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놀라게 한 뚜올슬랭의 만행>
뚜올슬랭에 수감된 희생자들은 캄보디아 전역에서 왔다.
뚜올슬랭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찍고 어린 시절부터 체포될 때까지 자신의 경력 등을 상세히 고백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심문 도중에 반항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무조건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렸으며 고문했다.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캄보디아 인이지만 베트남, 라오스, 태국, 파키스탄, 인도,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란드, 오스트레일리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용자 중에는 노동자, 농부, 엔지니어, 기사, 학생들도 있었지만 교수들은 물론 외교관, 정치가, 장관 등 고급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 고급 관리들의 경우 가족들이 함께 들어왔는데 이들은 갓난아기들도 데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자료에 의하면 크메르 루주의 가장 악명 높은 뚜올슬렝에서 약 17,000명이 이곳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명 미만이다. 학자들에 따라 이 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을 약 20,000명 정도로 추산한다.
이곳에는 해상에서 나포된 외국인들도 수용되어 있었다. 기록에는 79명의 외국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수용소에 시신 묻을 자리가 없자 쯔응아익이라는 프놈펜 남쪽의 과수원이었던 곳에 무차별 매몰했는데 이곳에서 8,895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1977년에서 1978년 동안 뚜올슬랭 감옥에서는 항상 1,200명에서 1,500명의 수용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생존 기간은 일반적으로 2달에서 4달이며 아주 중요한 죄수인 경우는 6개월에서 7개월이었다. 뚜올슬랭에서 1년을 지낸, 반 나트가 얼마나 특수한 예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투오슬랭은 4개의 건물로 된 여자고등학교로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교실을 모두 감옥으로 변경하고 각 창문은 철망을 설치했다. 1층 교실은 0.8 x 2미터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졌고 2층부터 8 x 6미터의 감옥으로 죄수를 한꺼번에 수용했다. 여자 죄수들은 중간층에 수감했다.
수감자들의 기상은 새벽 4시30분이다. 하루에 4번 점호를 하는데 두 손은 뒤로 하고 족쇄에 채워진 발을 보여준다. 30분 정도 손과 발을 움직이는 운동을 허락했는데 이때도 발에 채워진 족쇄는 풀러지지 않았다.
대소변용으로 조그마한 플라스틱 통이 주어졌다. 그들은 감방에서 대소변을 볼 때는 무조건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에 허락을 받지 않으면 몽둥이로 20〜60대씩 맞았다.
중요 인물은 독방에 수감되었는데 작은 방임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족쇄를 걸고 있어야 했다. 특별히 중요한 인물은 철로 된 침대에 역시 족쇄를 차고 있어야 했다. 자료에 의하면 뚜올슬랭이 포기되기 직전까지 여러 명의 중요인물이 살아있었는데 그들 모두 마지막에 살해되었다.
각 방에 붙어 있는 수감자들이 지켜야 할 주의서는 뚜올슬랭 감옥이 얼마나 공포의 장소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① 너는 나의 질문에 따라 답해야 한다.
② 네가 나에게 항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③ 혁명에 반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④ 나의 질문에 시간을 끌지 말고 곧바로 대답해야 한다.
⑤ 혁명의 이념 등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말라.
⑥ 전기고문이나 채찍을 맞을 때 소리 지르지 말라.
⑦ 명령이 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라.
⑧ 너의 반역을 감추기 위해 혁명을 팔지 말라.
⑨ 네가 이들 규칙을 어길 때에는 10대의 채찍과 5번의 전기충격을 받는다.
더운 지역임에도 목욕은 2〜4일에 한 번 허락했다. 수감 조건이 열악했으므로 피부병이 생기고 구타 등 고문에 의해 심한 상처를 받아 고통을 받았지만 이들을 위한 치료약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용소에서 발견된 사진으로 이들 각 수감자들을 수용된 첫 날과 처형되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이들 사진은 현재 박물관에 모두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부모와 함께 처형된 갓난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문이나 처형 방법은 그야말로 잔인했다.
