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731부대(5)

Que sais 2021. 1. 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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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의 반격>

이시이가 거론한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8, 세계에서 최초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을 때 히로시마 인구는 343,757명이었다. 원자탄은 시내 중심지에 투하되어 군사공원 일대의 시민들이 모두 사망했는데 사망자는 78,150, 부상자와 실종자51,408명으로 총 사상자는 129,558명이다. 여기서 실종자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원폭 폭발 후 히로시마(1945.8.6.08시15분 폭발)

히로시마엔 원래 76,327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중 전파된 것이 48,211, 반파된 것이 22,178, 나머지는 지붕이 날아가거나 벽에 금이 가거나 무너졌다. 히로시마의 구조에 참여했던 군의관은 자신이 목격한 히로시마의 참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군사공원 사방 4킬로미터 범위 내에 살아있는 모든 것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여 손가락만 한 나무토막 하나 발견할 수 없었고 주먹만한 벽돌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찾아낸 시체들은 천태만상이었다. 두 눈을 뜨고 죽은 시체, 입을 크게 벌리고 누워 있는 시체, 한쪽 턱이 옆으로 돌아간 시체‧‧‧. 대부분의 시체들은 입고 있던 옷이 타버리거나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찢겨 있었다. 차마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시체들의 몸부림은 죽음 직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잘 말해준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폭발되었을 때 폭발의 중심지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가사키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다츠이치로 아키즈키 박사는 자신의 목격담을 1981나가사키 1945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폭발시 섬광으로 화상을 입은 피해자들이 병원 마당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나체나 완전 나체로 느릿느릿 이상한 발걸음을 하며 걸어 들어왔다. 몸은 온통 하얀 재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옷은 모두 불에 타 살갗에 녹아내린 상태였고 물을 애타게 찾았다.

(중략) 아침에는 온통 하얀색의 유령 집단으로 보이던 부상자들이 이제는 모두 검정색으로 변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모두 타버렸고 시커멓게 탄 피부는 물집이 생긴 채 부서지고 있었다. 폭발 중심지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의 부상은 너무나 참혹했다. 현장에서 공중으로 휩쓸려 올라가거나 즉사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특히 참혹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 중엔 눈이 눈구멍 안에서 녹아버린 사람들도 있었으며 옷 무늬가 살갗에 녹아 붙어 마치 문신을 한 것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시이트루먼을 고발한 사건이 전 세계의 언론에 보도되자 가장 분개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이시이가 정의와 비정의를 구분하는 경계선조차 조롱하고 있다면서 이시이를 제일먼저 재판하여 처형하라고 트루먼에게 맥아더를 재촉하라고 촉구했다. 재판을 진행하는 연합국 측에서도 이시이에 대해 격앙된 감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시이의 이런 발설이 사전에 기획된 것을 몰랐다.

이들의 반응을 처음부터 예견한 맥아더영국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존엄성를 보호하고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 역사적 의의를 보호하기 위해, 또한 미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서 모종의 양보를 하자는 것으로 한마디로 이시이를 면죄해주자는 것이었다. 그가 영국에게 제일 먼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재판을 참여한 국가들 중에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은 영국연방 국가들이므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도쿄 재판

아시아, 중국 대표들은 이시이를 조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미국의 영향을 받는 영국 등은 이시이의 면죄부를 주장했다. 이시이에게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의 골격은 이시이를 사형시키면서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어떤 책임도 추궁하지 않는다면 국제적 여론은 어떤 식으로든 국제군사법정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시이에게 유기징역을 선고한다면 트루먼은 자신보다 2배의 선고를 받아야 한다며 아예 무죄석방하거나 면죄 석방하는 것이 좋다고 권고했다.

결국 이시이를 사형에 처하자는 주장과 면죄석방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투표로 결정되었는데 74로 면죄부를 주자는 측이 승리했다. 그가 면죄석방 된 논조는 다음과 같다.

 

전범 이시이는 인간으로서 도덕을 무시하고 6,000여 차례나 인명을 상대로 세균과 독가스를 실험했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인명을 세균과 독가스로 사망시켰으므로 그 죄가 막중하여 A급 전범으로 극형에 처해지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시이는 예심을 받는 도중 자신의 죄를 크게 뉘우치고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자백했으며 죽음으로 사죄하고 싶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국제군사법정은 결코 복수주의자가 아니며 처벌과 용서를 잘 조화시켜야 하므로 죄를 인정하는 이시이의 성실한 태도에 따라 그를 면죄 석방한다.’

 

이시이의 행로

미국은 이시이가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세균과 독가스에 관한 연구실적을 모두 빠짐없이 써주기를 부탁했다. 원래 격리된 장소에서 보좌관과 함께 자료를 정리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시이는 자신에게 연구자료의 사본이 있다며 그걸 보면서 집필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말한 8,000장의 필름 외에 절대로 외부로는 공개되지 않아야 할 필름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의 말대로 이시이로 하여금 집에서 자유롭게 집필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시이가 석방된 지 5일 후 소련, 프랑스, 네덜란드 정부는 이시이 시로를 면죄석방한 사실을 성명으로 발표하며 군사법정의 원칙 없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다시 이시이 시로를 체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시이 시로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맥아더에게 그들의 요청이 먹힐 리 없었다. 여하튼 이시이가 보물처럼 아끼던 필름은 미국 세균화학무기 연구기지인 터틀릭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시이다섯 개의 철상자 중 세 개만 미국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석방된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원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는데 <나무위키>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우선 731부대 관련자 중에 전범 처리된 사람도 거의 없고 그 극소수도 처벌은 극히 가벼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1945 소련군731부대를 점령하고 731부대 관련자를 체포하였지만 이시이 시로 등은 일본으로 탈출한 후이다. 그러므로 일부 부하들이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강제노역형을 살다가 소련-일본 수교 협상 때 모두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당시 731부대에서 근무한 상당수 부하들이 자신들이 731부대에서 행한 정보를 토대로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여 일본의 저명한 <녹십자>사를 만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녹십자>의 창시자는 이시이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이며, 그는 731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세이지를 고문으로 영입하여 731부대와 긴밀히 연계했다. <녹십자>사는 1998년 인수합병의 형태로 <요시도미제약>이라는 회사에 합병되고 이후 여러 번의 합병 등을 걸쳐 현재 <미쓰비시 다나베 제약()>가 되었다. 한마디로 현재도 731부대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이시이가 전후 철저하게 자신의 신원을 은폐하였고 고향에서 벌인 사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어 매음굴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실험용 흰쥐 농장을 운영했고 1959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이시이 시로가 흘린 역정보.

그의 행보는 1955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에 관련된 연구소들이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기온의 변화, 환경 등이 다르므로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하여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습니다. 연구소는 계속 발전하였는데 이는 전쟁터가 4,000킬로미터나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들의 몸을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의 하얼빈, 또 중국 남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계속 연구실을 만들었는데 결국 324개의 연구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였고 계속 업무를 수행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커다란 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중략) 그 때 기요노 겐지 박사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이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셨고 현재 여기에 계시는 여러 교수분들이 지원해주셨습니다. (중략) 그런 결과를 통해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도착하여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났습니다.’

 

이를 보면 그는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을 참여시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생체실험으로 극도의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없이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가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여 더욱 비난을 받았다.

 

731부대 전경

그런데 그는 이후에도 계속 여러 가지 분야에서 활약했음이 알려진다.

20141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그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19602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로 등재되었다. 이는 이시이가 1959년 사망하였지만 제자의 논문에 깊히 관여했다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그는 사망하기 직전까지 일본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731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의사자격증은 1945년에 박탈되었지만 이것이 문제될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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