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3), 진시황제(3)

Que sais 2021. 1. 11. 18:30

youtu.be/RNEAilSedmw

<정복에 나선 진왕>

노애, 여불위가 사망하고 조 태후까지 허수아비가 되자 나이 22세의 정은 비로소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친정 체제를 굳힌다.

진시황제의 개인사에서 매우 특이한 것은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다. 당대에 후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려지기는 진시황제의 자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이런 서술이 있다.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 말은 진시황제에게 많은 후궁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들이 진시황제의 행보에 어떤 문제점도 제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집안 단속을 잘 했다는 뜻이다.

더불어 놀라운 것은 진시황제가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지지만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면에 관해 일부 학자들은 숙청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공신 숙청은 군주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개국 초창기에 많이 일어나는 편인데, 진나라상앙의 변법 이래로 제도가 상당히 정비되어 있고 진시황제의 입지도 탄탄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여하튼 정은 상방 여불위가 제거되자 중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모사인 울료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한마디로 진나라의 공격에 6국이 서로 불신하여 돕지 않았다.

이후 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한나라를 멸망시킨 후 차례로 조나라, 위나라를 격파했다. 이후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했다. 그러나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60만 대군으로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조나라에서 볼모로 있었을 때 친구인 연나라 태자 연단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한국에서 형가강원도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은 뒤에서 설명한다. 암살이 실패하자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하여 우여곡절 끝에 연나라를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재위 17년인 39살에 중국 천하를 통일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정말 깐깐하다. 엄밀히 말하여 진시황제가 모든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 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야왕(野王)으로 옮겨놓았지만 멸망 조치 즉 합병하지는 않았다. 물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이는 명의만 변경한 것으로 진시황제에 의해 중국이 완전 통일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깐깐하게 따진다면 중국의 완전 통일호해에 의해서라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

진시황제를 바로 보려면 그가 중국을 통일할 당시의 전후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몇 백 년을 이어온 6개 국(, , , , , )을 단 10년 만에 평정했다는 것이다. 진나라는 진시황 9년인 기원전 238년부터 동쪽에 있는 한, , 위를 줄기차게 공격했다. 그리고 진시황 17년 즉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접수했고, 진시황 26년인 기원전 221년에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데 이들에 걸리는 시간은 단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다. 평균 2하나의 국가를 정복하는 속도로 6개 나라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진시황 자신은 단 한 번도 군사를 이끌고 직접 전쟁을 치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통일전쟁은 몽념(蒙恬)과 왕전(王翦)이 이끌었다. 이는 진시황이 엄청난 카리스마로 이들 장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에게 진나라는 여전히 미스터리. 특히 그들은 어떻게 해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들이 제기하는 의문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뉜다.

 

중국이 통일되어야 했는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는가?

중국을 통일한 시기가 진시황이 집정한 기원전 221년인가?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은 간단하다. 중국이 통일되어야 했던 이유는 원래 중국이 통일된 국가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11세기에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는 새로 정복한 토지를 왕실 귀족과 주나라의 정치계급, 전 왕조의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를 봉방건국(封邦健國)이라고 한다. 봉방건국은 훗날 중국 각지에서 수없이 나타난 크고 작은 정치 실체로 제후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후국은 기본적으로 주 왕실의 복제품으로 이들은 주 왕실과 동일한 정치제도를 갖고 있었다. 제후국을 의미하는 분봉국(分封國) 역시 주나라 천자로부터 나라를 세울 자격을 받았다. 이는 곧 각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통일된 국가체제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시황제가 여러 나라로 나뉜 나라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뉘어 있던 중국을 하나로 합병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두 번째 질문 역시 복잡하지 않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유는 당대에 진의 역량이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는 동쪽으로는 황하 강, 남쪽으로는 산맥 등으로 둘러싸여 거의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오랑캐 외에는 적이 없던 진나라는 강족 등의 기마민족과 맞서기 위해 기마부대를 양성했고, 이것은 다른 제후국에 비해 전술적 이점을 안겨주었다.

또 다른 이점은 다른 제후국들이 인근 제후국과 패권다툼을 벌이는 동안,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져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대혼란 속에서도 진나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진시황제가 통일전쟁에 나섰을 무렵에는 6개의 제후국이 자기들끼리 이미 전력을 소비한 상태라 진나라의 공격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덕분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거의 2년마다 하나씩 6개 나라를 병합했다.

세 번째 질문은 왜 하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느냐이다. 진시황이 왕에 올랐을 때, 대세는 이미 진나라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사학자 천징(陳靜) 교수중국을 통일한 것은 개인 진시황이 아니라 시대가 낳은 진시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에는 모순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진시황제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도 운명에 맡겨진 배역만 연출한 것이므로 그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효과는 똑같았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밥상을 차려주어도 밥을 제대로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인데 진시황제는 밥을 제대로 먹는 실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진시황은 폭군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매우 근면했다. 󰡔사기󰡕진시황본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저울로 결재서류의 무게를 달아 밤낮으로 결재해야 할 분량을 정해 놓고 그것을 모두 처리하기 전에는 쉬지 않았다.’

 

이 글은 신선술을 연구하는 방사(方士)였던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 진시황제를 비난하기 위해 적은 것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진시황제가 이후의 중국 역사에 많이 나타나는 무능한 황제들과 달리 정사에 몰두했음을 보여준다.

시황제의 장점은 인재를 대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각 나라는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대표되는 인재들을 구해 나라를 통치했다. 결국 진나라의 중국 통일은 시황제가 가장 유효적절하게 제자백가들을 등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의 홍매(洪邁)가 저술한 󰡔용재수필(容齋隨筆)󰡕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일곱 나라가 천하를 다툴 때 세상의 인재를 끌어들이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여섯 나라에서 등용한 재상들은 대개 종친이거나 그 나라 사람이었다. (중략) 유독 진나라만 이와 달랐고 처음으로 진나라를 위해 패업을 이루게 한 자는 위나라 사람 상앙(商鞅) 공손앙이었다. 그 외에도 조나라 사람 누완(樓緩)이 있으며 장의(張儀)위단범수(范睢) 등은 모두 위나라이며, 채택(蔡澤)은 연나라, 여불위는 한나라, 이사(李斯)는 초나라 사람이다. 진나라는 이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나랏일을 맡기고 의견을 수렴했다. 진나라가 결국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들의 힘이었다’‘

 

그뿐 아니라 진시황제는 과감하게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역사 속에서 그는 어느 정도 유아독존적 색채가 농후하지만, 반면 간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잘못된 점을 선뜻 바로잡을 줄도 알았던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노장 왕전(王翦) 장군의 등용이다. 60만 대군이 필요하다는 왕전의 말을 무시하고 20만 명이면 충분하다는 이신(李信)의 말을 따랐다가 그가 초나라 공략에 실패하자 진시황은 즉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왕전이 살고 있는 빈양(頻陽) 즉 현재의 섬서성 부평으로 찾아가 솔직히 용서를 빌고 왕전에게 지휘권을 주겠다고 했다. 왕전이 늙고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거절하자 진시황은 여러 차례 권유하며 모든 것을 왕전의 뜻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삼고초려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갈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하튼 왕전이 부름에 응하자 출병 당일 진시황은 친히 패상(覇上)까지 나와 그를 전송했다고 한다.

이처럼 진시황통일 대업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고 상금으로 인재를 불러 모았으며 심지어 아랫사람에게 간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진시황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가 얼마나 일방적이었는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