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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존심(24) : 진시황릉과 병마용(3)

Que sais 2021. 1. 1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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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의 전형>

진시황제의 병마용진 역시 진법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시황릉 주위에서 발견된 거대한 병마용갱은 토용으로 당시 천하를 통일할 때 사용한 진나라의 군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병마용갱의 배치를 보면 당시 이미 전차 위주에서 보병을 중용하는 보병 위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직까지 진시황의 병마용은 모두 발굴되지 않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병마용으로만 분석한 군진은 다음과 같다.

우선 1호 갱의 병마용은 실전군진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쪽에는 동측을 보고 있는 3열의 무사들이 궁노를 들고 있다. 이는 1호 갱의 선봉부대. 남쪽 즉 우익은 남쪽을 바라보는 1열의 무사들이 배치되어있고 좌익은 북쪽에 배치되어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후위는 서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 궁노병 등이 장거리 무기를 들고 있다. 1호 갱의 주력부대38로의 동쪽을 향한 종대로 모두 갑옷을 입고 장병기를 들고 있다. ()의 사이에는 전차가 배열되어 있다. 1호 갱에서 발굴된 병마용은 6000여기나 되며 대부분이 보병이다.

2호 갱4구역에 4가지 다른 병종으로 구성된 자형진형이다. 첫째 구역은 334개의 노군이 배치된 작은 방진이며 둘째 구역은 64대의 전차가 배치된 방진으로 각 전차에는 세 명의 군사가 있다. 셋째 구역은 19대의 전차100여개의 수차도수병용(隨車徒手兵俑)으로 구성되었다. 넷째 구역은 전차 여섯 대의 안마(鞍馬)124기의 기병으로 구성된 기병진이다. 각각 124개로 편성된 기병진이다. 네 단원 모두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하나의 대진이 되고, 또 독립적으로 네 개의 소진이 되어 공격과 방어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어있다. 2호 갱전차병이 많은 것은 그 당시에도 전차가 전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병전차의 역할을 대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7년 조나라의 무령왕이 부하들에게 오랑캐와 같은 복장과 장비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처음에는 중국 문화에 반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지만 기병이 전술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지자 곧바로 전국시대의 각국들은 기병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사용된 말은 체구가 작은 몽골 종이므로 초기의 기병은 주로 활로 무장한 경기병이었지만 기동성이 뛰어났다. 이들은 당대에 위력을 발휘하던 석궁은 사용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석궁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석궁을 장전하는 데 필요한 벨트-훅 장치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석궁을 발로 밟고 서서 두 손으로 잡아 장전해야 하는데 말을 타고 이런 행동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차는 이미 전투에서 퇴조하고 있었는데 진시황제는 그 반대로 전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용갱에서 나온 전차는 모두 나무로 제작된 것으로 전차에는 길이가 3.74미터인 채가 하나 달려 있다. 채는 전차의 축에서 앞쪽으로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막대로 이것을 말의 등에 달고 끌게 하였다. 말이 끄는 가마는 폭 1.4미터, 길이 1.2미터의 직사각형이며 가마 앞에는 가로대, 뒤쪽에는 문, 양쪽에는 창이 달려 있다. 차 바퀴의 직경은 1.35미터이며 전차 한 대에는 4마리의 말이 달려 있다. 말들의 몸 길이는 약 2미터, 높이는 1.7미터다. 단 갈기까지만의 높이는 1.33미터로 이것은 이 무렵에 쓰여진 오래 된 문서의 내용과 잘 일치한다.

전차한나라 때부터 기병이 더욱 선호되고 특히 말에서도 석궁을 발사할 수 있게 되자 완전히 퇴출된다. 참고적으로 기원전 170한나라 군대장전장치를 갖고 있었으며 가벼운 석궁은 한 팔만으로도 장전할 수 있었다.

3호 갱은 전체 형태로 보아 지하 군진의 지휘부로 보인다.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 마용 4, 진용 78, 전차 1대가 출토되었다. 동쪽은 사파문도(斜坡門道) 문의 맞은편에 차마방(車馬房)이 있다.

1, 2호 갱 안의 무사들이 장비한 무기는 장거리 사격용 궁노와 근거리에서 격투할 때 사용되는 ()()()()이 발견된다. 반면 3호 갱 안에는 날이 없는 동수(銅殳)만 있다. 진나라 때 동수는 의장적인 병기였다.

