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증언>
놀라운 것은 악명 높은 뚜올슬랭(Tuol Sleng) 감옥에서도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수용자 중에서 살아난 사람은 단 7명인데 이 중 한 명인 화가 반 나트(Vann Nath)은 『크메르 루즈 S-21에서 1년, One Year in the Khmer Rouge's S-21』에서 크메르 루주의 만행이 어떠했는지를 낱낱이 폭로했다.
그는 1946년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바탐방(Battambang)에서 태어났다. 나트의 부모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17세가 되었을 때 4년 동안 불교 승려가 되었다.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에 매료된 그는 화가의 길을 택해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극장의 간판을 그리거나 초상화들을 그렸다. 그의 그림 실력은 탁월하여 시아누크 왕이 바탐방을 방문할 때 대형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법에 의해 농장에서 일했는데 1977년 12월 29일 벼 농장에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1978년 1월 7일 뚜올슬랭 감옥에 수감되었다. 악명 높은 뚜올슬랭에 수용되었는데도 살아난 것이다.
그는 정확히 1년 후인 1979년 1월 7일 탈주에 성공했다.
물론 그의 책은 자신이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 적었기 때문에 뚜올슬랭 감옥의 전반적인 정황을 적은 것이 아니므로 수용소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자신이 직접 본 여러 가지 난행을 그림으로 그려 뚜옹슬랭에서 세기적인 만행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특별히 독방에 수감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수용자들은 큰 방에서 족쇄에 서로 발이 채워진 채 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야했다. 작은 족쇄의 길이는 0.8미터에서 1미터로 몇 명이 묶였고 기다란 족쇄는 6미터에 달하는데 20명에서 30여 명이 함께 묶였다.
수감자들은 차례로 조사받기 위해 방을 나갔는데 거의 대부분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거나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체포되었는데 수감자들에게 지급되는 식량이 적어 수감자들은 차츰 쇠약해져 사망하기 일 수였다.’
그는 모든 수감자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했는데 감방에 켜져 있는 전등 빛을 찾아오다 떨어지는 귀뚜라미나 벌레를 먹는 것이 최대의 별미였다고 적었다. 그러나 귀뚜라미들을 잡는 것을 경비병에게 발각되면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당했다.
수용자들은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심문을 받았고 어떤 경유에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계속해서 심문을 받았다.
그는 픙(Peng)라는 경비병이 가장 잔인하게 수용자들을 살해했는데 한 마디로 그의 임무는 소장의 명령에 따라 수용자들을 살해하는 것이다. 풍은 자신의 얼굴을 감히 똑바로 보았다고 살해하기조차 했다. 수용소 경비병의 나이는 일반적으로 16살에서 18살이었다.
그런데 그가 수용된 지 한 달 후에 수용소 소장인 두치(Deuch)가 그를 불렀다. 두치는 소장이 되기 전에 수학교사였고 추후에 전범재판에 회부된 6명 중 한 명이다.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들은 두치는 반 나트에게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인 폴 포트의 초상화를 3일 안에 잠도 자지 말고 그리라고 명령하면서 만약에 그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곧바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에게 이런 기회가 온 것은 크메르 루즈가 화가만은 살리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크메르루즈로서 폴 포트를 그리는 공식 초상화가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을 때인데 이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도 여지없이 처형한 상태이므로 화가를 찾기 어려웠다. 여하튼 그가 시아누크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이 알려져 그에게 폴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령해 본 것이다.
그런데 반나트가 폴포트를 본적이 없으므로 폴포트의 흑백 사진을 구하여 이를 그렸다. 다행하게도 그의 그림을 본 두치가 그의 재주를 인정했다.
두치가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추후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1978년 2월 16일자로 두치 소장이 서명한 처형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그를 처형하라고 한 명령서는 그에게 일차로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한 후였다. 그러므로 두치는 반 나트를 이미 처형자 명단에 넣은 후 언제라도 처형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여하튼 두치는 반 나트를 언제든지 처형할 수 있게끔 서명한 이후에도 그에게 계속 작업을 시켰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다행하게도 두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낮에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초상화를 그리거나 조각 작업을 하고 별도의 건물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감자들은 몇 달이 가지 않아 처형되었는데 작업실만은 1년을 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술가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소 우대를 받았는데 그것은 잠을 잘 때 발에 족쇄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당시 뚜올슬랭 감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는지는 그의 동료 '밍(Meng)'의 사건으로도 알 수 있다.
‘나와 함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던 밍(Meng)은 두치가 와서 처형하겠다며 위협했다. 그가 처형당하게 된 원인은 말을 하는 도중에 ‘나는(I) '이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두치는 수감자 신분인 주제에 ‘나는’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아직도 크메르 루즈의 정책에 어긋나는 나쁜 정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누구도 밍을 위해 변호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에게 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밍이 작업실에서 매우 필요한 사람이라고 역설했다. 나의 말을 들은 두치는 그를 살려주겠다며 다음과 같이 조건을 걸었다.
