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22)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1)

Que sais 2021. 1. 1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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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병마용갱>

끄새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3장소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중국 협서(陜西)성의 서안(西安)을 제시한다. 나머지 2곳은 중국이 워낙 광대하므로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지만 한민족의 터전인 홍산 우하량북경 인근의 주구점이다. 주구점은 적어도 60만 년 전 불의 흔적이 있어 유명하지만 특히 동양계에 나타나는 후두부 특징이 나타나 우리의 선조로 인식하여 더욱 친근성이 있는 곳이다.

서안은 중국 내륙에 위치하지만 과거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차로인 실크로드의 기점 즉 과거에 장안(長安)이라고 하면 곧바로 그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서안은 중국의 어느 곳보다 명소가 많은 곳이다.

서유기로 유명한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고대 인도 언어 중 하나)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는 대안탑,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2000여 년 동안 수많은 명필들이 적은 2,300개의 비문(碑文)이 숲을 이루고 있는 비림(碑林), 당대 세계를 주름잡았던 각 황제들의 능묘가 산재한다. 또한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지 등은 물론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산서성 박물관도 압권이다.

그러나 서안에서의 압권은 서안 동쪽에 완만한 언덕들로 구획지어진 여산(驪山, 麗山)이라는 작은 둔덕이다. 이곳 사람들은 수세기동안 그 둔덕이 자연적으로 생긴 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74 극심한 가뭄이 중국 진천(秦川)을 휩쓸고 있을 때 여산 기슭의 서양촌(西洋村)에서 농부가 우물을 파는데 갑자기 구덩이가 푹꺼졌다. 놀랍게도 바닥에서는 물 대신 진흙으로 구운 실물 크기 병사들의 머리가 나타났다. 이것이 세계를 놀라게 한 진시황제의 지하군단 즉 병마용갱의 일부 유적으로 진시황릉으로부터 동쪽으로 1,350미터 떨어진 곳이다.

사실 이곳은 이미 1932년부터 무언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 상태다. 1932 묘지 주변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후 주변에서 같은 모양의 인형 4개가 잇따라 발견되었지만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는데 농부의 발견으로 비로소 본격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용갱(俑坑) 즉 인형이 묻힌 땅굴이 어느 시대, 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킬로미터나 떨어진 데다 진시황릉에 딸린 것이라고 단정 짓기엔 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굴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확실한 증거물이 나왔다.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청동극() 창의 한 가지가 발견된 것이다.

용갱1, 2, 3의 세 개의 갱으로 되어 있고 그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1호 갱동서로 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호 갱의 동서 및 남북의 길이는 각각 230미터와 62미터다. 2호 갱1호 갱의 동북부에 있으며 평면이 곱자처럼 직각의 모양으로, 동서 및 남북의 가장 긴 길이는 각각 124미터와 98미터다. 3호 갱1호 갱의 북쪽, 2호 갱의 서쪽에 있으며 동서 및 남북의 길이는 각각 18미터와 21미터이다.

1호 갱은 전차와 보병, 2호 갱은 전차기병보병의 혼합부대, 3호 갱은 그 양쪽에 늘어선 호위병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군대는 우, , 좌의 3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것을 병마용갱과 비교하면 1호 갱이 우군, 2호 갱이 좌군에 해당되며 중군이 빠져 있다. 2호 갱과 3호 갱 사이에서 미완성의 갱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것이 중군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4호 갱도 발견되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이는 도용(陶俑: 도기 인형) 군대를 묻는다는 계획이 중도에 폐기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 이유는 아마 황제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1호 병마용갱 앞쪽에는 총 204점의 보병 군사들이 3줄로 세워져 있다. 갑옷과 투구를 입지 않고 길게 늘어선 보병 뒤로는 11개의 통로에 세로 38열로 수많은 도용들이 놓여 있는데, 이 도용들은 갑옷을 입고 있다. 또 중간마다 기마 부대를 상징하는 말과 마차가 있으며, 끝 쪽에는 말과 장군 모습의 도용이 있다.

1호 갱 북서쪽에 있는 3호 갱1, 2호 갱과 입구의 모습, 도용의 배치, 사용된 자재가 조금씩 다르다. 2호 갱에서는 병사 1,500명과 수레 및 말이 발견되었다. 3호 병마용갱 입구에는 1, 2호 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사진 넓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지휘관이 탔던 커다란 마차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도로. 이를 증빙하려는 듯 3호 병마용갱에서는 4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있는 청동 마차가 발굴되었다. 또한 도용의 배치도 1, 2호 병마용갱처럼 장군과 병사, 마차, 말이 적군을 향하여 공격하는 형태가 아니라 최고 지휘부를 보호하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청동 유물도 많이 발굴되었다. 3호 갱1, 2호 갱에 비해 더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개의 갱에 7,000명이 넘는 군사와 말 500, 전차 130대가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전투대형으로 늘어서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실물 크기의 인형이다. 키가 175195센티미터로 평균 몸길이는 1.8미터이며 말 역시 키 1.5미터, 몸길이 2미터로 이들은 진시황이 지휘하던 병사들을 한 사람씩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볼 때 병마용갱의 역할은 진시황릉 즉 시신이 묻힌 무덤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호위하는 것이다.