죄수들의 손을 뒤로 묶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여자와 남자를 나체로 묶어 놓고 유두를 자르는 것은 물론 손톱을 집게로 뽑기도 했다. 다양한 물고문을 상습으로 하였고 고문하다가 죽는 것이 다반사였다. 고문이 심하여 걸을 수 없는 경우 나무에 묶어 돼지를 옮기는 것 같이 사람을 묶어 옮겼다. 뚜올슬랭 연병장에 철봉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체조용이 아니라 수용자들을 철봉대에 묶고 고문할 때 사용한 것이다.
처형이 확정된 사람들로 하여금 구덩이를 직접 파게한 후 대나무를 뾰족하게 갈거나 날카롭게 만들어 때리거나 찔러 죽인 후 묻었다. 반 나트가 증언한 것처럼 죄수들을 일렬로 세워 날카로운 꼬챙이로 한꺼번에 처음과 마지막 사람의 배와 가슴을 찔러 죽인 후 묻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도 행했다는 점이다. S-21의 교도소장 두치는 소녀의 배를 가른 후 물 속에 넣고 얼마나 오래 떠 있는지를 관찰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유사하게 목구멍을 찔린 네 살짜리 소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있다. 그가 적은 일기 중에는 고문이 너무나 심하게 자행되어 수감자로부터 정보를 얻기 전에 수감자들이 죽어버려 난처했다고 적혀있다.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감옥은 여러 곳인데 크메르 루즈의 만행 중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몇몇 수용소에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를 나무로 때려죽인 후 부모도 처형한 것이다. 처형에 사용된 나무는 이들의 잔혹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뚜올슬랭 학살박물관은 현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크메르 루즈의 잔학상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뚜올슬랭이 포기되기 직전까지 여러 명의 중요인물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은 끄새가 방문할 당시에도 핏자국이 여기 저기 남아 있었다.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 핏자국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크메르루즈가 최후까지 저항했던 앙글로 벵(Anglong Veng) 지역도 현재 테마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앙글로 벵 지역은 캄보디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적지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북쪽으로 12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다. 그들이 정부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마련했던 지하벙커 등을 원래 모습대로 보여주는데 이것은 폴포트와 같은 악당이 세계 어디에서고 다시는 탄생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이다.
<크메르 루주의 패망과 내전의 종식>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는데 친베트남 성향이 강한 동캄보디아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다. 이에 발끈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캄보디아 프놈펜을 공략한다. 원래부터 태국과 더불어 동남아의 최강자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통일된 베트남은 곧바로 크메르 루주를 공략하여 프놈펜에 입성한다.
폴 포트, 이엥 사리 등의 크메르 루주는 태국 국경으로 잠복하고 시아누크 국왕도 북경에 피신했다. 1980년 1월, 베트남에 의해 헹 삼린을 수장으로 하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이 수립되어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는 일단 막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운은 헹 삼린의 캄보디아가 미국을 패퇴시킨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미-중 수교 이후 밀월관계에 있던 중국과 미국은 강력히 이들 정권을 반대했다.
이에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1979년 2월,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공격했다. 이때 미국은 놀랍게도 외교적으로 베트남을 "아시아의 프로이센"이라 지칭하며 깡패 국가로 지목하고 CIA를 동원해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크메르 루주는 타이 국경 근처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82년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이 만든 캄보디아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같이 연합전선을 형성하는데 이때 명목상의 수장은 시아누크 전 국왕이다. 결국 캄보디아 사대는 미국,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까지 포함되는 국제전으로 비화된다. 이때 베트남은 자신들의 캄보디아 침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이 보도를 접한 세계인들이 헷갈려하는 것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제노사이드를 벌인 크메르 루즈를 미국이 적극 지원한다는 점이다.
여하튼 국제전으로 변한 캄보디아의 내전은 장기화되자 상황은 엉뚱한 면으로 변한다.
