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1), 진시황제(1)

Que sais 2021. 1. 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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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인은 진시황제를 로마의 네로 황제와 마찬가지로 폭군 중 폭군으로 인식했다. 특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제의 잔혹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남았고, 20세기 최대의 고고학 발굴로 꼽히는 진시황릉과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은 진시황제가 폭군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사망 이후 2,200여 년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 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가 중국을 통일해 중국인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된 것이다.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 중국을 지양하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일 먼저 내세울 사람이 필요한데 그 덕목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바로 진시황제라는 뜻이다. 이런 중국의 변화는 무엇보다 그가 중국을 통일해 중국인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방의 오랑캐들이라며 비난받던 북방 민족으로 정복 왕조인 몽골족의 원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등의 황제들도 동북공정 이후 중화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만약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중국 대륙은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2008북경올림픽 개막식진시황제를 상징하는 전통 복장의 무용단이 등장했고, 만리장성에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천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시황제는 중국의 역대 제왕 가운데 가장 변호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 이유는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채 4년도 되지 않아 진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왕조.

사실 중국 역대 황제들의 악행을 따지자면 진시황제가 자행한 것은 양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라 항우(項羽)와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천하를 평정한 다음, 한신(韓信)을 비롯해 초나라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운 수많은 신하를 살해했다. 무지막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몇 만 명을 몰살시킨 ()나라의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나, 자기 형을 쿠데타로 쓰러뜨리고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자신이 세운 나라가 장기집권하면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미화되었다.

그들은 중국 역사에서 누구 못지않게 악행을 저질렀지만, 자신들의 선조를 미화해 줄 만한 후손들이 있었으므로 장점 속에 단점이 묻혔던 것이다.

물론 진시황제가 지금처럼 복권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악행이 전혀 없었다기보다 그를 복권시킬 만한 최소한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시황제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했을지라도 그의 단점이 장점보다 많다면 복권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해 진시황제의 복권은 그가 그동안 다른 황제에 비해 장점보다 단점이 중점적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것도 의미한다. 한마디로 진시황제에 대한 많은 부분이 과장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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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걸출한 황제>

진시황제의 성은 (), 이름은()으로 전국시대인 기원전 246, 열세 살의 나이로 ()나라의 왕에 올라 기원전 230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이웃나라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38세인 기원전 221년에 고대 중국의 연, , , , ,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이후 그는 중국의 옛 전설인 35를 모두 겸했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부르면서 황제라는 직위 명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했다. 스스로를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의 시황제로 자칭했는데, 진나라 첫 황제라는 의미로 진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은 전설상의 위대한 성왕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하늘의 신이라는 뜻으로 이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의 절대자라는 강한 자부심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Chin)나라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에서 ()라고 바꾸었고,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과인(寡人) 대신 ()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 시황제''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진시황제는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사망한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시황제는 말 그대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이며 호해'이세 황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전설에 따르면 진시황제의 시조여수(女修)로 그는 새알을 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으며, 대업은 여화(女華)를 아내로 맞이해 대비(大費)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찍이 대우(大禹)를 도와 치수에 성공한 대비는 순 임금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전설이므로 진나라의 족보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이 역사시대로 들어가면 진나라의 역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 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주나라70여 개의 제후국을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나라는 가장 늦게 나라를 세웠다. 동주(東周)의 평왕(平王)은 일정한 거처 없이 초원에서 살고 있던 오랑캐 민족 융족())과 적족()이 계속 침공하자 도읍을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 부근으로 옮겼다.

이때 진나라양공(襄公)(戎族)의 침략을 잘 막아내자, 평왕은 그를 제후로 봉하고 기산(歧山) 서쪽의 땅을 내준 후 다른 제후들과 빙향(聘享)의 예()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빙향의 예란 다른 제후들과 서로 통혼할 수 있고 제후들의 동맹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한다.

그런데 진의 양공이 하사받은 기산 서쪽의 땅은 본래 적족이 살고 있던 위험지역이었다. 이는 주나라의 평왕진의 양공에게 융과 적을 쫓아내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으라고 명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으로 말하면 진나라는 오랑캐를 쫓아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진나라는 그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면서 기산에서 옹주(雍州) 즉 현재의 섬서성 일대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장악했다. 이후 계속해서 힘을 기른 진나라는 서쪽으로는 현 감숙성(甘肅省) 중부지역, 동쪽으로는 화산(華山) 일대까지 모든 관중지역을 다스렸다. 감숙성 지방의 서쪽에는 돈황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하서주랑이 있었는데, 이들 지역은 지금도 인간이 살기 힘든 사막지역으로 당대에 기마민족의 근거지였다.

영토가 늘어나긴 했지만 기마민족인 융과 적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탓에 진나라 역시 말 타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것이 진나라가 각 제후국으로부터 야만족이나 다름없는 비중국인나라로 취급받은 이유. 기원전 266년에 ()나라진나라를 평가한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진나라는 융족, 적족과 동일한 관습을 갖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행동양식이나 올바른 관계맺음, 유덕한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특히 전국시대의 각 제후국은 진나라에서 당대에 문명사회임을 보여주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아 진나라를 상종하기 어려운 나라로 지목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동쪽의 제후국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열악한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근간으로 했던 진나라음악 대신 칼을 들었고, 그것은 결국 중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진시황제 일생>

진시황제의 출생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259년 음력 1,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영이인장양왕과 왕비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 사기<진시황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진시황제는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은 진을 위해 자식을 조나라에 인질로 보냈는데 여불위(呂不韋)의 여자를 보고 기뻐하며 취하여 시황제를 낳았다. 진나라 소왕 48 정월 한단(邯單)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을 정이라 했고 성은 조 씨였다

 

여기에서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기<여불위전>에 보면 진시황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적혀있다.

 

여불위는 한단 시내에 많은 첩을 두고 있었다. 그 중 절세미인이며 춤을 잘 추는 여자와 살고 있었는데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자초(子楚)는 여불위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여불위에게 그녀를 달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미 자초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면서 큰 재화를 얻으려는 계략을 상기하며 그 첩을 바쳤다. 그녀는 임신한 몸을 숨기고 자초와 살며 만삭이 되어 아들 정()을 낳았다. 자초는 마침내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