병마용의 기본 구성은 병사와 궁수 등 지상군이며 전차병과 다양한 계급의 전차병들이다. 병사들은 전포(戰袍: 군인이 입는 긴 웃옷)만 입은 군사와 전포 위에 갑옷을 입은 군사로 나뉘어졌고, 신발은 모두 검은색이었으며 화려한 주황색 끈으로 묶고 있었다. 전포는 두루마기 모양으로 모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장교들은 초급장교, 중급장교, 고급장교(장군)로 구분했다. 장교들의 갑옷은 좀 더 화려하며 장교와 사병 모두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렀다. 또한 눈의 흰자위 안에는 검게 칠한 홍채가 있었다.

이들은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전통(箭筒)에서 화살을 빼내 적을 향해 쏠 듯한 모습, 오른쪽 발을 모로 하고 서서 쏘는 자세의 병사, 몸을 약간 굽히고 전차를 모는 전차병 등 그야말로 황제를 지키려는 충성스런 군대의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계급에 따라 휴대한 장비는 물론 배열한 위치도 다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얼굴이다. 모든 얼굴이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똑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실제로 황군에서 복무한 병사들의 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학계에서는 이 병사들이 각각의 실제 사람을 모델 삼아 제작됐는지 아니면 장인들이 보통 사람의 얼굴 특징을 짐작해 제작했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문제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및 중국 진시황릉 박물관 공동 연구팀2014, 병마용갱의 모든 토기 병사들은 실제 군인을 모델로 삼아 제작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이 이 같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주목한 신체 부위는 바로였다.

인간의 귀사람의 지문처럼 사이즈와 형태, 각도 등이 사람마다 각각 독특한 모양을 지닌다. 연구팀은 총 30점의 토기 병사들을 3D 기술로 모형 제작해 비교한 결과, 병사들의 귀 모양이 각각 달라 이는 실제 사람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왕이 죽으면 왕비와 후궁, 신하들을 산채로 함께 묻는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으나 진시황제 때는 토용을 만들어 묻었다. 시황제릉의 동쪽에서 발견된 마구간의 흔적에서 20마리의 뼈가 나왔는데 발견된 말들의 골격을 측정하니 그것은 용갱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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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제작>

중국에서 ()은 사자와 함께 무덤에 묻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만든 일종의 부장품이다. 대부분의 전제 국가에서 왕과 같은 중요 인사들이 죽으면 산 사람을 묻었고 이를 순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문제는 사회의 노동력이 크게 저하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산 사람 대신에 이를 대신할 용을 제작하여 묻었다. 그러므로 용의 부장인간 순장의 계속으로 인식하여 용을 당시 순장당하는 것과 다름없이 당시의 인물들을 재현한 것이다.

병마용 제조법은 그야말로 놀라움 그 자체이다. 도용 제작은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이용해 고도의 분업형태로 이뤄졌다. 인물의 몸통 부분은 전후 주형, 말은 좌우 주형으로 만들고 머리와 사지 부분은 개별적으로 만드는 등 11개의 기본 유형을 만들어 위치에 따라 재조립해 원하는 모형으로 만들었다. 이어 모형에 고운 점토를 덧입히고 머리카락, 수염, , , 근육 등을 새겨 넣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코, , 갑옷의 장식못 등 주형으로 뜬 세부를 덧붙였다. 이렇게 만든 인물상을 1,000도 이상의 가마에 구운 후 소속부대의 색깔별로 칠했고 여기에는 도공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이처럼 대량생산 기법과 함께 손으로 일일이 마무리하는 공정은 이후로도 계속 부장품용 도용 제작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은 모두 진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재질이 견고하면서도 손 감각이 부드러우며 색상은 청회색이다. 제작 방법소조와 목형을 결합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각 부위를 나누어서 각기 제작한 다음 하나로 붙인 후 불에 구워서 만들었다. 체구의 단면에서 먼저 발과 다리를 만들고 조금 마른 다음 다시 상체를 만들었으며 팔은 따로 만들어서 붙였다. 단면을 보면 내외 2겹으로 되었는데 내벽이 외벽보다 두껍고 어떤 표면에는 손금 자국도 있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제작 단계를 제시한다.

 

먼저 머리, , , 다리, 체구, 디딤돌을 따로 만들어 결합시킨 후 표면에 여러 벌의 진흙을 올리고 조금 마른 다음 다시 제2차 조각을 하여 옷깃, 각반, 갑옷, , , , 머리카락, 수염 등 세부적인 것을 그려 넣는다. 또한 성형시킨 후 마르면 가마에 넣고 구었으며 가마에서 꺼낸 후 채색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이들을 구울 때 불길을 잘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수 천 점의 도용만 생각하더라도 당대의 중국 도기기술이 매우 성숙했음은 알 수 있다.

중국의 도공들은 몸의 각 부분의 기본적인 미적 비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 있을 때는 7(),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5,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는 3.5. 어깨의 폭은 머리의 3, 가슴의 폭은 이마의 2, 이마의 폭은 안구의 5, 이마의 넓이는 얼굴의 3분의 1. 한쪽 손바닥의 넓이는 얼굴의 반, 팔꿈치는 주먹의 3, 목위의 부분은 정강이와 같은 길이등이다. 비례 관계는 해부학적 측면에서 봤을 때도 타당한데 출토된 병마용은 이 비례가 잘 적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병마용을 만든 장인들의 기술 수준이 일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기병용은 말의 왼쪽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고삐를 잡고 왼손에는 활을 쥐고 있다. 말의 등에는 안장과 밑안장이 놓여 있는데 안장의 양 끝은 약간 위로 올라가 있다. 특이한 것은 당대에 등자(橙子.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는 물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등자가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