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홀로코스트

킬링필드의 크메르 루즈(3)

Que sais 2021. 1. 8. 23:55

youtu.be/Qpd34opMV_s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세계 정세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의 혼미 상태였다. 폴포트가 시아누크 왕 치하에서의 론 놀 대통령 정부에 대항하여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은 1972년 접어들면서 베트남전쟁이 종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미국월남군을 지원하기 위해 1969년부터 캄보디아 영토 내의 공산게릴라들을 공격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폴포트에게 새로운 지지세력을 규합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침입에 맞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폴포트의 선전은 효과를 보아 1970년에 4,000명에 불과하던 당원이 1975년에 이미 14,000명으로 급속하게 늘어났을 정도였다. 초창기에 미국론 놀 정권에게 군수물자 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공산 게릴라들의 준동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자 갑자기 캄보디아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했다.

이 당시에 축출된 시아누크조차 미국의 앞잡이보다는 크메르루즈가 애국자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크메르 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이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

 

미국197075년 사이에 론 놀 정권에게 185000만 달러의 군사경제원조를 퍼부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이는 순수한 형태의 닉슨 독트린이라며 캄보디아 원조정책에 대한 비판에 맞섰다. 1969년에 나온 닉슨 독트린은 닉슨의 대아시아 정책을 발표한 것으로, 아시아에서 미 군사개입을 그치고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 원조를 캄보디아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가 275%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미 원조에 매달렸다. 국고수입의 95%가 미 원조였다. 캄보디아의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은 미국이 캄보디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한 론 놀 정권을 돕는 것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는 짓이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엽제 살포

5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프놈펜 정부군이나 크메르 루주군 양쪽 다 전쟁포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군사정보를 캐낼 가치가 있는 포로 말고는 대부분 즉결처형으로 죽였다. 군인, 민간인 합쳐 약 100만 명이 희생됐다는 분석도 있다. ‘워싱턴 포스트프놈펜 특파원을 지낸 엘리자베스 베커전쟁이 끝났을 때: 캄보디아와 크메르 루주 혁명에서 정부군 쪽이 50만 명, 크메르 루주 쪽이 60만 명 정도 희생됐다고 추정했다. 1980년에 나온 CIA의 한 보고서는 60~70만 명이 내전에서 죽은 것으로 분석했다.

이들 숫자는 자료 부족으로 정확할 수 없어, 학자들은 대체로 100200만을 추산하지만 그보다 상회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한편 미군 폭격에 의한 사망자는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계산된 바 없다.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아 부은 폭탄의 투하량은 539,129톤에 달하는데 여기에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 무기에 의한 피해는 별도이다.

여하튼 캄보디아 전쟁으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지는 캄보디아의 전쟁 이전 경작이 가능했던 논 가운데 80%가 불모지로 변했고, 380만 톤에 달했던 쌀 생산량은 66만 톤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불량 시민은 교도시키는 것보다 제거하는 것이 수월

폴포트가 얼마나 크메르루즈에서 신원 위장에 성공했는지는 폴포트가 신임 수상이 되었다고 발표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그의 형과 누나가 그들의 동생이 정부의 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1978년 폴포트의 사진이 지방자치단체의 대형 식당에 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철저하게 습득했다고 생각한 폴포트는 인류 역사상 그 어떤 혁명보다도 완전한 공산주의 혁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폴포트의 등장은 처음부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프놈펜에 입성하자마자 야심 찬 명령을 하달했다. 도시민을 단 72시간 내에 완전히 소개시키라는 것이다. 폴포트의 명령은 내전으로 도시에는 식료품이 거의 없었지만 시골에는 식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선전했다. 또한 신체제에서는 사유재산을 금지하므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농촌에서 자신이 먹을 것을 일하면서 빨리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포트도시민을 전격적으로 소개시킨 가장 큰 이유는 캄보디아를 점령한 크메르루즈의 주구성원이 대부분 무식한 농부들이므로 복잡한 행정 능력이 없는데다가 도시는 외국인이 지배하는 중심지인데다 수많은 난민들이 몰려있으므로 가득이나 식량 공급이 원활치 못하므로 이들을 새 정부가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학살의 현장