크메르 루주로서는 전세계적으로 자신들의 악행이 알려져 패배할 경우 학살자로 매도되어 매장되는 것이 뻔히 보이며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신정부는 크메르 루주가 승리할 경우 악몽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내전 양측이 극한적인 대처에 나서 캄보디아는 그야말로 악몽의 장소로 변하며 이때의 이전투구 즉 내전으로 학자들은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어쨌든 수렁에 빠져 있던 베트남군은 세계 정세 즉 1989년 9월, 동구권의 혁명 여파로 철수했다. 당시 총리로 있던 훈센은 베트남군이라는 배경을 잃고 세력이 약화되자 내전이 더욱 수렁에 빠졌는데 결국 1990년 6월, 도쿄에서 크메르 루즈와 시아누크 전 국왕, 그리고 손 산 전 총리 등 3개 정파가 직접 대담했다. 이후 1991년 10월 23일, 캄보디아 평화파리협정이 개최되어 최종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여기에는 '국제 연합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의 설치, 무장해제와 내전 종결, 난민의 귀환, 제헌의회 선거의 실시 등이다.
이를 19개국이 승인함으로써 20년에 이르는 캄보디아 내전이 종결되었다.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한 재빠른 행보가 이어졌고 1993년 5월, 국민의회 총선거가 실시되어 입헌군주제가 채택되고, 시아누크 국왕이 복위되었고 크메르 루즈의 수장인 폴 포트가 1998년 사망했다.
문제는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제노사이드가 너무나 세계를 경악시켜 적어도 주모자에 한해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캄보디아 정부에서는 당초 협상에 의해 크메르 루즈군을 사면했으므로 이들에 대한 재판이 불가하다고 버텼다.
그러나 UN이 학살과 반인권 범죄 처벌에는 시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자 캄보디아 정부가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소(ECCC)를 설립했다. 사건 발생 이후 거의 30년 만인 2011년의 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모두 6명이다. 이미 사망한 폴포트에 이어 ‘브라더 넘버 투’로 불렸던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장, 타목 전 군 사령관, S-21 교도소 소장이자 일명 두치인 카잉 켁 이에브(Kaing Guek eav 또는 lew), 키우 삼판 전 국가수반, 이앙 사리 전 외무장관과 그의 부인 이엥 티릿 전 내무장관 등이다. 이 중 타목과 카잉 켁 이에브만 구금되었고 나머지는 자유인 신분으로 재판 받았는데 이엥 사리와 누온 체아는 재판 중 사망했고 키우 삼판은 2014년 8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장 주목받은 피고는 두치인 카잉 켁 이에브로 그는 크메르 루주가 무너지자 신분을 숨기고 달아났는데 1995년 그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공격받아 아내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용케 도망쳤는데 놀랍게도 기독교 목사로 변신하여 선교에 앞장서는 등 위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본 현직 형사에게 체포되어 재판에 섰지만,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이 책임자가 아니며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처벌받아야 하는냐는 뜻인데 그는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고 2020년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 판결에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재판에 회부된 사람도 단 몇 명이 되지 않은데다 인류 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장본인들임에도 이들에 대한 최고형은 사형이 아니라 종신형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에서 미물도 죽이지 않는데 캄보디아는 불교국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2018년, 캄보디아 정부는 킬링필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로 5월 20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했다.
참고문헌 :
「공산반군 근거지가 관광지로」, 내일신문, 2003.08.26
「수십kg 돌들, 어떻게 천 꿰듯 쌓았을까」, 조선일보, 2003.11.07.
「안경썼다고 외국어쓴다고 학살…킬링필드전범,27년만에 법의 심판대에」, 태원준, 국민일보쿠기뉴스, 2006.01.17
「킬링필드」, 나무위키
「크메르 루주」, 나무위키
『One Year in the Khmer Rouge's S-21』, Vann Nath, White Lotus Press, 1998
『Voice from S-21』, David Chandler, Silkworm Books, 1999
https://theculturetrip.com/asia/cambodia/articles/vann-nath-the-paintings-will-never-forget/
http://www.inven.co.kr/board/wow/762/350914
『20세기의 드라마』, 새로운 사람들, 요미우리 신문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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