첫째 담배 금지, 둘째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 곁을 몇 걸음 정도 이상 떠날 수 없으며 셋째로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족쇄를 차야하고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공동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다행하게도 밍은 2주일 후에 작업실에서 족쇄를 풀 수 있었다고 적었다. 나트의 작업이 계속 소장의 마음에 들자 두치는 공동 숙소가 아닌 작업실에서 나트가 잘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트를 어느 정도 신빙했다는 뜻이다.
나트는 뚜올슬랭 감옥에서 8개의 폴 포트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폴포트의 돌조각 조상도 만들었고 4개의 콘크리트 조각상도 만들었다. 그는 체포되기 전에 조각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조각도 두치의 신임을 계속 얻었다고 적었다.
그는 뚜올슬랭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드는 데만 열중했기 때문에 감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 수 없었지만 크메르 루즈가 점점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감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뚜올슬랭 감옥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수 백 명씩의 사람들이 뚜올슬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 폴 포트에 반기를 들고 베트남으로 탈출하려던 소 핌(So Phim) 장군의 군인이었는데 반란이 실패하여 체포된 것이다. 이들 모두 하루나 이틀 안에 처형되었다.
9월이 되자 새로운 수용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계속 처형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부분의 수용소 경비병들을 구속시켰다. 반 나트는 그들이 크메르 루즈 즉 앙카르에 반하는 어떤 간부와 연계되었기 때문에 체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들 역시 모두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반 나트도 뚜올슬랭의 수감자들이 거의 모두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특히 크메르루즈의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것은 1978년 12월 경비병들이 반 나트가 있는 작업실로 식사를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음식을 요리하도록 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식사를 만들 요리사들조차 살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1978년 12월 말에 뚜올슬랭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은 고작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했다. 한 마디로 뚜올슬랭에 수감되었던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두 살해된 것이다.
감옥소 밖에서의 상황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감옥소에서도 기관총 소리와 대포 소리들이 밤낮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전황이 바뀌어 크메르 루즈가 뚜올슬랭 감옥소를 포기할 때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살해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가 할 일은 오직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마지막 탈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79년 1월 7일 감옥소에 비상이 걸리고 두치를 포함한 관리 가족과 경비들이 철수 작업을 하면서 수감자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들이 우리를 처형하기 위해 모이라고 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철수해야 할 사람은 거의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식량 등 필수품들을 짊어지게 하면서 만약에 자신들이 이동하는 집단에서 이탈하면 사살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말에 따라 함께 짐을 지고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동하는 도중에 전투가 벌어지자 나를 포함하여 4명이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드디어 뚜올슬랭 감옥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자신의 고향에서 처와 두 명의 아이, 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들 모두 반 나트가 뚜올슬랭에 수감되었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의 생환 소식은 그의 고향을 놀라게 했다. 마침 그를 체포한 룸(Luom)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처와 함께 그를 만나 자신을 왜 체포했느냐고 질문했다. 나트가 그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룸의 대답은 간명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논에서 일하는 당신을 불러오라는 말만 들었다. 나도 당신을 체포한 이유를 모른다.’
반 나트는 뚜올슬랭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8개월 후인 1979년 9월, 자신이 수감되어 있던 뚜올슬랭 감옥을 자유로운 몸으로 방문했다. 뚜올슬랭 학살박물관을 만드는데 협조하기 위해서였다.
박물관은 1980년 1월 7일 개관되었다. 그가 수감된 지 정확히 2년, 탈출한지 1년 만의 일로 그곳에는 반 나트가 자신이 목격한 것을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자유를 찾은 후 뚜올슬랭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매진했다. 그는 책을 저술하고 인터뷰는 물론 그림을 계속 그렸다. 2001년에는 캄보디아 영화 감독 리티 판과 함께 다큐멘터리 「크메르 루주의 살인기계」에 참여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반나트가 당시 뚜올슬랭에 근무했던 경비원들에게 직접 참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었다.
물론 그가 모든 재주를 뚜올슬랭에서의 참상에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 실력을 발휘하여 목가적인 그림도 제작하여 2000년 개인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2009년 세기의 재판이 벌어지자 그는 뚜올슬랭의 만행을 증언하는 핵심인물로 참여했다. 그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것을 위해 30년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오늘이 법정에 앉아 나의 곤경과 경험을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결국 정의가 실체화되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의 결과 즉 두치가 2012년 전쟁 범죄로 선고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심한 신장 질환을 앓아 2011년 9월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라 콜 박사는 반 나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 나트야말로 캄보디아의 양심의 목소리다. 그의 예술적 재능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 냈으며 2004년 프랑스로부터 <예술문화기사단>의 명예를 받았다. 또한 그는 저명한 작가상을 받았다. 그가 투올슬랭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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