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의 배경>
학자들은 킬링필드의 단초는 프랑스가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프랑스의 식민지인 캄보디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일본에게 점령당하는데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이라 볼 수 있는 1945년 3월,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문제는 일본이 8월에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6년 캄보디아는 다시 프랑스의 보호가 되면서 독립이 무산되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시아누크 국왕은 끈질긴 독립 운동을 벌여 결국 1949년 프랑스 연합 내에서 독립을 얻은 후 1953년, 경찰권, 군사권 등을 확보해 완전 독립을 이룬 후 비동맹·중립 외교 정책을 표명했다.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과 시소와스 코사막 왕비의 아들로 태어난 시하누크 국왕은 194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직위를 가져, 1941년 출판된 기네스북에 오른적도 있다. 왕이자, 주권 왕자이자 대통령, 수상, 국회의장 등 망명정부의 수반으로서 가장 많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명예직이다.
그런데 1965년 5월, 미국이 북베트남의 호지민과의 월남전을 치루면서 동남아시아의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시아누크는 미국에 대해 단교를 선언했다. 이와 같이 시아누크 국왕이 강수를 둔 것은 동남아시아가 베트남 전쟁으로 온통 혼란의 장으로 변했지만 캄보디아는 정통 농업국으로 식량 등 문제가 없으므로 자주 노선을 견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동부 캄보디아 지역이 사실상 북베트남의 실효 지배로 들어가자 상황은 변한다. 이들 지역이 북베트남 즉 호지민의 생명줄이 된 것이다. 호지민이 대규모 지하 터널 즉 ‘호지민 루트’를 통해 캄보디아로부터 농산물 등을 보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에 들어갔다. 미국은 1969년 3월, ‘아침 식사 작전’을 발동하여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문제는 미국의 대량 폭격에도 효과가 미미하여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은 ‘점심 식사 작전' 또는 '메뉴 작전'으로 폭격 지역을 확대했다.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이 역시 호지민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미국으로 볼 때 베트남 호지민과의 전쟁이 관건인데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은 커다란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에서 1970년 3월, 캄보디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가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로 집권한 론 놀은 곧바로 미국에 껄끄러운 시아누크 국왕을 축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캄보디아가 우군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지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보다 강력한 폭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캄보디아의 농업은 완전히 초토화되면서 수십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하튼 캄보디아 폭격 등으로 농업 생산량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지는 캄보디아의 전쟁 이전 경작이 가능했던 논 가운데 80%가 불모지로 변했고, 380만 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은 66만 톤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농업 생산이 격감하여 친미 캄보디아로서는 오로지 미국의 식량 지원으로만 버텨야 했다.
바로 이런 혼동된 사태가 결국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크메르 루즈란 붉은 크메르란 뜻으로 1960년에 설립되었는데 1966년 11월 시아누크 국왕이 ‘머리 속이 빨간 패거리’라는 뜻으로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추후에는 폴포트의 과격한 공산주의자 그룹을 칭한다.
크메르 루주는 론 놀의 독재 정권과 미국의 맹폭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했고 축출되어 해외에 있던 시아누크 국왕도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다. 이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매우 큰 이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크메르 루주는 경제가 엉망으로 변한 것을 론 놀의 책임으로 공격하면서 캄보디아 민족주의자, 농민들을 규합하면서 세력을 늘려나갔다.
결국 민심을 붙잡지 못한 론 놀 정권은 1973년 3월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완전 철수함에 따라 치명타를 입었다. 1975년 4월 론 놀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크메르 루즈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했고 곧바로 시아누크 국왕이 상징적인 수반이 됐다.
문제는 크메르 루주의 집권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킬링 필드의 시작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1976년, 확실히 집권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크메르 루주는 우선 시아누크 국왕을 연금시키며 국명을 ‘민주캄푸치아’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폭격으로 캄보디아의 농업 시설이 황폐화되어 프놈펜 등에 몰려든 난민들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여기에 크메르 루주는 상상하기 어려운 카드를 뽑아든다. 캄보디아 공산당이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마오이즘을 추종하고 있었는데 바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본 따 모두 농촌으로 쫓아내는데 이것은 제노사이드로 이어진다. 그런데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의 난민들만 농촌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 해결책도 함께 부과한 것이다.
이런 제노사이드의 핵심 인물이 바로 폴 포트(1925~1998)다.
그들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철권을 휘둘렀다. 반혁명 사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되는 이들이나 외국과 관련이 있는 이들, 스파이로 의심되는 자들은 철저하게 고문하고 처형했다. 정부는 정치 범죄자나 경범죄자들에게 처음에는 경고장을 보냈지만 경고장이 두 번 이상 나오면 '재교육'을 의미하고 이는 거의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다. 특히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를 자백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는데 이 말은 곧 비밀경찰에 의해 정치범 교화소에 고문을 받고 처형되기 위한 전초단계였다. 그들이 특히 경원한 사람들은 지식인인데 안경을 쓰고 있으므로 지식인처럼 보인다고 체포했을 정도다.
