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4), 진시황제(4)

Que sais 2021. 1. 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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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가 만든 하나의 중국>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즉시 관료행정기구와 군현제를 통해 중국의 정치적 실체를 바꾸기 위한 칼을 빼들었다. 그는 과거의 통치체제, 제후국 제도를 타파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 이유는 통일된 중국에서 주나라와 같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 머지않아 또다시 분열될 것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전국을 ()과 현()으로 나눠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과거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당연히 기존 집권세력의 반발이 따랐지만 시황제는 과감하게 행동하여 군현제를 확실하게 접목시켰다.이것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통치한 기간이 단 10여 년에 불과함에도 진시황제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로 칭송을 받는 이유다.

엄밀한 의미에서 군현제는 진나라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며 사라진 후 한무제 시기에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추진한 군현제가 한무제 때 부활한 후 현재의 중국을 구성하는 기본틀이 되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중국이란 틀을 진시황제가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이유다.

그가 통일 후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은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도 통일을 촉진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정치·지리적 통일, 화폐 통일, 도량형 통일, 문자 통일, 사상 통일 등은 이후 중국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리적 통일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각 나라들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렀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 침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어시설을 구축했는데, 통일이 되자 이러한 시설은 오히려 지역 간의 교통을 방해하는 장해물이 되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도로.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의 대부분이 전차(戰車)였기 때문이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는데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통일 진나라에서 전차의 폭이 다르다는 것은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키는 주범이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는 통일 중국의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하면서 수레의 양쪽 바퀴 사이의 거리통일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동궤(同軌)라고 한다.

그리고 주요 거점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군 주둔지를 설치하는 동시에 도로망을 건설했다. 7,500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망은 수도와 연결되었는데, 이것은 당시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너비의 3차선 도로로 너비가 무려 15미터나 되며 이를 직도(直道)라 한다. 이 도로들 주변에는 가로수를 심었고 중앙에 황제 전용도로치도(馳到)를 설치했다. 치도를 설치한 것은 전국 곳곳을 직접 순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실제로 그는 순행 중에 사망했다.

수로 건설 역시 진시황의 커다란 업적이다. 진시황 33(기원전 214), 중국 양쯔강 이남의 저장성 부근에서 베트남까지의 영남 정벌 때 산이 높고 길은 막혀 군수물자 공급이 힘든 탓에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문제를 간파한 진시황은 감어사()에게 수로를 건설하게 했고 결국 총 길이 34킬로미터에 이르는 영거(靈渠)가 건설되었다.

영거의 남쪽 수로는 이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북쪽 수로는 상강(湘江)으로 흘러들어가 장강과 주강(珠江)을 연결한다. 본래 군수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만든 영거는 나중에 중원과 영남지역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관개수로로 활용되어 인근 지역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에도 시황제 때 건설한 수로가 관개수로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또한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이용하는 등 농경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화폐 통일

기록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이미 ()나라의 우()임금 시대화폐를 주조해 유통시켰다고 한다.

우임금 시대에 화폐를 주조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지만, 하남성 언사(偃師)에서 발견된 이리두(二里頭) 문화유적지에서 대량의 화폐가 발굴된 점으로 미뤄 하나라 말기에 화폐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춘추시대에 농경, 제철, 소금 제조 등의 산업기술과 농업 및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생산력이 급속도로 증가했고 더불어 구리 화폐가 통용되었다. 그런데 각 제후국이 독자적으로 관할 구역을 통치하므로 경제적 분할은 물론 화폐까지 각 국이 달랐다.

당대의 화폐는 삽 모양을 본뜬 포폐(布幣), 수렵용 도끼가 변한 도폐(刀幣), 바퀴를 본떠 만든 원전(圓錢), 조개 모양을 모방한 의비전(蟻鼻錢)이 주로 유통되었다. 다양한 화폐가 통일 후에 여러 가지 혼란을 빚어내자 진시황 37(기원전 210)포혜, 도폐 등 모두 폐지하고 무게가 반량(8g)으로 원형에 중앙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엽전 모양의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했다. 반량전이란 반량(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출토된 진나라의 반량전은 크기와 중량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그 출토지도 사천과 섬서를 중심으로 한 옛 진나라의 영토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진나라가 화폐통일을 추진했지만 철저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멸망했음을 의미한다.

 

도량형 통일

진시황제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만들었으므로 여러 가지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각 지역마다 달랐던 도량형척관법으로 일원화한 것이다. 척관법 시행으로 지역마다 제도와 표준 용기가 달라 일일이 환산해야 했던 수고를 덜게 되고, 세금도 동일한 단위로 걷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조선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진나라통일 도량기(저울(좌) 진수량(우))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지금처럼 돈으로 내는 게 아니라 곡식, 옷감, 지역 특산물 등 물납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탐관오리들은 엉터리 측량 기구를 사용해 세금을 많이 거두고 나라에는 정해진 양만 바침으로써 그 차이를 착복하는 것이 비일비재 했다. 암행어사들의 가장 큰 업무가 세금을 걷는데 쓰이는 가 국가 표준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척(鍮尺)이라는 표준 자를 가지고 다니며 관리들의 세금 부당징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위정자들은 길이(), 부피(), 무게(), 도량형의 기준을 통일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그래야 세금을 공정하게 거두고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이 바로 도량형 통일이다.

