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의 구명>
1945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여 100만 소련군이 극동으로 진격했을 때 이시이는 마침 도쿄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는 731부대를 떠나 일본에 귀국하면서 그의 큰형인 이시이 도라오에게 당시의 자료를 21개 나무상자에 넣어 봉한 후 관동군이 패배한다면 직접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운반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시이의 부탁을 받은 큰형은 일본군이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며 운반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막상 자료들을 운반하려 할 때는 비행장을 소련군이 장악한 후였다. 이시이 도라오는 관동군 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에게 자료의 처리방안을 묻자 그는 실험기지의 중요한 건축물과 시설은 물론 자료들을 모두 소각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그제서야 야마다의 지시하에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자료를 소각했다. 이시이 시로는 자기 형이 모든 자료를 폐기처분했고 사본을 만들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시이의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목적을 위해 연구했지만 연구 자체는 인류의 재산인데다 과학적인 연구 성과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부인이 8,000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연구가 약간의 자금과 인명(?)으로 바꾼 것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태어난 이래 가장 다루기 어려운 분야를 다루었다고 강조했다.
그가 연합군 조사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21개의 상자에 보관되었던 자료들이 모두 멸실되었지만 자신이 모두 복원시킬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의 순서와 세부사항을 빠짐없이 외우고 있으므로 따로 사본을 만들지 않았고 복사본이 있다면 바로 그의 머리라는 것이었다. 방대한 자료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자신의 머리를 화장시키는 것뿐이라고도 했다.
그의 심문에는 통신사 기자 2명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이시이의 예심 내용을 상세히 전 세계의 언론에 전했다. 각 언론사에서는 이시이 시로가 세균과 독가스 제조에 관한 기술 자료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 있으므로 자신의 시체를 화장하는 방법만이 자료를 없애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시이의 아이디어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시이의 주장에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미국 육군 세균학전 연구기지 터틀릭연구소의 세균학 박사 에이튼으로 그는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그는 이시이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6,000여 명의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하여 얻어낸 과학적인 성과로 그의 목숨을 보존해 줄 수만 있다면 미국은 단 한 푼의 연구비도 들이지 않고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균과 독가스에 관한 미국의 연구는 일본에 비해 한참 뒤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살아 있는 인체를 실험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부연했다.
에이튼은 연구를 하다 보면 어떤 경우는 동물 실험만으로는 부족하지만 미국이 이시이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시이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그의 과학적 연구업적만은 돈과 인륜이라는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를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또 다시 역설했다. 트루먼은 에이튼의 전화를 받고 당시 전범 재판을 총괄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곧바로 연락하려다 그가 자고 있는 시간임을 알고 8시간 후에 전화를 하여 이시이를 살려야한다고 말했다.
한편 에이튼이 트루먼과 통화하고 있을 즈음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도 즉각 크레믈린궁으로 달려가 스탈린에게 말했다. 그는 이시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시이를 하바로프스크 군사법정의 증인으로 출석시킨 후 이시이가 갑자기 병으로 급사했다고 속인 다음 이시이를 안전하게 도피시켜 그에게 연구과정과 결과를 얻게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시이가 가진 연구결과는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기본원칙 중의 하나가 지구에서 전쟁을 소멸하여 세계의 대동단결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중범자인 이시이 시로를 없애고 세균전과 화학전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표라며 이시이의 처형을 지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국제법정 수석검사 키낸에게 이시이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맥아더는 이시이의 자백과 국제법정에서 확보한 죄상만 보더라도 이시이에게 사형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지만 그를 살려내는 것도 중요하므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아더, 트루먼, 이시이의 합작품〉
자신의 죄상에 비추어 국제법정에서도 A급 전범으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한 이시이에게 사형이 내려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키낸은 그러한 이시이를 살려야 할 묘수를 짜내어야 했다.
이때 그는 이시이가 심문을 받는 도중에 이시이가 말한 대목을 기억해냈다. 이시이는 자신을 A급 전범으로 규정한다면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A급 전범으로 체포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시이의 주장은 논리 정연했다.
“저는 30년 동안 6,300여 명의 살아있는 사람들을 실험대상으로 썼고 수많은 세균전과 화학무기로 수십만 명의 인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트루먼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뜨려 수십만 명의 일본인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저와 트루먼과 누가 더 천인공로할 일을 저질렀을까요.”
키낸은 이시이와 트루먼을 함께 엮으면 그를 구명할 수 있는 방안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맥아더에게 이시이가 지은 죄보다 트루먼 대통령이 지은 죄가 더 극악무도하다는 주장이 알려지면 재판은 교착상태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떨어뜨린 것은 일본 항복의 주요 원인이므로 재판에 참석한 연합군측이 모두 트루먼 대통령의 편을 들게 될 것이며 결국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트루먼은 이시이의 업적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자신을 걸고 넘어가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곧바로 트루먼의 허락을 맥아더로부터 전해 받은 키낸은 이시이에게 법정에서 그를 심문할 때 정식적으로 트루먼을 고발한다는 주장을 하라고 말했다.
이시이는 국제법정의 심문과정에서 사전에 조정된 대로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죄상을 설명한 후 트루먼을 고발했다.
“제가 세균무기와 화학무기로 수십만 명을 살해하는 데는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원자탄 단 두 개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십만 인명을 순식간에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니 트루먼 대통령이 저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극악무도하므로 국제법정에 내 세워야 합니다.”
당시 심문과정에 참석한 검사들은 이시이와 수석검사 키낸의 밀약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시이의 주장에 그야말로 놀라 반박하기에 열심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한 재판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골룬스키 검사 : 당신이 세균과 독가스로 사람을 죽인 건 침략전쟁을 위해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한 것이지만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건 반침략전쟁을 위한 정의로운 행동이요. 당신과 트루먼 대통령을 함께 엮어서 이야기하지 마시오.
이시이 : 미국은 일본에 세균전, 독가스전을 진행할 수도 있었고 진주만 사건과 유사한 전쟁을 발동해 일본을 침략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살상력이 세균이나 독가스보다 훨씬 높은 원자탄을 사용한 것 아닙니까. 어쨌든 트루먼 대통령은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모로우 검사 : 당신이 사용한 세균무기는 국제조약에서 사용이 금지된 거요.
이시이 : 1899년 7월 헤이그 선언에서 독가스 사용을 금지했고 1925년 7월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서에도 화학무기와 세균무기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땐 원자탄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때 원자탄이 개발된 상태라면 원자탄 사용부터 금지한 다음 세균과 독사스 사용을 금지하도록 했을 겁니다.
모로우 검사 : 원자탄 사용을 금지한다는 그 어떤 선언이나 협정을 미국이 체결한 바 없소.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것은 국제법에 전혀 저촉되지 않소.
이시이 :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원자탄 사용 금지를 국제조약으로 정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자탄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행위로 절대로 사용되어선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