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2), 진시황제(2)

Que sais 2021. 1. 1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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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에서 왕이 된 진시황제의 아버지>

사마천의 이야기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원래 진시황 정()의 아버지는 여불위이지만 진나라의 공자 자초(子楚)의 아들이 되어 결국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초의 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초의 적통을 받았다는 뜻인데 사실 사마촌이 이렇게 적은 것은 진시황제를 매우 나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진시황제의 아버지인 자초의 이름이인(異人)으로 진 소왕(昭王)의 손자. 진나라와 조나라장평(長平)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조나라가 참패하였고 진 소왕이 여세를 몰아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자 조나라와 일시 타협한다. 전국시대에 제후국 간에 결맹을 맺을 때에는 인질을 파견했는데 관례대로 진 소왕은 손자 이인(異人)인질로 한단으로 보냈다.

그런데 당대의 인질이란 하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지내야 했다. 일단 쌍방 간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제일먼저 인질을 처형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질로 가는 왕자나 왕손은 자신의 국가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마침 조나라에는 양적(陽翟) 즉 현재의 하남성 우현 사람으로 이재(理財)에 밝은 거상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있었는데 그는 자초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전국책(戰國策)󰡕에 보면 그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자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이익이 납니까?”

열 배.”

주옥을 팔면 얼마나 많은 이윤이 나지요?”

백 배.”

그러면 왕을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키면 얼마나 벌 수 있지요?”

그야 셈할 수 없지.”

이 일화는 여불위가 비범한 정치력까지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그는 이인이 차후에 출세할 인재라고 보고 그에게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500근이나 되는 황금을 선물로 보내자 처음에는 이인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 여불위는 명쾌하게 이인의 집안을 먼저 빛나게 한 후 여 씨의 가문을 빛나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인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 소왕의 나이가 많으니 내 부친 안국군(安國君)이 관례에 따라 군왕으로 즉위할 것이지만 아버지에게는 20여 명의 아들들이 있으므로 누가 군왕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나는 장자도 아닌데다 진나라에 있지도 않으므로 장래에 군왕으로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몸 하나 보존하기만 해도 나쁘지 않다.’

 

자초가 왕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바늘 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왕위에 대해 어떤 바람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는 보는 각도가 달랐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우리가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군왕이 되는 것은 장사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은 자본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이 이익을 남기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한다면 군왕이 될 수 있다.’

 

여불위의 묘수는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의 총애를 받는 왕후 화양부인(華陽夫人)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왕이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화양부인이 미모와 재주가 출중하였으나 그녀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후 여불위는 자신의 재산을 투입하여 진나라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포섭하면서 그의 이름을 진나라에 알리기 시작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자 자초의 이름으로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보내 양아들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화양부인은 과연 여불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양부인은 진왕의 면전에서 이인을 계속 칭찬하고 나중에는 여불위의 의도에 따라 이인을 태자로 삼게 만들었다. 이인이 자초가 된 것도 화양부인이 이인이 초나라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초(子楚)라는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나라가 이인을 죽이려했지만 여불위의 활약으로 무사히 진나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여하튼 당대에 왕위 계승 서열이 낮은 자초가 수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일약 진나라의 왕세자가 되었고 마침내 진 장양공(莊襄公)에 올랐다. 어떤 암투도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여불위의 묘책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졌는데 이인은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여불위를 재상에 임명했다.

 

<사마천 글의 진위 여부>

그런데 사마천의 기록처럼 정말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현대라면 DNA로 친자 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2000년 전에 친자여부를 가리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정사사마천󰡔사기󰡕에 기록되었으므로 권위를 인정받지 않을 수 없다.

한서를 작성한 반고(班固)도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 기록했다. 남조의 송나라 배사(裵駟)사기집해에서 진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정(呂政)시황으로 이름은 정이다. 여불위가 총애하는 비가 임신을 하자 장양왕에게 바쳐 시황을 낳게 하였기에 여정이라 부른다.’

 

이후 많은 역사가들이 진시황이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관점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진시황이 여불위의 핏줄이라는 설명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보냈다.

명나라 사학자 탕빙윤(湯聘尹)사패(史稗)에서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기록은 전국시대 호사가들의 지어낸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의 왕세정(王世貞)사마천의 <여불위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여불위가 고의로 지어낸 이야기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퍼뜨렸다고 분석하였다. 특히 진나라에 멸망당한 6국의 유민들이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가짜 뉴스를 만들어 욕설을 퍼부으면서 자신들의 울분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역시 여불위와 진왕정 비판이란 글에서 다음의 세 가지가 석연치 않다고 적었다.