전국시대에는 제후국들의 도량형 역시 들쭉날쭉 제멋대로였다. 문제는 명칭만 다른 것이 아니라 단위와 쓰임새도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 동주구리 자는 한 자의 길이가 23.1센티미터, 초나라의 구리 자는 한 자의 길이가 22.7센티미터와 22.3센티미터로 각각 달랐다.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다음해인 기원전 221년에 도량형 통일에 관한 조서를 내렸다.

 

황제는 천하의 제후들을 모두 병합해 백성을 안정시키고 승상, 왕관 등에게 도량을 제정하도록 명해 백성이 의혹을 품지 않도록 명백히 하라고 명했다.’

 

진시황제가 되자마자 도량형 개혁에 착수했다는 뜻인데 학자들은 진한시대도량형 제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도제(度制) : (), (), (), ()으로 나누며 10진법을 채택한다.

- 양제(量制) : (), (), (), (), ()으로 나누고 2약이 1합인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10진법을 사용한다.

- 형제(衡制) : (), (), (), (), ()으로 나누며 24수가 1, 16냥은 1, 30근은 1균이고 4균은 1이다.

 

이것은 󰡔한서(漢書)󰡕에 기록된 것이지만, 한이 별도의 새로운 도량형 제도를 공표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진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진과 한의 도량형이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황제는 도량형의 오차범위와 그 처리에 관한 표준규정을 정해 도량형 기준을 속인 경우의 처벌까지 명확히 규정했다.

 

진시황제 조칙판

2대 황제 호해 시절이사(李斯)와 풍거질(馮去疾)이 쓴 반포문을 보면, 그들이 도량형 통일을 진시황의 중요한 업적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법제를 정비하고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제가 이룩한 업적으로 그 내용을 모두 조서로 남긴다. 후대에는 누구라도 시황제라 칭할 수 없으며, 오직 그만이 영원한 시황제다. 만약 이후의 계승자가 이를 어기면 성덕하다고 볼 수 없다.

 

본래 진나라에서는 농업을 장려하고 상공업을 매우 경시했다. 생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상거래 같은 방법으로 먹고사는 것을 죄악으로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상인이 양식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풍년이나 흉년에 곡물 값이 등락하는 기회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상인들이 판매한 물품에 매겨지는 세금이 무려 10에 달했다. 물품 가치의 10배나 되는 조세를 거둬 상인들이 이익을 남기지 못하게 했던 셈이다. 반면 농경과 방직에 종사해 식량과 직물을 많이 생산하는 사람부역도 면제해 주었다.

그런데 막상 통일을 하고 보니 다른 제후국에서는 진나라와 달리 상업을 장려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빠른 시간 안에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상공업을 완전히 규제하지 않았다. 그러자 각 지역 간의 물물교환과 교류를 위한 도량형에 큰 차이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고 금화와 동전의 무게를 일정하게 규격화한 이유인데 도량형이 통일되고서야 비로소 중국은 하나의 중국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문자 통일

일반적으로 한자는 3,0004,000년 전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가장 오래된 한자로 인정받는 것은 근래 서안의 반파촌(半坡村)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부호로 무려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전국시대 들어 제후국의 특성에 따라 글자가 달라지면서 문화적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통일 원년, 진시황은 서체와 문자를 통일하라고 명령한 다음, 문자의 규범본을 만들어 시행토록 했다.

 

- 한자의 각종 편방(偏旁) 즉 한자의 오른쪽 ()과 왼쪽 ()의 형체를 통일하고 이를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

- 글자마다 사용되는 편방은 한 가지로 정하며 다른 종류로 대신해서 쓸 수 없다.

- 편방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며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 매 글자의 획수와 필순은 기본적으로 고정된다.

 

문자의 규범화는 단순히 알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로 통일한다는 것뿐 아니라 한자 정형의 기초를 다진다는 목적도 있다. 어쨌든 진나라 이후 한자의 서법전서(篆書)에서 예서(隸書), 예서에서 해서(楷書)로 바뀌지만 한자의 자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시 말해 한자는 안정적인 형상과 구조를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중국에서 진시황제의 문자 통일이 갖는 의미는 다음 글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 중국은 영토가 광대해 지방마다 말이 달랐지만, 문자를 통일함으로써 지방간의 원활한 교류가 가능해졌다.

- 진나라 이후 중국은 수차례에 걸쳐 군웅들이 할거하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통일된 문자라는 민족의 구심점 덕분에 결국 하나로 통일될 수 있었다.

 

중국이 현재와 같은 중국을 유지하고 통일된 문화 및 민족성을 이룩하는 데 문자 통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진시황은 단순한 정복자로서 군림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진정한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데 진력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학자들이 서체의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것과 새로운 중국을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비석에 새기기도 했다.

 

태양과 달이 비추는 곳에서

배나 마차로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질서를 지키고

황제의 바람을 만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