 

<황사의 고향 서안과 황하>

중국의 황하 유역황토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데 서안지역이 바로 황토의 고향이기도 하다. 북경에서 서안, 난주를 거쳐 서역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온통 황토로 뒤덮여 있다. 서안 중심의 위수분지 일대는 년강수량이 500밀리미터에 지나지 않아 인공관수를 하지 않으면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과거부터 황토에 굴을 파고 기거했다. 축사, 저장고, 농작물의 창고도 굴이며 심지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쉬는 그늘도 굴이다.

중국의 황토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소 달라 약간 회색의 다공질 황토로 마치 분설(粉雪)이 쌓인 것 같다. 20만 년 전 홍적세에 북쪽과 서족의 고비사막으로부터 실려 온 황진이 계곡이나 분지에 계속 퇴적돼 오늘에 이르렀는데 황토층의 두께가 수백미터에 달하는 곳도 있다. 다공질 황토이므로 비가 오면 쉽게 스며들고 퇴적의 밑부분이 죽처럼 되면서 일시에 수십 수백 미터가 붕괴되기도 하여 이상한 지형을 만들기 일수다. 이러한 황토층을 흐르는 황하가 흙탕물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중국의 북부에 황토가 쌓이기 전까지 이들 지역이 광막한 초원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황토 속에서 타조의 알이 화석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중국의 젖줄인 황하는 황토가 어느 정도 쌓인 후 하천으로 개석(開析)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는 끊임없이 바람에 의해 황진이 쌓이고 그것을 다시 황하가 침식하는 대자연의 되풀이라 볼 수 있다. 란주에서 하서회랑을 거쳐 서역에 이르는 곳은 초원 아니면 사막인데 문제는 이와 같은 사막화가 보다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지역의 연평균 강수량은 100밀리미터에 지나지 않으며 유명한 손오공의 무대로 화염산(火焰跚) 등이 있는 투루판은 거의 비가 내리지 않고 1년에 섭씨 40도를 넘는 날이 50여 일이나 된다.

이곳을 비롯하여 몽골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한국을 강타하여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므로 몽골의 홍산 지역에서는 한국에서 나무를 심어 황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학자들은 황사가 일어나는 지역에 나무가 본격적으로 자란다면 황사의 상당부분을 줄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알렉산더와 진시황제의 격돌의 승자>

군사진법 중에서 유명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군 보병 진형이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격파한 가우멜라 전투를 보자.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군 보병은 직사각형 방진(方陣)을 구성했다. 팔랑크스(환타생)이라 불리는 밀집 보병들은 방패를 나란히 세워 앞을 가리고 창끝을 가지런히 앞으로 겨눈 채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전진했다. 그들은 두 방향으로 갈라져 우측 부대가 적의 왼쪽을 공격했다. 그 사이에 알렉산더는 기병부대를 이끌고 적진의 중앙을 돌파해 곧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지휘부로 파고들어 일거에 격파했다. 가우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자 중 하나가 된다.

근래 매우 흥미 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알렉산더의 정예와 진나라 진시황제의 군이 격돌했다면 어느 편이 승리했을까 하는 주제였다.

학자들은 단연코 진시황제가 승리했을 것으로 장담한다. 그것은 진시황제의 지하군단(地下軍團) 진법페르시아카르타고로마는 물론 마케도니아도 능가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구사한 보병군단의 진법은 창을 내밀고 전진만 하는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전혀 달랐다. 맨 앞에 석궁수(石弓手)와 궁수, 좌우에 석궁수, 중앙에 돌격대, 뒤편에 후방 경계 병사로 짜인 ()()()() 대형을 이루었다. ‘석궁과 활로 적진을 흐트러뜨리면 돌격해 백병전을 펼치고, ‘적을 포위하거나 아군의 측면을 방어하며, ‘후방을 지켰다

보병 방진 여러 개가 중앙의 주력 방진 양옆에 V자 대형으로 비스듬히 줄을 지어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안행지진이다. 진시황제는 여기에 기병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가미한 전술을 창안했다. 보병이 돌격한 뒤 전차기병이 적의 측면을 협공하면 보병 방진이 옆으로 흩어져 적을 포위하는 전법이다. 독립적인 보병 대군단과 기병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조합해 적이 어떤 전술을 써도 변화무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한 진시황의 전술이 있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윤명애는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