문제는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죽거나 탈출하여 사라지자 그 대상을 농민으로까지 확대했다는 점이다. 이후 당 중앙을 제외한 크메르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내부투쟁이 되었다.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이 킬링 필드로 변모한 것이다.
이들이 철저하게 지식인들을 처형한 것은 결국 캄보디아의 부메랑이 되었다. 캄보디아의 미래를 담당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할 교사들마저 거의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과학기술 등 새로운 지식정보를 가르칠 교사조차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초창기 지식인들의 제거가 순조로웠던 것은 크메르 루주 실무자들이 대부분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당시 캄보디아는 도농간 격차가 상당했으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가 많았다. 그들에게 도시 문명의 모든 것이 부의 상징이자 증오의 대상이었다. 자동차, 라디오, TV, 전자기기 등은 가진자의 물건이므로 이런 물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하튼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대 300만 명에서 최소 120만 명으로 추산한다. 소련 붕괴 이전 핀란드 중립국 조사단의 추산은 전쟁 중 사망자 60만, 크메르 정권하에서 100만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자료에 따라 200여 만 명을 가능한 숫자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캄보디아의 700만 인구와 비교할 때 엄청난 숫자다.
그런데 크메르 루주가 남다른 악명을 받는 것은 화교 즉 중국인, 참파족, 베트남인 등 당시 캄보디아 내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민족들을 대량 학살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에 유례없는 제노사이드를 뜻하는데 당시 국가 간부회 의장 겸 총리였던 키우 삼판도 2003년, 자신이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특히 학살은 중국계와 베트남계에 집중되었다. 여기서 수십만 명의 베트남계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는데 이런 사실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국가로 발돋음하여 기세등등하던 베트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 사이에 극한의 외교적 대립이 이어지자 1978년 12월, 베트남은 망명한 캄보디아 난민을 주축으로 '캄푸챠 민족구국통일전선'을 조직하고 크메르 루주 장교로 베트남에 망명한 헹 삼린을 내세워 폴 포트 타도를 목적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프랑스 국비 유학생 폴포트〉
본명이 살루수 사인 폴포트는 1925년,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캄보디아의 프놈펜 북쪽에서 쌀농사를 짓던 부유한 농가의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은 왕궁의 관방실 서기관이었고 사촌누이는 시아누크 국왕의 선대인 모니본 국왕의 총애를 받아 어릴 적부터 남부러움 없이 살았다.
폴포트는 불교국가인 캄보디아의 많은 국민들처럼 6살부터 불교사원에서 6년을 보낸 후 승려로 2년을 보냈다. 그 후 1949년 시아누크 국왕이 해외에서 보다 많은 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는 교육정책에 따라 정부장학금을 받고 프랑스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여덟 살이 많은 아내 키우 포나리를 만났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것은 전기공학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이었다.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통치를 받고 있는데다 왕이 통치하는 전제국가를 탈피하는 방법은 소련이 공산주의에 의해 무너진 것과 같이 공산혁명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산주의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스탈린주의자 당원이 되었다. 폴포트는 또 다른 좌익 캄보디아 학생이었던 키우 삼판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키우 삼판은 폴포트의 집권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론가였는데 키우 삼판은 한 마디로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농촌 혁명을 달성시키려면 과학 기술이 배제된 농촌 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대학을 마친 후 폴포트는 캄보디아로 돌아오자마자 시아누크 왕정에 반대하여 지하 공산당에 가입한 후 주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계기를 설명하는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프랑스인들 때문에 집안이 엉망이 되고 아버지가 자살했으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으로는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에서 방영한 것으로 그가 부유했던 집안의 후원으로 프놈펜에 유학을 가게 되고 궁중 무희였던 사촌 누이의 도움으로 왕실의 사치와 부정부패를 목격하게 되면서 이것이 공산주의와 합쳐져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는 정부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에 유학한 것은 사실이므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그가 얼마나 공산당에 열중했는가는 입당한 지 채 2년도 안되어 당총서기가 되었을 정도였다. 정부에서 체포령이 내려지자 산악지대로 도망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주 창설에 기여한다. 또한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폴포트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복잡한 비극적 현대사를 이해해야하므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하여 설명한다.
캄보디아의 현대사는 크게 4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베트남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기 직전까지다. 이 시기에 시아누크 국왕은 중립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1960년대 말부터 남베트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공산군을 친다는 구실로 '호지민 루트'에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 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 루주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그 무렵 미국은 B-52기를 투입해 대규모 공습을 자행했고 이때 수많은 캄보디아 농민들이 공습에 희생됐다. 하지만 닉슨 미 행정부는 공습 자체를 없는 일로 부인해왔다.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에 함락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기간이다. 이른바 ‘킬링 필드’의 시기이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베트남 정부군과 폴포트의 크메르 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기간을 포함한다.
1970년부터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친 크메르루즈의 지도층은 원래 시아누크 왕이 폴포트를 비롯하여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에서 수학하도록 보낸 사람들로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들이었다. 나라의 재건에 그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프랑스로 유학시켰는데 그들이 정부에 협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반대자들로 변모하여 정부를 공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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