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제국 등장>
흉노(북적)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로 보아서 천하에 무서운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흉노에 대한 진시황제의 생각은 만리장성을 쌓아서라도 그들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의문에 대해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강력한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했다면 격파할 수 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은 전국시대에 흉노의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흉노는 인접한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흉노를 통제하고 있었던 작은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할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흉노 제국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당대의 난세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전국시대 말기 중원의 대혼란을 피해 많은 인구가 흉노 지역으로 넘어갔는데 그들 중에는 각국의 고위직은 물론 각종 기술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김기협 박사는 제철(製鐵)을 비롯한 생산기술부터 정치기술과 병법(兵法) 등 대규모 기술이 흉노에 전수되었다고 설명했다.
사기 <흉노열전>에 바로 그러한 정황이 발견된다. <흉노열전>에 문제(文帝)때의 환관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그는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순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흉노 선우 묵특(冒顿)에게 그야말로 냉철한 조언을 한다. 처음 흉노 진영에서 한나라라가 제공한 비단, 무명, 음식 등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것은 초원에서 그야말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중항열은 그 점을 들어 묵특에게 진언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꾸어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풀과 가시밭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은 점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젖과 유제품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한 그가 선우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도록 시켰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항우를 격파한 유방을 제압한 것이다.
여하튼 한나라 초기 흉노에게 대패한 후 견지한 정책은 ‘화친(和親)’이다. 화친 정책은 중국으로서는 굴욕이지만 몇 십 년 동안 전투력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심지어 사마천은 흉노의 선우를 비롯하여 모든 흉노족이 만리장성을 오가면서 한나라와 친해졌다고 개탄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기원전 141년 괄괄한 무제가 등극하면서 흉노와의 조공 외교에 변화가 찾아왔다.
평화로운 시기를 거치는 동안 국가의 재정상태가 호전되자 무제는 공격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황실의 창고에 돈이 얼마나 많았던지 동전을 꿰는 끈이 삭아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무제는 넘쳐나는 국고로 군대를 육성했고 군사력은 그야말로 극적으로 고조되었다. 동시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불리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이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24년에는 흉노의 선우를 거의 사로잡을 뻔했을 만큼 무제는 군사력으로 흉노를 압도했다.
무제의 공격으로 흉노가 북쪽 깊숙이 후퇴하자 무제는 지체 없이 진나라 때 몽염이 세운 방어 시스템을 복구했다. 학자들은 당시 무제가 과거의 성벽을 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북쪽으로 전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는 그 무렵 북쪽 변경을 따라 새로 건설한 성벽이 수천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제 역시 진시황제와 마찬가지로 장성과 기마부대 육성을 같은 맥락에서 다룬 것이다.
이것은 중국 하북성에서 한나라 때 성벽으로 추정되는 15킬로미터의 성벽이 발굴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무제 때 축조된 내몽골의 성벽 폐허도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제방과 봉수대, 요새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 국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더 전진한 내몽골 오원(五原)의 도시 폐허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기와와 도자기는 물론 농사 도구까지 있다. 이는 무제가 흉노를 완전히 압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한나라군은 장건(張騫) 등의 활약으로 서역, 즉 현 감숙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옥문관(玉門關)까지 연결했다고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만리장성의 서쪽 끝은 가욕관으로 인정하지만,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볼 수 있는 옥문관과 양관(陽關)에도 장성의 흔적이 있어 이곳까지 연장되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돈황(敦皇)을 탐사하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헝가리 출신으로 둔황의 장경동 유물을 유럽에 소개함)은 1900년대 초에 만리장성의 서쪽 끝으로 추정되는 옥문관을 찾아내고 감격에 젖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벽 노선을 따라 16킬로미터 정도를 걸어 흙으로 다져 만든 커다란 탑에 도달했다. 그 탑은 상층부가 약간 훼손되어 위쪽이 잘려나간 피라미드 같았다. 표면에는 소금기가 진하게 배어 있어, 밤중에는 희뿌옇게 빛을 냈다.’
옥문관의 방어시설은 6,000~7,000명의 병사를 수용할 만큼 거대했고, 한나라가 이곳을 기원전 57년까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어쨌든 무제는 흉노와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지만 돈을 펑펑 쏟아 붓는 바람에 재정이 거덜 나고 말았다. 이는 무제가 사망한 후 80년간 영토 확장은 물론 성벽 건설을 자제하고 조공정책보다 더 우호적인 화친정책으로 돌아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나라는 북방 유목민과 한편으로는 동맹을 맺고 뇌물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격하거나 방어태세를 갖췄다. 나아가 북쪽 변경 전체에 걸쳐 성벽을 보수하거나 축조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진시황제를 이은 한나라에 의해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중국을 지배한 각 나라는 나름대로의 전략과 전술에 따라 만리장성을 활용했다.
만리장성에 가장 공을 들인 나라는 위․촉․오의 삼국시대와 5호16국 시대에서 고구려와 많은 연계를 맺고 있던 북제(北齊)로 북제는 불과 6년(552〜557) 안에 토성으로 무려 1,000킬로미터의 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제의 만리장성만 잘 알려져 있지만, 북제에서 1,000킬로미터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는 것으로 볼때 중국에서 장성쌓기는 기본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다면 그야말로 비난받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북제의 만리장성 쌓기를 진시황제에 비견하는 사람들은 없다. 진시황제의 만리장성을 특별히 비난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장성>
장성에 남다른 공을 들인 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다.
본래 수나라는 흉노의 후신인 선비(鮮卑) 계열이라 북방 기마민족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나라가 장성을 본격적으로 축조한 이유는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당대의 강자인 돌궐을 막기 위해서였다.
수나라의 만리장성 건설은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수나라의 성벽이 워낙 견고한 데다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돌궐은 수나라를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틈에 수양제(隋煬帝)는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물론 수나라는 살수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는 수나라가 만리장성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는 만리장성을 유지하는 것이 전력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고 전혀 성벽을 쌓지 않았다. 실제로 당태종(唐太宗)은 휘하 장군에게 만리장성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국경을 지키는 사람을 임명하면 될 텐데 양제는 긴 성벽을 건설하느라 국력을 고갈시켰다. 나는 그대들에게 북쪽을 지킬 것을 명한다. 그러면 돌궐족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긴 성벽보다 훨씬 낫다.’
당나라는 만리장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방을 만리장성에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당나라가 성벽 자체를 파괴했던 것은 아니다. 이 지적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포가 없던 시절이 장성이 나름대로 효율적인 면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를 위해 장성 전체에 수비대를 배치해야 하는데 당시의 중국 상황을 볼 때 비상사태가 아닌 경우 전 구간에 걸쳐 수비대를 배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다시 한 번 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시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국으로 진입하기 이전에 상당기간 만리장성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국을 장악하자마자 오히려 만리장성을 보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사실 흉노나 몽골족 같은 유목민족은 말을 기본으로 하므로 성벽에서 방어하는 것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하지만 소규모의 전투에서 장성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즉 칭기즈칸의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중국을 수호하지 못했다. 일단 중국을 점령하자 몽골의 원나라는 장성보다 자신들의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는 교역과 소통 루트를 선호했다. 또한 국가를 수호하는 데도 장성보다 재빠른 기마부대의 기동력을 동원해 만리장성의 취약점을 공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장성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원나라를 이은 명나라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장성 건설을 추진했고, 사실상 현재와 같은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명나라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장성을 견고하게 쌓은 이유는 원나라의 원류라 볼 수 있는 몽골과의 교류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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