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중국의 자존심

중국의 자존심(25)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4)

Que sais 2021. 1. 1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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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묘가 아니다>

좀 색다른 주장이지만 일부에서 병마용이 정말로 진시황제의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984년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이던 천징웬(陳景元)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60여 개의 근거를 제시하며, 병마용이 진시황제와 관련이 없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병마용의 군진이 진시황 당시의 군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1,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마천의 사기를 위시한 모든 사적은 진시황의 군사는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진시황 당시 전차전을 벌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 시대 이전의 전국시대 초창기인 구시대의 것이라는 지적이다.

둘째, 병마용의 병사들은 각양각색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진시황의 친위군단이 전쟁 필수품인 투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 병사들은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는데 병마용에 보이는 무사들이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이란 점을 볼 때 진시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셋째, 진시황은 통일 후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전술운용을 용이하게 하고자 전차의 넓이를 통일했다. 그런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넓이가 일정치 않다.

넷째, 병마용에서 사용된 색깔이 진시황 정부의 그것이 아니다. 진시황은 검은색을 통일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에 전부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그러나 병마용의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 진한 녹색의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 등의 화려한 긴바지를 입고 있다.

다섯째,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모자 및 여성처럼 쪽진 머리 모양,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 등은 진나라보다는 오히려 초나라의 풍속과 많은 유사점이 보인다.

여섯째, 고대 황릉은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병마용진시황릉 동쪽에 있어 풍수 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병마용과 진시황릉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일곱째,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그동안 개인적으로 소장해 온 청동기전부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동기를 소장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이렇게 수거한 청동으로 무게가 각각 24만 근에 이르는 동상을 12개나 주조했다. 그런데 병마용갱청동으로 된 80량의 전차가 매장돼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천징웬 교수병마용의 진정한 주인은 기원전 306년에 죽은 진나라 28소왕(昭王)의 모친,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秦宣太后)라는 것이다. 진선태후진소왕 시기에 41년간 섭정한 여걸로 후세 사람은 그녀를 진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의상이 당시의 초나라 사람을 닮았고 병마용은 진선태후의 유해를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로 운구하는 행렬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천징웬의 주장은 1984년 병마용 발견 10주년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와 학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저명한 진한시대 전문가 임검명(林劍鳴)1985년에 발간된 학술지 <문박 제1>에서 '진용지미'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아래의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천 교수의 주장에 부분적인 지지를 보냈다.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결정적 문헌자료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의 대부분은 청동기인데, 이것은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진시황 당시의 야금 기술 수준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 후 수많은 학자들이 발표한 병마용 관련 연구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선 진시황제의 병마용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병마용갱에 관해서는 단 한 구절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으며 회남자, 문헌통보등 실제로 진시황제의 병마용이라면 당연히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도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진시황릉은 규모면에서 어느 것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세계최대였던 쿠푸왕 피라미드보다 10배 이상 크고 넓은데 왜 진시황릉 옆에 묻지 않고 1.5km 떨어진 다른 곳에 따로 묻었는가이다.

더욱 큰 의문은 순장이나 부장품능원 안에 있는 것이 기본으로 능원 밖에서 발견된 예는 중국에 아직까지 없다는 점이다. 어떠한 순장이나 부장품도 능원에서 5리나 떨어진 지하에 묻어둔 적이 없다는 점이 지적이다. 실제로 19999월 일반인에 개방된 시안의 한양릉의 도용과 장쑤성 쉬저우 한양묘의 병마용도 전부 능원 안에 있다.

또한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 진시황이라면 동서남북 4방을 다함께 중시해 온 중국이 동쪽에만 병마용을 묻어 두었을 리 없다는 점도 지적감이며 병마용의 정확한 위치진시황릉의 정동 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있다는 점이다. 진선태후의 고향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다.

더불어 진나라에는 순장의 폐습이 존재했다가, 목공 이후 서서히 사라지고 없었다. 특히 남쪽의 , , 등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 목각, 옥기 등 각종 부장품을 매장했다. 진선태후초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로 진시황이냐 아니냐가 지적사항이 되자 1990년대 이후에 나오는 중국사 연구서에는 진시황병마용이라는 말 대신 그냥 진용(秦俑)이라 표현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점이 의혹을 부풀렸다.

그러나 병마용진시황제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우선 병마용갱의 1호 용갱에서 발견된 꺾창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 설치한 관청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진시황릉 주변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등을 볼 때 병마용갱을 진시황릉의 부속 시설로 인정해도 무리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년대 문제만 해도 진시황제의 고조할머니 즉 기원전 306년에 죽은 진선태후의 묘에 후대에 태어난 여불위(?기원전 235)에 관한 내역이 발견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커다란 지적 사항으로 병마용갱의 토용이 채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상당수 남아있는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고 제시되었다.

투구 문제도 두 가지로 반박한다. 우선,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 준비태세를 갖춘 모습 즉 투구를 아직 쓰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면 날이 부러지기가 쉬우므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 하는 반면,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천 교수선태후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제기되었다. 참고로,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고 알려진다.

여하튼 천 교수의 주장은 주류 여론의 파도에 완전히 잠기고 말았지만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설명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추후의 연구로 보다 명쾌한 해석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진시황릉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이로운 고고학 유적지이자 독특한 건축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이 있는 배치수도 셴양의 도시 계획을 반영하고 있다.

병마용갱1979101일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지만 1976년에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외국 원수로는 처음으로 방문했다. 뒤이어 1979프랑스의 쟈크 시락 총리가 방문했는데 그는 병마용갱을 보고 그야말로 극한의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마용갱은 제8대 세계의 불가사의다.’

 

실제로 진시황의 병마용갱은 1979101일부터 개장되었는데 1980년에 이미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하여 100만 명을 넘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20년까지 최소 600만여 명의 해외 방문객을 포함하여 약 6,000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다고 알려진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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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달전리 토광묘 발굴의 의미', 노혁진, 한국의 고고학, 2006년 가을(창간호)

'진시황의 오색찬란한 지하군단', 브룩 라머, 내셔널지오그라픽, 20126

'진시황제 병마용 갱서 최강 살상력 석궁발견', 박종익, 나우뉴스, 2015.03.21

'무덤 속에 왜 수은 강이 흐를까', 이성규, 사이언스타임즈, 2016.12.19.

'병마용은 진시황의 것인가?', www.coo2.net,

'병마용갱/진시황릉', 윤명애, http://blog.naver.com/tcasuk

http://yellow.kr/blog/?page_id=2237&uid=313&mod=doc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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