탄생한 후인 1933년 나치당에 입당했고 히틀러가 지휘하던 친위대에 입대했다.

그는 행정부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서 의사협회장으로 일했다. 1937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힘러가 관리한 의사들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1938친위대 전국지도자 주치의 및 힘러의 주치의가 되었다.

게프하르트는 친위대의 의사들 중에서 중장까지 올랐으며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았는데 1940년부터 제국체육연구소 의료부문 부장, 무장친위대 의사 총 책임자로 독일의 패전시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게프하르트는 의사이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및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직접 생체실험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조수였던 프리츠 에른스트 피셔와 함께 주로 소녀들을 해부하면서 근육과 신경, 뼈를 추출한 후 뼈와 근육의 신경을 재생시키거나 뼈를 이식시키는 실험을 진행했다. 큰 틀에서 이 실험은 외과 시술을 위해 특히 육군의 부상병들을 위하여 실험되었다. 한편 게프하르트는 다른 실험자들의 근육이나 뼈를 살아있는 채로 뜯어내는가 하면, 팔이나 다리와 같은 부위들을 잘라내 다른 피해자들에게 강제로 이어 붙이는 실험도 수행했다.

그는 당시 개발된 술폰아미드를 실험하기 위해 피실험자에게 다양한 박테리아와 연쇄상구균, 가스 괴저, 파상풍균을 주입하였고 실험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유리조각, 철 조각, 나무 조각으로 실험 대상자들에게 상처를 낸 후, 또는 상처가 난 이후에도 이러한 물질들을 비비고 술폰아미드를 투입한 후 그 효과를 측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아예 사람의 발이나 신체를 절단시킨 다음 근육이나 장기를 빼내고 그곳에다가 술폰아미드를 투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독가스를 실험했는데 피실험자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상처를 낸 후 독가스를 투입한 결과 피해자들은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며 사망했다.

19428월에 라펜스뷔크 강제수용소의 폴란드인 처녀 75명을 대상으로 어떤 종류의 약이 총탄으로 인한 감염에 효과적인가를 입증하여 이를 19435<군사의학회 총회>에 발표했다. 이 공적으로 게프하르트는 히틀러로부터 직접 전공 십자훈장을 받았다.

독일의 패전 직전에 자살한 독일 적십자사 부총재인 에른스트 그라우비츠를 대신하여 단기간 이 자리를 맡았으며 패전이 임박하자 인체실험 대상 수용인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이 정리한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여하튼 그는 생체실험을 직접 수행한 독일 나치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의사 중 한 명이므로 그가 자행한 생체실험은 매우 많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자료를 모두 폐기했다. 많은 학자들은 전후 그의 실험 자료는 연합군에게도 매우 중요하여 자료를 어떻게 든 갖고 있었다면 처형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731부대 이시이 시로 중장이 자신이 수행한 자료를 제출한다는 조건으로 모든 의료진들이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를 엿보게 한다.

여하튼 그는 나치가 패망하자 19455, 하인리히 힘러와 함께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생체 실험을 실행하고 계획했으며 전쟁범죄와 인도주의에 반한 죄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카를 브란트 등과 함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로 처형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히틀러의 주치의로 유명한 테오도어 모렐 박사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렐은 단순한 주치의로 반인도적 범죄에 참여한 혐의가 없었다는 결론인데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인체실험 등을 반대했다.

그런데 현대 의학자들은 그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들이 매우 부적절했다고 설명한다. 다른 주치의들이 여러 가지 약을 처방하는 모렐을 의심하여 히틀러에게 보고했으나 히틀러는 그를 신임하여 그가 처방하는 약을 복용했다. 알려진 이야기는 모렐의 처방이 어떠했든 모렐의 약으로 치료를 받을 때마다 확실하게 회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론을 말한다면 모렐이 처방한 약은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중독과 부작용이 많은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지적도 있다. 모렐 박사의 죄목은 고의성없는 의료사고로 볼 수 있는데 만약 그를 재판에 회부한다면 히틀러의 건강에 피해를 입힌 죄로 처벌받게 된다. 이를 재판부가 사전에 알고 골머리 아픈 문제가 될지 모르므로 모렐 박사를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원자폭탄과 생체실험, 홍대길, 과학동아 19996

무자비한 인체실험과 히틀러의 의사들(13), 우정헌, 사이언스타임즈, 200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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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용서받을 수 없는 과학자, 멩겔레, 김형근, 동아사이언스, 2009.04.13.

계량에 심취한 기이한 과학자, 김영, 대중과학, 201011

생체실험 의사들의 갚지못한 , 박지욱, 사이언스타임즈, 2016.08.08

요제프 맹겔레, 나무위키

조셈 멩 겔레, 위키피디아

의사재판, 위키백과

카를 브란트, 나무위키

카를 게프하르트, 나무위키

무자비한 인체실험 '히틀러의 의사들', 이재담, 헬스조선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김보일, 휴머니스트, 2006

센스 앤 넌센스, 케빈 랠런드 외, 동아시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