 

여불위의 아이에 대한 기록이 󰡔사기󰡕에는 보이지만 󰡔전국책󰡕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전국책󰡕 <초책(楚策)>에 나오는 춘신군(春申君)과 여환(女瑍)의 고사와 유사하다.

③ 󰡔사기󰡕의 내용이 서로 모순인 부분이 있다.

 

곽말약은 우선 사기전국책이 서로 기술 방식이 다른 점을 지적했다.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사기전국책보다 간결하고 사실적으로 기술하는데 반해, 전국책은 매우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지만 다소 소설적인 냄새가 묻어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므로 사기에 나온 기록이 󰡔전국책󰡕에 나오지 않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 진시황 출생 같은 중요한 이야기가 󰡔전국책󰡕에 기록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시황제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훗날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국책󰡕은 전한의 유향(劉向, 기원전 77기원전 6)이 기원전 476년 위나라 도공(衛悼公)부터 기원전 222년 진시황제 시대까지의 250여년에 걸친 전국시대 유세가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기에 등장한 진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이란 말이 전국책에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의 자료 중에 이들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향󰡔사기󰡕의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이의 신빙성을 의심하여 적지 않았음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제주국제대 이권홍 박사는 과학적 측면을 보더라도 <여불위열전>의 기록은 재고해 볼 여지가 많다고 적었다. 기록을 보면 조희가 임신한 후 대기(大期)가 되자 아들 정을 낳았는데 여기서 대기란 말에 주목했다. 동진의 서광(徐光)대기를 대략 12개월, 삼국시대 초나라 사람 초주(譙周)10개월로 보았다. 조희가 여불위의 아이를 이미 임신했다면 자초에게 간 후 10여 개월 후에 영정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영정이 자초의 아들일 수밖에 없고 여불위의 혈육이 될 수가 없다는 지적이다.

 

<진나라 왕이 된 정>

영자초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사망했다.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는데 그는 즉위한지 3일 만에 사망하여 영자초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다. 그러나 장양왕도 3년 만에 사망하여 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진왕 정이 워낙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므로 장양왕의 후원자인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이 되었으며 추후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라는 칭호까지 얻었고 섭정이 되었다. 실제 진나라의 실권은 여불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많은 이야기가 돌아다닌다. 사기에는 간접적으로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진시황이 어렸을 때 태후는 자주 여불위와 사통하였다. 시황제가 성장하였지만 태후의 음탕은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발각돼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몰래 음경이 큰 노애(嫪毐)를 사인으로 삼게 하였다.’

 

노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어느 날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왕의 계부인데 두려울 게 뭐냐?고 말을 했다. 이 말을 신하로부터 들은 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했다.

노애가 환관도 아니며 태후와 사통을 하였고 두 명의 아들을 뒀으며 진왕이 죽으면 그 아들로 하여금 왕위에 앉히려고 계획하였다는 것도 밝혀졌다. 노애는 들통나자 도망친 후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진왕의 옥새와 태후의 옥새를 위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이 이를 곧바로 진압했다.

진왕은 전국에 노애를 살려서 잡아오면 백만금, 죽이면 50만금이라는 거대한 현상금을 내리자 결국 체포되어 끌려왔다. 진왕은 노애를 거열(車裂)하여 대중들에게 본보기로 삼았고 3족을 멸하는 것은 물론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함께 살해했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처형할 수 없는 일로 처음에는 유폐하였으나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고 한다.

이 사건은 여불위에게도 파급되었다.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국의 직위를 파면하고 봉국(封國) 하남(河南)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1년 후 제후 빈객들이 여불위를 사면할 것을 청하자 진왕은 이에 답신을 보냈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중부(仲父)라 불리는가? 무엇을 근거로 하남에 봉하여 10만 호의 식읍을 향유하는가? 그대와 진왕은 무슨 친척 관계가 있어 그대를 중부라 불러야 하는가? 가솔을 거느리고 촉지로 옮겨가라.’

 

이 글을 보면 진시황제가 자신이 여불위와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고 완강하게 부정함을 알 수 있다.

진시황여불위가 그의 생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불위가 그를 보좌할 때 내렸던 중부라는 존칭마저 빼앗아버렸다. 그 서찰을 본 여불위는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끊었는데 진시황이 생모를 살려둔 것을 감안하면 여불위가 정말로 생부라면 진시황제가 과연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하는 주장도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