난민을 포함하여 200만 명에 달하는 프놈펜 시와 인근 지역에서 거주하던 300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아무런 대비책이 없이 거주지에서 쫓겨나는 통에 강제 행군, 무더위, 식량과 식수 부족 특히 의약품의 부족으로 무려 40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의 참상을 한 생존자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오를 지나 공산당 군대가 더 많은 사람들을 몰아내자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녀노소, 환자 등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었다.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뜨거운 햇빛 속에서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썩는 것을 보았다. 도시 전체에 물 공급이 끊겼다. 추방당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마실 물도 비축된 식량도 없었고 쉴 곳은 더더욱 없었다. 이미 굶주림과 피로로 약해진 육체는 심한 설사로 괴로움을 겪으며 죽어갔고, 200미터마다 아이들의 시체가 하나씩 눈에 띄었다.’

 

폴포트노동의 순수성을 굳게 믿었으므로 개인주의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개인주의적 사고를 철저히 파괴할 때 비로소 집단주의 체제에 헌신적인 사람들이 출현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더불어 과학적 산물인 기계도 미워했다.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소개되자 한 지역 당서기였던 후 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폴포트 지도부에 보냈다.

 

많은 생산을 위해서는 모내기에 기계를 사용해야 합니다. 트랙터가 부족하지 않도록 외국에서 많은 트랙터를 구입해야 합니다.”

 

후 님이 받은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업에서 외국 기계를 사용한다는 방식은 공산주의자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자 방식이다. 기계는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지도부의 방침이다.”

 

캄보디아는 폴포트가 권력을 잡기 전 동남아시아 중에서 최고의 불교 국가 중에 하나로 2,500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승리를 거둔 직후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수행이 공산당 혁명 교리와 모순된다며 일상생활에서 종교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려고 했다. 캄보디아에서 불교는 국교나 마찬가지이므로 종교의 탄압은 사실상 불교를 탄압하는 것과 똑같았다.

폴포트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승려들은 모두 처형했고 승려들의 성직을 빼앗았다. 나이 많은 승려들은 특별히 오랫동안 국민들의 적선을 통한 공덕으로 살아야 했으므로 더욱 오랜 시간 동안 땅만 파는 노동을 부과했다.

 

크메르루즈는 사람 개개인의 특수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임산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기에도 운하 작업을 하면서 목까지 잠기는 물 속에 서 있어야 했다. 병으로 작업을 중단해도 음식을 주지 않았다. 당시 크메르루즈가 내건 슬로건은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노동했고 노동할 힘과 의지가 없는 사람은 곧바로 총살당했다.

 

크메르 루주의 처형 장면

 

폴포트는 캄보디아인들을 출신배경과 과거의 정치경력에 따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첫째 부류는 최고 권리를 부여받은 펜 시트(Penh sith), 둘째는 최고권리의 후보자들인 트리엠(Triem), 마지막으로 어떤 권리도 가질 수 없는 반후(Bannheu)였다.

펜 시트는 대부분이 초기 단계에서 폴포트를 지지했던 자로 우선 순위로 식량을 배급받았고 당이나 군대를 포함하여 어떤 조직에도 가입할 수 있었으며 기초그룹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들은 농촌 인구집단 중 가장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부류로서 행정이나 지휘 능력이 없었다. 트리엠도 대부분이 농촌 출신으로 새롭게 크메르 루즈에 가담한 사람들로 18일의 사람이라고 불렸다. 70318 론 놀의 쿠데타 이후에 참가했다는 의미이다. 이들 중에는 강제로 도시에서 소개된 가난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 역시 행정이나 지휘 능력이 전혀 없는 부류였다. 반면에 반후는 새주민이라 불리며 크메르루즈에 의해 타도대상이 되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폴포트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거해야 할 대상 즉 정되어야 할 사람들이므로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 주었고 기력이 다해 노동을 할 수 없으면 총살시켰다.

크메르루즈가 집권하고 얼마 안 돼 학교와 도서관은 폐쇄되었고 신문도 사라졌으며 도시주민은 농업 외에 수리시설, 제방, 운하, , 다리 건설 등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도시 주민이 극단적으로 감소했지만 폴포트는 19789캄보디아 공산당 창립 18주년 기념집회에서 국민을 향해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 나라에는 좋은 분자, 중간 분자, 나쁜 분자가 있다.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빈농, 하층중농, 노동자이며 그들은 모든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화 체제에 만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